혹독(酷毒)하게 지배(支配)받은 곳
1942년 가을까지 독일은 가히 전 유럽의 지배자(支配者)라 해도 과언(誇言)이 아니었습니다.
점령지(占領地) 및 괴뢰국(傀儡國), 동맹국(同盟國), 우호국(友好國)을 제외(制外)하면 독일의 영향(影向) 하에 놓이지 않은 세력(勢力)은 영국(英國)과 소련(Ruissa)밖에 없었습니다.
스위스(Swiss)와 스웨덴(Sweden)은 중립(中立)을 유지(維持)했어도 사실 독일이 놔둔 것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전투에서 패(敗)한 그해 겨울부터 쇠퇴기(衰退期)에 접어들었으나 독일은 패망(敗亡) 3개월 전인 1945년 2월까지 영토(領土) 밖에서 싸움을 벌였습니다.
↑제2차 대전 중반까지 독일은 유럽의 지배자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독일은 점령지를 상당히 혹독(酷毒)하게 지배(支配)했습니다.
시민(市民)들이 저항(抵抗)하면 제압(制壓)을 해도 전쟁 중에는 전선 배후(戰線背後)의 안전(安全)을 도모(圖謀)하기 위해서 점령지에서 민심(民心)을 최대한 우호적(最大限友好的)으로 유지하도록 민사작전(民事作戰, Civil Affairs Operations)을 펼칩니다.
하지만 편협적(偏狹的)인 인종주의(人種主義)와 게르만 우월주의(優越主義)에 빠져있던 독일은 정반대(正反對)로 행동(行動)했습니다.
단순한 탄압(彈壓)과 착취(搾取)만으로도 부족(不足)하다고 느꼈는지 잔악(殘惡)한 학살(虐殺)과 파괴(破壞)가 일상이었습니다.
↑독일은 점령지를 혹독하게 대했습니다
스탈린 통치(統治)에 적개심(敵愾心)이 강했던 발트(Baltic) 3국, 몰다비아(Moldova), 우크라이나(Ukraina) 같은 경우는 처음에 독일군을 해방군(解放軍)으로 환영(歡迎)했지만, 예상(豫想)과 달리 혹독(酷毒)하게 탄압(彈壓)받자 자발적(自發的)으로 반독 활동(反獨活動)에 나설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전선(戰線)에만 집중(集中)해도 모자란 판에 점령지 관리(占領地管理)에 많은 전력을 투입(投入)할 수 밖에 없는 정책(政策)은 독일이 패전(敗戰)하게 된 이유(理由) 중 하나였습니다.
상식적(常識的)으로 후방(後方)이 불안(不安)한 데 전선이 안정적(安定的)일 수 없습니다.
↑친독(親獨) 행위를 벌이는 반소(反蘇) 우크라이나(Ukraine)인들, 하지만 이들은 토사구팽(兎死狗烹)당합니다
하지만...나치독일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민간인 학살,수탈 등 악행을 저지릅니다. 결국 빨치산이 활동하게 되죠. 우크라이나 서부쪽은 나치독일에 상당히 협조했다고 하는군요.
전선의 변화(變化)로 말미암아 독일의 지배(支配)를 받은 기간(期間)은 지역(地域)마다 짧게는 수일에서 길게는 5년이 넘을 정도로 편차(偏差)가 큽니다.
당연히 오랫동안 지배를 받은 곳은 그만큼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대부분의 자료(自了)에서 제2차 대전 발발일(勃發日)로 보는 1939년 9월 1일에 독일의 침략(侵略)을 가장 먼저 받았던 폴란드(Poland)는 전쟁 전에 점령(占領)당 한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 다음으로 가장 오랫동안 나찌(Nazi)의 혹독(酷毒)한 지배를 받았던 불운(不運)한 나라입니다.
↑1939년 9월 폴란드의 항복 장면
한 달 동안 벌어진 전쟁에서 군전사자(軍戰死者)가 6만이었지만, 이후 6년여의 점령 기간 중 죽은 폴란드인들이 600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說明)됩니다.
당시 영국군이 45만, 미군이 40만이 전사했다는 점과 비교하면 그 규모(規模)를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이 단지 슬라브(slave)인, 유태인(猶太人) 등이라는 편협(偏狹)한 이유만으로 잔인(殘忍)하게 학살(虐殺)당했습니다.
제2차 대전이 유달리 혹독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무고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렇게 가혹(苛酷)한 탄압(彈壓)이 장기간화(長期間化) 되자 그만큼 폴란드인들의 강력(强力)한 저항(抵抗)을 불러왔습니다.
그렇게 탄압(彈壓)받고도 반발심(反撥心)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폴란드인들은 수시(隨時)로 무력 행동(武力行動)에 나서 독일을 곤혹(困惑)스럽게 만들고는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전쟁 말기(末期)인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이어진 '바르샤바 봉기(Warsaw Uprising)'는 가히 저항의 상징(象徵)이라 할 만한 사건(事件)이었습니다.
↑바르샤바 봉기는 폴란드의 불꽃 같은 의지였습니다
하지만 시작(始作)과 진행(進行) 그리고 주변 강대국(强大國)의 이해타산(利害打算)으로 인해 두고두고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원인(原因)은 소련과 관련(關聯)이 많았습니다.
1944년 6월 22일 소련은 독일군을 소련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러시아군을 이끌던 바그라티온(Bagration)의 이름을 딴 대공세(大攻勢)를 벌였습니다.
정확히 3년 전 독일이 소련을 침공(侵攻)한 날짜를 택(擇)해서 실시(實施)했을 정도였고 전선 중앙(戰線中央)을 담당(擔當)하던 독일 중부집단군(中部集團軍)이 일거(一去)에 붕괴(崩壞)되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의 소련
↑모스크바 시내를 행진중인 독일군 포로들. 소련이 포로들에게 취한 이런 방법은 훗날 중국 인민해방군과 북한 인민군, 베트남 공산군도 똑같이 실행했는데 서구세계로부터 모욕적이며 비인도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150만의 소련군이 벨로루시(Belarus)를 통과(通過)해 동부(東部) 폴란드로 서서히 진입(進入)하기 시작했습니다. 7월 중순(中旬)이 되자 선두(先頭)에 섰던 소련 제1벨로루시전선군은 바르샤바 부근(附近)까지 접근(接近)했고 이제 역사적(歷史的)인 도시(都市)의 해방(解放)은 목전(目前)에 다가와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5년간 독일의 압제(壓制)에 시달린 폴란드인들의 심정(心情)은 상당히 복잡 미묘(複雜微妙)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련도 폴란드에게 달갑지 않은 외세(外勢)이기 때문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