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형편은 어렵지만 남을 돕는 이들의 미담(美談)이 무미건조하고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내가 대학교에 다닐 적에 사회 경험도 하고 작게나마 재능 기부를 할 요량으로 구청에 자원 봉사를 했던 적이 있다. 그때에 알게 된 ‘키다리 아저씨’소방관 이야기다.
아저씨는 소방관 동료들과 함께 11년째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을 후원하고 있다. 2001년에는 독거노인을 돕기 위하여 홑몸가구 돕기 봉사를 시작했다. 예상 외로 노인뿐 아니라 혼자 사는 청소년들도 많았다고 하셨다. 아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힘드냐”고 물으니 “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중학생이 혼자서 집안일 하는 것도 안쓰럽고 어린 나이에 돈 때문에 고민하는 게 가슴 아팠다.”고 덧붙이셨다. 고민하던 아저씨는 동료들과 매달 10만원을 모으기로 했다. 구청에서 소개받은 고교 1학년생 한 명을 3년간 후원했다. 이들은 대부분 단칸방에서 경제적 능력이 없는 형제·자매·조부모와 살다 보니 “학원은커녕 문제집을 사기도 힘들다”고 했다.
한 명이 졸업할 때쯤 또 다른 한 명을 후원하는 방식으로 총 다섯 명을 후원했다. 별도로 매달 적금을 들어 졸업할 때 “학비에 보태라"면서 전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네 명을 졸업시켰으며, 올해는 고1 남학생을 돕고 있다. 아저씨는 맨 처음에 후원했던 학생이 지난날 서울대 박사 과정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웃으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저씨는 후원하는 학생들을 1년에 두 번씩 고깃집으로 부른다. “한창 클 나이인데 먹고 싶은 게 오죽 많겠습니까. 애들한테 고기라도 실컷 먹여야지요.” 하지만 자신을 ‘소방관 아저씨’로만 소개하고 이름과 직장은 알려주지 않았다. 전화나 편지도 못하게 했다. 학생들이 부담을 느낄까봐 걱정되어서다.
학생들을 후원하기 전에도 아저씨는 월급을 쪼개 각종 병원과 복지관을 도왔다. 매달 서울 미아동 성가복지병원, 적십자사, 성동사회복지관에 후원금을 내고 있다.
“지금껏 후원금 지로 납부 용지를 깜빡해서 두 번 연체한 것 말고는 한 번 도 안 밀렸어요. 그 때도 얼른 정산하고 자동이체로 바꿨지요.”
근무가 없는 날에는 두 아들과 함께 독거노인 등을 찾아가 도배 봉사를 한다.
26년 경력의 소방관인 아저씨는 각종 사건·사고 현장에서 구조를 하다가 봉사를 결심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 있었어요. 사지 가 떨어져 나간 시신 수백구를 봤지요. ‘돈이나 명예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런 의미가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만 위해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 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는 407번이나 헌혈을 한 ‘헌혈왕’으로도 유명하다. 전국에 400번 이상 헌혈한 사람은 18명 밖에 없다.
지난 3월에는 이 공로로 청와대에 초청도 받았다. 헌혈을 하고 받은 증서는 50장씩 모아두었다가 혈액암 환자에게 전달한다. 헌혈증이 있으면 환자들은 적은 비용으로 수혈을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환자 12명에게 증서를 줬는데, 그 중에 두 명이 완치됐다. 이 또한 아저씨한테는 눈부신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1981년 고향 친구가 교통 사고를 당했을 때 피가 부족했는데 제가 헌혈을 했지요. 헌혈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뒤로 아저씨는 한 달에 한두 번씩 정기적으로 헌혈을 해왔다.
아저씨의 다음 세 마디가 ‘엄지척’이었다.
“15년 전부터 술·담배·커피도 끊었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구요. 이왕이면 건강한 피를 선물하는 게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