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운전사에서 운수업계 대부로
이른바 성공했다는 사람들에게서는 닳고닳은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돈 많이 번 사람은 돈 냄새,공부 많이 한 사람은 지식의 풍모,권세가에게서 저절로 위엄이 배어나온다.
'사람냄새' 정겨운 유도계 원로
충북도내에서 단일회사로는 가장 큰 규모의 시내버스회사인 동일운수, 이 회사 박장윤(76)사장을 사람들은 ‘운수업계의대부’ ‘유도계의 원로(공인9단)’라고 부른다. 그런 박 사장에게서는사람냄새가 난다. 흔히 운수업을 기름밥에 비유하지만 그에게서는 기름냄새 대신 인간과 유도와 나라에 대한 진한 애정이 풍긴다. 박사장은 해마다 4월 초파일 전에 우암산에 있는 보현사를 찾는다.평생을 운수업에 종사한 사람으로서 박 사장 회사 차에희생당한 고인들의 명복을 빌기위해서다. 스님들도 그 정성에 놀라고 얼마나 갈까 궁금해 하던 회사 직원들은 이 대목에서 절로 고개를 숙인다. 또한 매년 정월 초하루에는 용화사수도원,관음사,보현사,수정암,풍주사 등을 모두 돌며 희생자의 명복과 안전운행을 기원한다.
박 사장이 존경받는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특히 기름밥으로 번 돈을 정승처럼 쓰는 사람이다. 13년전 부터 ‘은동장학회를 만들어 해마다 유도선수 50명에게 10만원씩의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1억을 목표로 매년 지역개발회에 적립하고 있으며 현재원금이 8300만원에 이른다.
전세계 유도계를 주름잡고 있는 전기영.조인철 등 웬만한 충북출신 유도선수는 이 장학금을 안 받은선수가 없을 정도다. 박사장을 향한 유도계의 존경심은 “이런 분은 전국에서도 드믈다” 는 표현으로요약된다. 돈 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19세에 일본서 운전면허 취득
그는 운수업을 숙명으로 알고있다.
19세에 일본에서 운전면허를 딴 이래 집나이로 77세가 된 지금까지 운전과 유도는 그의 생활방편일 뿐 아니라 존재이유가 됐다. 지금은 시내버스 71대를 보유한 동일운수 사 장으로 ‘운수업계의 대부’가 되기까지 그의 삶은 우리나라 운수업의 역사였고 ‘유도계의 산증인’이다.
박 사장은 1925년 보은 이평리에서 3남4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덩치가 크고 운동을 잘했던 그는 삼산초등학교 졸업때까지공부보다는 씨름과 마라톤을 좋아했다. 1936년베를린 올림픽의 손기정마라톤 우승에 영향 받은 그는 손기정의 모교인 서울 양정중학을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일본에 가면 돈 벌면서 공부와 운동도 할 수 있다는 권유에 14세의 박장윤은 도일하여 낮에는 약국에서 잔심부름하 며 야간인 ‘가마타’ 중학교를 졸업한다. 그는 틈만나면 유도와 복싱 을했다. 강제징병 2기에 해당하는 박장윤은 이왕 끌려갈거라면 기갑부대로 가기위해 중학교 졸업후 19세때인 1943년 운전면허를 땄다. 당시에는 일본인도 면허가 귀해서 운전면허만 있으면 취직이 쉬웠고 박장윤은 ‘일본통운’에 들어가 4톤 트럭을 운전했다. 대동아공영권 구축을 부르짖으며 지구의 동쪽절반을 유린해 들어가던일본제국주의가 유황도와 괌 등의 남방전선으로 보내는 군수물자를 미쓰비씨 공장에서 동경역까지 실어 날랐다. 월급도많이 받았다. 국내의 교장이나면장 월급이 30엔정도에 불과했지만 박장윤은 상여금 받을때는 220엔평월 에는 120엔을 받았다. 이때의 매력이 박장윤을운전인생의 길로 안내한다.
징병영장을 받고입대하기전에 고향에나다녀오겠다고 귀국한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다. 귀국할때 가져온 7만엔은해방후 그냥 버리고 빈털털이가 됐지만 운전은 다시 박장윤을 생활인으로 만든다. 대전고등학교에 다니던 동생 장년(71.예비역 중령)과 함께 대전 부사동에서 자취하며 운수회사에 취직해 4톤 트럭을 운전했다.이때도 벌이가 좋아 동생 학비도 대고 부인 김정례(73)와 결혼도했다. 그러다가 6.25전쟁 이 터졌다. 운전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던 그는 주위의 권유로 보은 경 찰서 경찰관에 지원했고 면접만치르고 순경이 되어보은경찰서장의 짚차를 운전했다. 2년뒤 그의 운동실력을 아깝게여기던 상사의 추천 으로 충북도경 수사과 강력계형사로 전출돼 유도선수생활이시작된다. 경찰의 날인 10월21일이면 도경찰청 대항 전국경찰 유도대회에 충북도경 대표로 출전했다. 역사의 질곡은박장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사 승진과 동시에 청주경찰서 외근감독 발령을 받은지 얼마안돼자유당 말기의 1.4파동이 터지고 유도선수였던그는 무술경관으로 차출돼 국회에 파견 나갔다가 1주일만에 4.19가일어나고 곧 옷을 벗는다.
박장윤 사장의 일생을 보면 그는인생의 전환기를 늘 운전으로 다시 시작했다. 경찰 퇴직후에도 그는 다시 운전에 손을 댔다. 1960년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16인승마이크로버스 3대를 구입해 청주-조치원 구간을 운행하는 ‘청주합승’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운수업에 손을 대게된다. 서울가는 경부선열차 이용승객이 대부분이었다. 대형버스를 이용한 운수업에는 1965년부터 72년까지 주주로 참여했던 시외버스 ‘충북운수’ 시절부터 시작됐다. 72년 시외버스회사에 시내버스가 병설되면서 시내버스 3대를 구입해 ‘동신버스’상무이사가 된다. 다시 74년에는 시내버스 30대를 인가 받아 ‘동일운수’를 설립하고 75년 9월부터 지금까지 27년간 대표이사를 맡고있다.현재는 시내버스 71대로 단일 규모로는 가장 큰 시내버스 회사가됐다. 동일운수의 오늘이 있
기까지에는 박 사장의 고집스런 운수업 철학이 있었음을 직원과 친구들은 증언한다. 84년부터 5년간 중형좌석 2대를 투입해 청주 상당산성 오지 마을에 년간 2억씩 적자를 보면서도 험난한 고갯길을 단독운행한 것이다. 수입보다도 “우리버스를 타고 시민들이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해 지는” 천상 운수업 체질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박 사장은 경영도 중요하지만 “동일운수가 제일 친절하다”는 평가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친절봉사’를 사훈으로내세우고 직원들에게 자주 교육을 실시한다. 그 결과 “사고지수,과징금건수등을 비교해 판단하는 증차심사에서 항상 다른운수회사를 앞서고 모범이된다”고 청주시청 교통과 시내버스 담당 공무원은 귀띔한다.
박 사장은 요즘 사양화 추세에 있는 운수업 때문에 고민이 많다. 버스 승객이 1대당 하루평균 630명정도는 돼야 현상유지가 되는데 요즘에는 하루 580명선 밖에 안된다. 10여년전의호황기에는 800명까지도 됐었 는데 요즘은 주 고객인 학생들을 승합차가 실어나르고 대형매장의 셔틀버스 운행 때문에 타격이 크다. 그러나박 사장은 운수업외에 다른 업종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운수업은 봉사업이다. 6시에 일어나 안전운행과 나라발전,통일을 기원하고 밤 12시에마지막 버스의 무사고 운행을 확인한 뒤 잠자리에 들때까지 친절봉사하는 동일운수만 생각한다” 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