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574
4월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부활 제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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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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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5zcsS6gg7E
[서울대교구 최선광 마티(논현2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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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분의 삶과 죽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
송홧가루가 날리기 시작하면 바닷물 수온이 조금씩 올라갑니다. 그것은 바닷속 생명체들이 활동을 시작한다는 표시입니다,
밤바다가 열리면 만사 제쳐놓고 바다로 나갑니다. 이른바 해루질을 하러 나가는 것입니다. 해루질을 해보니 은근 중독성이 있습니다. 쏟아져내리는 별들을 등에 이고, 광활한 밤바다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어 다니다 보면, 여기저기서 게나 물고기, 골뱅이나 소라가 갑자기 나타나는데, 손에 넣기라도 하면 로또라도 당첨된 듯 기분이 좋아집니다.
성공적인 해루질의 관건은 뭐니 뭐니 해도 강력한 밝기의 랜턴에 달려있습니다. 평소 쓰던 랜턴이 빈약해서 강력한 것로 장만하려 했더니, 광고가 떴습니다. 가격도 괜찮고, 사이즈도 적당하고, 그 랜턴 하나로 마을 전체가 대낮처럼 환해진다는 광고였습니다.
혹시라도 품절될까 봐, 초스피드로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품이 도착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포장지를 뜯어냈습니다. 제품을 조립하고 충전하고 켜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또 다시 과장 광고에 속았습니다. 마을 전체가 밝기는커녕, 방 한 칸도 밝힐 수 없는 과장광고였습니다.
할 수 없이 정식 랜턴을 하나 장만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랜턴을 켜니 대낮처럼 밝아졌습니다. 희미한 바닷물 속도 시원시원하게 보이니 수확량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강력한 밝기의 랜턴이었는데, 동녁에 해가 떠오르니, 즉시 별 것 아닌 초라한 존재로 전락해버리더군요. 강렬한 태양 빛 앞에 가로등이나 랜턴 등 모든 빛이 존재감이나 가치를 상실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빛이 강제하지 하십니다. “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언젠가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나타나셔서 세상과 인간을 심판하실 때,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날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오시는 주님! 그분 자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분의 등장 앞에 다른 모든 존재나 대상들은 즉시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맙니다. 마치 강렬한 태양 앞에 촛불 한 자루처럼 말입니다.
그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날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잘 경청하고 실천했는가? 우리가 그분을 얼마나 빼닮았는가? 우리가 그분의 삶과 죽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 유일한 의미요 가치인 주님을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가? 바로 그것이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강렬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얼굴을 반영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반영하는 얼굴이어야 합니다. 가장 예수님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에 잘 반영한 사람이 있었으니, 성모님이셨고, 또 오늘 축일은 맞이하시는 시에나의 카타리나(1347~1380) 성녀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얼굴은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을 반영하고 있는가요? 오늘 우리의 목숨은 그저 목숨 부지하기 위해 마지못해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주님 안에서 보다 풍요롭게, 보다 자연스럽고 충실하게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해루질을 해보니 은근 중독성이 있습니다. 쏟아져내리는 별들을 등에 이고, 광활한 밤바다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어 다니다보면, 여기저기서 게나 물고기, 골뱅이나 소라가 갑자기 나타나는데, 손에 넣기라도 하면 로또라도 당첨된듯 기분이 좋아집니다.
성공적인 해루질의 관건은 뭐니뭐니해도 강력한 밝기의 랜턴에 달려있습니다. 평소 쓰던 랜턴이 빈약해서 새로 하나 장만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랜턴을 켜면 대낮처럼 밝아졌습니다. 희미한 바닷물 속도 시원시원하게 보이니 수확량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강력한 밝기의 랜턴이었는데, 동녁에 해가 떠오르니, 즉시 별 것 아닌 초라한 존재로 전락해버리더군요. 강렬한 태양빛 앞에 가로등이나 랜턴 등 모든 빛이 존재감이나 가치를 상실해버렸습니다.
언젠가 사람의 아들이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세상과 인간을 심판하실 때,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날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오시는 주님! 그분 자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분의 등장 앞에 다른 모든 존재나 대상들은 즉시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맙니다. 마치 강렬한 태양 앞에 촛불 한 자루처럼 말입니다.
그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날 유일한 의미요 가치인 주님을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잘 경청하고 실천했는가? 우리가 그분을 얼마나 빼닮았는가? 우리가 그분의 삶과 죽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 바로 그것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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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o45tNJ24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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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예언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요한 12,48-49)
찬미 예수님! 부활 제4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공생활의 결론을 선포하시며 아주 서늘한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이 우리를 심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하신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심판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단죄하는 잣대가 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한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설계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에게 주신 '영원한 설계도'와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쓰는 1m의 자가 진짜 1m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프랑스 파리 근교에는 백금과 이리듐 합금으로 만든 '국제 미터 원기'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는 이 '원기'와 대조하여 자신의 정확성을 검증받습니다. 만약 이 원기가 사라진다면, 세상의 모든 길이는 각자의 주관에 따라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 '원기'가 존재합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 쓰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수천 년 동안 예언자들을 통해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하느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영적 원기'이자 '완벽한 설계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잘생기셨거나 말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의 모든 말과 행적이 하느님이 미리 주신 설계도(구약)와 단 0.001mm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말하지 않고 '설계자의 명령'만을 집행하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심판은 '건축 현장'의 원리입니다. 설계자(성부)가 그림을 그렸고, 건축기사(예수님)가 그 설계도대로 "이 벽돌은 여기에 놓으라"고 명령(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부가 "나는 내 마음대로 다른 곳에 놓겠다"며 고집을 부렸다고 합시다.
기사가 그 인부를 미워해서 내쫓는 게 아닙니다. 설계도와 맞지 않게 놓인 벽돌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고, 건물 전체를 망치기 때문에 기사가 내뱉은 그 '명령'이 그 인부를 '부적격자'로 자동 분류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너를 심판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곧 우주의 설계도인 '진리'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거부한 자는 스스로 '비존재'와 '파멸'의 길을 선택한 꼴이 됨을 의미합니다.
2세기 최고의 철학자였던 성 유스티노는 진리를 찾아 모든 학파를 전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변에서 한 노인을 만납니다. 노인은 유스티노에게 철학책을 덮고 '예언자들의 기록(구약)'을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유스티노는 구약의 설계도를 꼼꼼히 뜯어보았습니다. 특히 그를 전율케 한 것은 수백 년 전의 예언들이 예수라는 인물의 '물리적인 수난 기록'과 소수점 아래 숫자까지 일치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인간이 수백 년 뒤의 죽음의 시각, 방식, 심지어 입고 있던 옷의 처분까지 맞출 수 있단 말인가!'라며 경악했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설계도가 가리키는 이 기사만이 유일한 진리다!" 유스티노는 설계도의 완벽한 성취를 보았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기사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에게 심판은 기사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 자기만의 좁은 철학(가짜 자)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출처: 성 유스티노, 『유다인 트리폰과의 대화』)
유스티노가 그토록 놀랐던 구체적인 설계의 성취는 바로 ‘메시아의 옷’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은 ‘옷을 벗기고 새로 입히는 공정’이었습니다.
① 에덴의 가죽옷과 무화과 잎의 파기 (창세 3,21):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스스로 ‘무화과 잎’(자아의 가짜 자존감)으로 자신을 가렸을 때, 하느님은 짐승을 잡아 ‘가죽옷 을 입혀주셨습니다. 죄인의 수치를 덮기 위해 죄 없는 생명이 피를 흘리고 가죽(옷)을 내놓아야 한다는 최초의 설계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당신의 가죽과도 같은 옷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② 에사우의 옷과 빌려 입은 의로움 (창세 27,15-27):
야곱은 형 에사우의 옷을 입고 아버지 이사악에게 나아가 장자의 복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야곱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가 입은 ‘옷의 향기’를 맡고 축복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짜 장자’이신 예수님의 옷(본성)을 입어야만 하느님 아버지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정교한 예표였습니다.
③ 요셉의 무지개 옷과 구덩이의 수난 (창세 37,23-24):
야곱의 사랑받는 아들 요셉은 형들에 의해 ‘긴 소매 옷(무지개 옷)’이 벗겨지고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가장 사랑받는 아들이 옷을 뺏기고 죽음의 구덩이(무덤)에 들어갔다가 온 민족을 살리는 통치자로 부활할 것이라는 밑그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처럼 당신의 아름다운 옷을 뺏기셨고, 그 대가로 형제인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④ 시편의 옷 제비뽑기와 이사야의 고난 (시편 22,19; 이사 53,5):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겉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습니다."
이 시편의 말씀은 천 년 뒤 십자가 아래에서 로마 병사들에 의해 사진처럼 현상되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옷이 벗겨진 채 모욕당할 것을 설계도에 기록했습니다.
⑤ 그리스도의 옷 벗기심과 우리의 ‘그리스도 입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겨지신 이유는, 당신의 ‘의로움의 옷’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수치스럽게 벗겨지심으로써, 우리에게 신성의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3장 14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라고 명령했고, 갈라티아서 3장 27절에서는 "그리스도와 합해지는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입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설계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의 파견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설계도를 몸소 이행하신 분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은, 스스로 하느님의 설계 원리 밖으로 걸어 나가는 ‘자기 심판’의 길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이기에 아버지의 설계도만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라는 존재를 하느님의 설계도 규격에 맞춰 깎아내는 과정입니다. 어제 강론에서 다룬 태생 소경이 "Ego Eimi(나는 나다)"라고 고백했듯, 우리가 설계도대로 완공될 때 우리 또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많은 성서신학자들이 성령을 알레고리적으로, 예언적으로,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이 아니면 구원이 없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감시하거나 단죄하기 위한 올가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장 나지 않도록, 우리가 우주의 미아가 되지 않도록 보내주신 '생존 매뉴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나는 안다." (요한 12,50).
우리가 오늘 주님의 말씀과 동기화되어 살아간다면, 마지막 날 우리를 찾아올 그 말씀은 무서운 판사가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기분 좋은 '패스포트(Passport)'가 될 것입니다. 설계도와 기사의 완벽한 일치, 그 진리 안에서 구원이라는 건물을 완성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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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미사 경본에서 읽었던 기도문이 생각납니다. “행복하여라!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기도문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핵심을 잘 드러내는 말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구 사목국에 있을 때입니다. 예전에는 사목국만 있었는데 교구의 규모가 커지면서 사목국에도 여러 부서가 생겼습니다. ‘행정실, 교육 담당, 가정 사목, 직장 사목, 복음화 연구실, 선교 전례, 레지오, 일반 병원 사목’으로 부서가 나누어졌습니다. 저는 그중에서 교육 담당을 맡았습니다. 사목을 크게 정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겨 주신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크게 3가지를 맡겨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병자를 고쳐 주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신부님들은 본당 사목하다가 와서 처음에는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저도 비슷했습니다. 국장 신부님은 그런 현실을 아시고, 몇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서 각 부서가 가지는 고유한 사명을 찾도록 하였습니다. 각 부서의 역할을 우리 몸의 여러 기능을 통해서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자전거의 여러 기능을 통해서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신부님들은 그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기의 역할이 무엇인지, 부서의 사명은 무엇인지 조금씩 파악하였습니다. 부서의 역할과 사명을 분명히 파악한 신부님은 훨씬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은 부서는 ‘일반 병원 사목부’였습니다. 신부님은 가톨릭 성모 병원에만 있는 ‘원목 실과 원목 사제’를 일반 병원에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사명을 가지고 신부님은 병원마다 찾아다니면서 ‘원목 실’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였고, 신부님을 찾아다니면서 ‘원목 사제’가 되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신부님은 해외의 병원들도 방문하면서 ‘원목 실’의 기능을 발전시켰습니다. 직접 임상 상담 프로그램을 배웠고, 자원봉사자들이 임상 상담을 배울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가톨릭 회관에 있는 사무실을 얻어서 교육실로 만들었습니다. 임상 상담 교육이 있는 날 이외에는 다른 부서가 교육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대신에 다른 부서는 교육실의 비품을 지원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부서도 교육실의 비품으로 텔레비전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의 열정, 신부님의 기획력, 신부님의 확신은 일반 병원 사목부를 발전시켰고, 서울에 있는 많은 병원에 ‘원목 실’을 만들었습니다. 원목 실을 통해서 많은 교우가 위로받았고, 병원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제 성화의 날’에 사목 체험을 발표하였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교구 사목국의 교육 담당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구역장, 반장을 위한 교육이었습니다. 소공동체를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역장, 반장을 위한 피정과 월례 연수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월 발행되는 구역장, 반장을 위한 ‘길잡이’를 발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남, 여 총구역장 회의를 주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크게 3가지를 새롭게 했습니다. 1월의 월례 연수에는 주교님들이 미사를 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3분의 주교님이 18개 지구를 다니시면서 미사를 해 주었습니다. 구역장, 반장님이 주교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니 좋아하였고, 주교님들도 현장에서 미사를 함께 하시니 좋아하였습니다. 12월의 월례 연수에는 수고하신 구역장, 반장님을 위해서 레크리에이션 강사를 초대해서 즐겁게 지냈습니다. 가수를 초대해서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적은 남성 구역 봉사자를 위한 하루 피정도 만들었습니다. 강북은 동성 고등학교에서, 강남은 서초 구민회관에서 하였습니다. 형제님들이 좋아했습니다. 총구역장 회의를 명동에서 하다가, 각 지구로 찾아가서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직업도 ‘금수저’는 아니었습니다. 어부였고, 세리였고, 열심 당원이었습니다. ‘흙수저’가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겼습니다. 베드로는 3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의 표상이지만 그 길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다윗도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가 있으오리까?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사와 더더욱 주님을 따르라 하시나이다.”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 부족함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완벽함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완벽해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고, 여전히 나약함 때문에 좌절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나약함을 믿음으로 극복하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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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춘천교구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나약한 존재이기에 죄와 어둠을 완전히 피할 수 없습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다시 익숙한 죄의 자리로 돌아갈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요한 12,47)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서 헤매는 우리에게 ‘빛’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상처와 죄, 실패와 좌절 때문에 스스로 포기하고 싶어질 때조차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마지막 날에 그 말씀이 그들을 심판하게 되리라고도 전합니다. 끝까지 그분의 빛을 거부하고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선택할 때, 결국 우리 스스로 어둠을 선택하여 심판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물음은 이것입니다. 나는 오늘 ‘빛’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어둠’을 붙잡고 있습니까?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들은 말씀을 흘려보낸 채 익숙한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작은 선택 하나하나가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발걸음이 될 수도 있고, 어둠 속으로 더 깊이 숨어 버리는 발걸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두렵게 하시려고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빛을, 생명을, 구원을 선택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일시적 만족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참기쁨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을 때, 우리는 심판의 두려움에서 한 걸음 더 자유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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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44-50: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빛으로 오신 분으로 드러내신다. 또한, 당신을 믿는 것은 곧 아버지를 믿는 것이며, 당신의 말씀은 곧 아버지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선언하신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44절).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한 스승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행위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아들을 보는 이는 곧 아버지를 본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는 하느님의 모습이신 아들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Adversus Haereses IV,6,6) 아들은 아버지의 완전한 현현이시다. 아들을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46절). 성 치릴로는 이렇게 풀이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이를 비추는 빛이시다. 이 빛을 통해 무지는 사라지고 진리가 드러난다.”(In Ioannem Commentarius VIII,6) 빛이신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이는 결코 어둠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빛을 거부하는 이는 스스로 어둠 속을 택하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47절) 그러나 말씀을 거부하는 이는 그 말씀으로 심판받는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아들은 심판하러 오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이들은 스스로에 의해 심판받는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53,6) 즉,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려 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분이다. 심판은 우리가 스스로 빛을 거부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50절). 아버지의 명령은 단순한 율법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말씀이다. 곧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바로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의 명령이시다. 교리서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은 아버지의 계시이며, 그분의 전 생애는 아버지를 드러낸다.”(516항)라고 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따른다면 더 이상 어둠 속에 머물지 않고,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 말씀을 거부한다면, 빛을 등진 채 스스로 심판을 선택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세상에서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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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롯이 하나의 믿음 희망 사랑>
요한 12,44-50 (예수님의 말씀과 심판)
그때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오롯이 하나의 믿음 희망 사랑>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6-47)
믿음께서 믿으시다
믿으시니 믿음이시다
믿음이 믿다
믿으니 믿음이다
믿음께서 믿기만 하시다
믿기만 하시니 믿음이시다
믿음이 믿기만 하다
믿기만 하니 믿음이다
믿음께서 믿음을 믿으시듯
믿음이 믿음을 믿으니
오롯이 하나의 믿음이다
희망께서 희망하시다
희망하시니 희망이시다
희망이 희망하다
희망하니 희망이다
희망께서 희망하기만 하시다
희망하기만 하시니 희망이시다
희망이 희망하기만 하다
희망하기만 하니 희망이다
희망께서 희망을 희망하시듯
희망이 희망을 희망하니
오롯이 하나의 희망이다
사랑께서 사랑하시다
사랑하시니 사랑이시다
사랑이 사랑하다
사랑하니 사랑이다
사랑께서 사랑하기만 하시다
사랑하기만 하시니 사랑이시다
사랑이 사랑하기만 하다
사랑하기만 하니 사랑이다
사랑께서 사랑을 사랑하시듯
사랑이 사랑을 사랑하니
오롯이 하나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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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결정적으로 바라는 것은 구원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기에 구원의 도구로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빛 안에서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구원을 실현하러 오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언제나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 우리는 죄악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묶인 매듭을 풀어주신다. 고해성사가 심판이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나는 다시는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과거를 치유해 주신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일으켜 세워 준다. 그럼에도 그분을 무시하면 그분은 심판자가 되신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의 어둠, 무지의 어둠, 불신의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을 비추는 빛으로써 세상에 오셨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기에 심판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안 하고는 우리의 자유의사에 달려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마땅히 선택한 사람이 감당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심판을 벗어 날 길이 없다. 사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요한12,35). 그러므로 빛이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로 굳건해져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다. 아버지의 명령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다. 언제든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항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생명을 누리길 기도한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원치 않으시고 사랑을 원하셨다면 우리도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 한다. 세상이 어두워져도 어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만큼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우자!.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으로 힘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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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저는 정신력이 약해요. 계획대로 무엇을 해 본 적이 없어요. 늘 작심삼일로 끝나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비정상일까요? 비정상인 것 같으면서도 주변에 이런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뇌과학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합니다. 뇌와 마음은 원래가 변화를 싫어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순조롭게 해내는 경우가 특이하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 “괜찮아. 나는 약한 인간이야.”라고 위로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그냥 위로만 하면 어떻게 될까요? 스트레스가 줄어들 수는 있겠지만, 자기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정도는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해 볼까?”
이런 말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게 되고 변화의 시작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습관화의 원리는 ‘일단 움직여라.’라고 합니다. 몸이 먼저 행동하면 거기에 뇌가 열중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습관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 비율이 자그마치 45%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 묵상, 사랑의 실천 등도 일단 해 보는 것입니다. 안 된다고 하면 정말 안 됩니다. 뇌와 마음이 따라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당신 말씀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을 향한 간절한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완벽한 대리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보는 것은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이 비치면 어둠이 물러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죄와 절망의 어둠에 머무르지 않고 생명의 빛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뜻을 잘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세상의 뜻을 따르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커다란 외침은 우리를 향한 절절한 사랑의 초대입니다. 우리를 구속하는 규칙이 아니라, 우리를 어둠에서 건져내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동아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단 주님 뜻을 따르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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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의 선언>
요한복음을 '표징의 책'과 '영광의 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은 '표징의 책'이 끝나는 12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말씀해 온 것들을 요약하시면서, 간절함으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2,44) 그것은 네 번에 걸친 “나는 ~이다”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선언’으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로,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요한 12,46)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46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시작인 1장의 '로고스 찬가'에서, “모든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의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6)라는 말씀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주제인 ‘빛의 자녀 찾기’를 반영합니다.
두 번째로,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47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전체 복음서의 핵심을 보여주는 제3장의 말씀, 곧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는 말씀을 상기시켜줍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요한 3,18 참조)
세 번째로, “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요한 12,49)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49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7장의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라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네 번째로,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50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한다.”(요한 8,38)는 말씀과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8,55)는 말씀을 밝혀줍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선언에 앞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라고 밝히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가 ‘원천’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원천’임을 밝혀주십니다. 곧 당신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속하며, 아버지의 유일한 계시자로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보는 것은 당신을 보내신 분을 본 것이 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아버지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시는 ‘빛’으로 오셨고, 그 ‘빛’으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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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
주님!
당신께서는 말씀을 이루시되, 결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응답을 기다리며, 오히려 저에게 승복하십니다.
이 놀라운 겸손에 제가 부복하오니, 주님, 당신의 겸손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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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빛이 아닌 것을 빛이라고 착각하면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44-50)>
1)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여기서 ‘어둠’은 ‘죽음’을 뜻하고, ‘빛’은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신 분’이고, 우리에게 ‘빛’을(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신 분입니다.
2)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빛을 얻고, 빛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둠 속에서의 인생’과 ‘빛 안에서의 새 인생’을 잘 나타내는 좋은 예가 ‘바르티매오’와 ‘자캐오’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루카 18,35-38.40ㄴ-43ㄱ)
바르티매오가 눈이 먼 채로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어둠 속에 갇혀 있었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가 눈이 먼 것도, 그의 인생이 어둠이었다는 것도 ‘죄 때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요한 9,3) 그의 딱한 처지는,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빛’을 갈망했던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빛’을 청했습니다. 그가 청한 ‘빛’은 ‘새 인생’이었는데, 예수님 덕분에 ‘새 인생’을 살게 되자 그가 곧바로 한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 즉 ‘구원의 빛’을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는, 직업 때문에 ‘죄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빛’을 갈망했던 사람입니다.(루카 19,1-10) 그가 실제로 죄를 지었는지, 죄를 지었다면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는 알 수 없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자신의 인생이 어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에게서 빛을 찾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3) 바오로 사도가 박해자 시절에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한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사도 9,5-9)
예수님께서 ‘박해자 사울’을 직접 회개시키신 일은,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예수님께는, ‘박해자 사울’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구원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박해자 사울’을 회개시켜서 ‘사도 바오로’로 변화시키신 일은, 일차적으로는 바오로 사도를 구원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한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일입니다. 그 일은, 빛이 아닌데도 빛인 줄 알고 살았던 그의 ‘과거의 삶’을 상징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가 그동안 빛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빛이 아니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4) ‘박해자 사울’처럼 ‘빛이 아닌데도 빛인 줄 알고’ 헛된 것들을 찾아다니고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간 세상의 온갖 이론들과 사상들에 빠져 있는 사람들,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 세속의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를 ‘빛’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태 6,23) <어쩌면 지옥으로 들어가면서도 자기가 들어가는 곳이 ‘하느님 나라’인 줄로만 알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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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성호 요한보스코 신부님]
<우리들의 변호사>
“신부님, 참으로 죄 많은 사람입니다. 모두 다 신부님께서 헤아려 주시고 제발 용서해 주세요.” 고해소 안에 있으면 늘 듣게 되는 하소연입니다. 저는 단지 평범한 신부이고 싶은데, 교우들은 저를 참으로 비범한 심판관으로 생각하고 계시나 봅니다.
저는 다만 하느님의 도구일 뿐 그 어떤 능력의 소유자도, 현명한 심판관도, 그들의 죄를 가지고 이리저리 따지는 검사도 아닌데 말입니다. 판사와 검사, 변호사 중에서 굳이 저에게 합당한 것을 하나 고르라면 아마 변호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든지 고해소를 찾아오신 분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고 그분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하느님께 대신 말씀 드려서 그들의 죄를 없애 달라고 청해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교우들은 고해소 안에서 저를 믿고 모든 것을 털어놓으시나 봅니다.
변호사에 대한 믿음, 즉 그가 나의 처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 것이며 보다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들의 처지를 하느님께 대변해 주는 변호사와 같은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보다 나은 판결을 받고 그분 품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이 세상의 구원과 우리 각자의 성화(聖化)를 위해서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과 함께 찬란한 빛의 광채가 있는 곳에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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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하러 이 세상에 왔는가? 내가 원해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왜 왔는지 그 목적을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런 것들은 나의 힘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자기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그리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분명히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에 깊이 감사드린다. 만일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단죄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면 나 자신부터 살아 남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오늘까지 많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은 단죄가 아니라 구원의 은총이 나를 살리시기 때문이다.
그럼 단죄는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인가? 단죄는 심판하는 것이다. 즉 처형하는 것이다.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내리는 것이다. 심판을 받으면 더 이상 다른 방도가 없다. 단죄 받은 대로 처벌받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단죄는 더 이상 어떤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벌을 받을 뿐이다. 단죄는 당신은 죄인이다 라고 공포하는 것이다. 일단 죄인이라고 공표되면 다른 방도가 없다. 즉 단죄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요, 절망에 빠지게 하는 일이요, 마침내 죽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구원은 살리는 일이다. 아무리 죄인이라 하더라도 죽을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내가 희생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요, 필요하다면 자기 목숨까지 내놓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셨다.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도 예수님처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일을 하는가? 단죄인가 구원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보다는 단죄하는 일을 행하는가?
정치하는 사람들도 나라를 구원하겠다는 말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비방 폭로 등 단죄하는 말들만 한다. 이 세상에는 온통 단죄하는 일들로 가득차 있다. 아주 오랜 일들까지 들추어 내면서 단죄하는 일에 익숙해져있고 그런 것이 잘하는 것 인양 되어버렸다.
성직자 수도자의 입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말보다는 단죄하는 말이 더 쉽게 나온다. 하지 마라. 그것은 안돼. 저 사람은 안돼.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저 사람은 가능성이 없어. 너는 성격이 나뻐, 네가 하는 일은 늘 그래,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나 등 구원의 말보다는 단죄의 말들이 너무나 성행하고 있다.
단죄하는 언어란 사람에게 절망감을 주는 말이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다. 사람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하는 말이다.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말이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구원의 일을 해야할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의 입에서조차 너무 쉽게 나오는 단죄하는 식의 말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말로 바뀌어져야 한다.
구원의 언어란 사람을 용서하는 말이다.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말이다.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말이다.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말이다.
응 그래 그럴 수도 있어 괜찮아, 내가 했으면 더 못 할 뻔 했는데 이 정도면 너 참 잘 했다. 야 그것 참 예쁜데, 아이구 참 멋있어요, 다시 해봐 너는 잘할 수 있을 꺼야 등 상대방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들이 구원하는 일이요, 언어들이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단죄의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살리는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 단죄하는 행위를 할 것인가? 구원하는 행위를 할 것인가? 단죄가 성행하고 있는 사회에서 구원의 언어를 구사할 때 구원의 행위를 행할 때 바로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라는 오늘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단죄하던 사람이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될 때 비로서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죄하는 사람에게서 구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단죄하는 인생에서 구원하는 멋진 인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남에게 상처 주고 못된 일만 하던 삶에서 좀 더 보람있고 가치있고 남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세상 끝 날에 그를 단죄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은 왜 저런 나쁜 사람을 그냥 놔두시는가? 그리고 왜 저렇게 착한 사람이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는가? 라고 질문하고 하느님을 원망할 때가 있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느님은 단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늘 사람을 살리려고 하신다. 사람을 살리려고 하시는 분 그분이 곧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악인을 단죄하지 않으시는 것은 끝까지 악인이라도 살리시고자 하시는 것이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단죄가 아니라 살리기 위한 말씀이다. 그러나 악인이 단죄받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를 살리기 위해 하신 그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단죄받는 것이다.
담배를 피우지 마라. 담배는 암의 원인이다. 라고 사람을 암의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아무리 경고의 말을 하고 금연 운동을 해도 애연가들은 담배를 끊지 못하고 담배를 피운다. 그 결과 나중에 암의 진단을 받고 죽는다.
고 이주일씨가 담배는 독입니다 라고 금연 광고에 나와서 아무리 이야기 했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담배를 끊지 못한다. 담배를 피우지 마라 마라 고 한 그 말을 듣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암에 걸려 죽는 것이다. 결국은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했던 그 말이 그 사람을 단죄한 것이다.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말을 듣고 담배를 피우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은 암이라는 병으로 단죄 받지 않았을 터인데 결국 듣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단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구원에 관한 말씀만 하시지 단죄하는 말씀은 하지 않으신다.
그렇지만 아무리 사람을 살리는 말씀을 하셨어도 사람들이 그 말을 듣지 않는다면 결국 그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단죄한 말씀이 될 것이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단죄가 아니라 구원의 말씀이 되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예수님 마음대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어떻게 말하라고 친히 명령하신 대로 말씀하셨듯이 우리도 우리 말대로 하지 말고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말씀하신 대로만 말하고 행동한다면 결국 우리는 단죄 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끝 날에 단죄 받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살리기 위해 말씀해주신 대로 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은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언제까지나 우리의 인격을 존중해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말씀하신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내가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나를 단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내가 묵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말씀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은 나의 탓이다.
내가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나를 단죄하시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지 않은 내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즉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판단하는 것이지 예수님이 나를 단죄하신 것이 아니다. 오늘도 내가 단죄하는 말을 하고 단죄하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예수님은 나를 단죄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나를 살리시기 위해 인내하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신다.
다만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단죄하는 말을 하고, 단죄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나 스스로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나 스스로 단죄 받게 될 것이다.
하루 이틀 사이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단죄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이 결국 나를 어둠 속으로 몰아갈 것이며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즉 예수님이 구원하기 위해 하신 그 말씀이 나를 단죄하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단죄할 수도 있을 것이고 구원하는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나는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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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동원 베드로 신부님]
별안간 전기가 나가면서 세상이 어둠 속에 잠겨버렸습니다. 평소 손전등이 어디에 있는지를 기억해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찾아 한줄기 빛에 의지하여 다른 것들을 찾아 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한줄기 빛이 이렇게 소중한 줄은 세상이 어둠에 묻힌 뒤에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시련과 모욕과 불안과 고독과 실망과 좌절은 어둠 속을 더듬는 것같이 힘겹게 하고 두려움에 휩싸이게 합니다. 누구나 항상 밝은 빛을 원하겠지만 우리의 마음과 이 세상에는 어둠 또한 깔려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가 한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어둠을 탓하기보다는 한줄기 빛을 밝히는 것이 낫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죽음 앞에서 극단적인 공포와 혼란과 불안과 시련을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버지의 영광을 빛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는 행동이었습니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 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요한 12,27-28ㄱ).
예수께서는 인생이 결정적인 실패로 끝나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이 곧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는 때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죽음과 같은 어둠 속에서 구원의 빛을 주셨습니다. 가장 고통스럽고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 영원한 사랑의 빛을 밝혀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세상의 아무리 짙은 어둠이라도 모두 변화될 것이라는 믿음의 빛이 되셨습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믿음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실망의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 구원의 빛을 보게 합니다. 내 마음의 어둠이 깊을수록 주님의 말씀에서 빛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둠이 짙을수록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 한줄기 구원의 빛을 밝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예수께서 내 삶의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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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요한 12,47)
우리는 자주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주류와 비주류 등을 끊임없이 가르고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자신이나 공동체가 수용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경험합니다.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주님을 갈망할수록 역설적으로 우리는 더 큰 어두움을 경험합니다. 선을 원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악을 저지릅니다. 선과 악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온전하게 주님 안에 쉬기까지 우리는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늘 불안합니다.
우리가 완전함(perfectness)을 추구하면 불완전함을 거부하게 되지만, 온전함(wholeness)을 향하여 갈때 우리는 빛으로 어두움을, 선으로 악을 심판하는 것을 멈추고, 오직 모두를 받아들이는 구원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주님을 통한 구원은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역설의 현실을 모두 품어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칼 융은 ‘완전한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온전한 개인이나 공동체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주류 비주류를 분리하지 않고 통합을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그 통합은 역설적인 상황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모두를 함께 품기를 열망합니다.
그것은 빛이 되어 오신 주님께서는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선과 선의 그림자인 악이 공존하는 한 개인과 공동체가 자신의 한계를 서로에게 투사하지 않고 창조적인 통합을 이룰 때, 우리는 본질적인 불안에서 나오는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한 고통을 겪으며 수용하고 창조적 통합을 이루는 것은 파스카의 신비를 살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여정이요 갈망입니다.
이웃에 대한 어떠한 판단도 멈추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받아들일 때, 우리는 주님 구원의 신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김종오신부, M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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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5)
<하느님의 완전한 자기 계시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12,44-50)의 제목은 '예수님의 말씀과 심판'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12,44-4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완전한 자기 계시'이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육화와 삶과 죽음과 부활'로 하느님을 우리에게 완전하게 드러내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14,9ㄷ)
그런데 이것이 '율법 파괴죄'와 함께 예수님을 십자나무에 매달아 돌아가시게 한 '신성모독죄'라는 죄명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완전하게 주어졌고, 그 완전한 사랑의 표지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 완전한 사랑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성체성사)'입니다.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전례헌장 10항)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면서 '전례 중에 전례인 미사'에 자주 참석합니다. 그리고 은혜(구원)를 받고, 그 힘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표지인 그리스도의 수난 사랑에 완전히 하나가 되어, 이 사랑의 힘으로 동정을 간직한 채 세상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교회에 봉사하신 분입니다.
"... (그러니) 저희도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여, 세상에 드러난 그분의 영광을 보고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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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 12,46)
가타리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내면이었습니다.
내면 없는 개혁은
오래 가지 못하고
실천 없는 내면은
현실을 바꾸지 못합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하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며
자신의 존재 전체를
내어맡겼습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그 어둠을 없애려
애쓰기보다는
빛을 더 깊이 받아들이는
사랑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느님의 빛은
세상을 판단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 안으로
초대하여 존재를 새롭게
하는 은총입니다.
그녀에게 진리는
옳은 생각이 아니라
살아내야 할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 하지만
그 고통 안에서
더 깊어지기도 합니다.
자신을 과장하거나
숨기지 않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단순함에 있습니다.
자기 인식과
하느님 인식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사랑은
결국 세상을 향한
담대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빛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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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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