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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병정신선양회,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범털과개털(미산고택,저상일월)
의성 수정사로 들어가는 계곡 입구이다.
김하락 의병장과 같이 활동했던 조성학 의병장의 외증손자와 함께 왔다.
예천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논의하기를 수정사까지 답사를 해보자고 했다.
의성 수정사 범종각
조성학 의병장의 외증손자인 박창락 사장님이 수정사 대웅전 앞에 섰다.
아마도 감회가 남다를 것이고...깊이 허리숙여 배(拜)를 하신다. ..여기가 바로 외증조부인 조성학趙性學 장군이 김하락 장군과 함께 전투를 준비하고...국권회복을 위해 충忠과 의義를 불태우던 바로 그 전적지인 것이다.
외증조부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곳에 ...120년만에 후손이 섰으니 ...감회가 어떠하실까~!!
다음에 오실 때는 어머님을 모시고 오시겠다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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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락 진중일기는 1년전쯤 읽었다..
그리고...몇달전 ...수정사에 전화를 했다...주지스님좀 바꾸어 달라고 했고....."예천 사는 사람이며 의병전쟁을 연구하는 사람인데요...120년전에 의병투쟁기에 수정사가 의병들을 도와준 자료가 있는데요...보여드리겠습니다."하니..."아저씨 우리 그런 것 필요없어요~!"...후~
구한말 국권회복기 의병투쟁지역에서 한반도의 가람들은 나름대로 많은 역할을 햇다.의승장의 직첩을 받은 곳도 있다.문경 대승사,예천 명봉사,청송 대전사,울진 불영사,횡성 봉복사,인제 백담사,영월 보덕사,구례의 연곡사(고광순 의병장),의성의 고운사와 수정사...그러나 자료를 읽어보고 좋은 내용을 알려줄려고 해도 전화도 안받는 무례한 절도 있다.영월군에 문화원,군청,향토사학자,후손들에게까지 6군데를 메일로 자료를 줬는데...몇달이 지나도...고맙다는 전화 한통 없다.돈한푼 안받고 자료를 줄려고 해도 싫다고 하니...
의성 고운사와 수정사는 의병투쟁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야한다.예천 사람인 내가 할 것이 아니라.. 의성분들이 해야 한다.
그리고...김하락 장군과 조성학장군의 집터가 있던 청로리에 기념비와 표석이라도 세워야한다.청로리에 기념비를 세워놓으면 성남,하남,광주,이천 ,용인의 중고등학생들이 경주에 수학여행 다녀오다가 의성 청로리의 기념비를 들러서 묵념하고 가야할 곳이다.이천수창의소와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을 조성학과 김하락장군이 만든 때문이다.대한민국의 독립투쟁의 시발점과 뿌리가 ' 의성 청로리'가 되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안하면 군청이 하면 되고,군청이 못하면 면장이 하면 되고,면장이 못하면 이장과 주민이 하면 된다...주민이나 이장이 관심이 없으면 ....그 때는 ..일본군이나 러시아군에게 맡기면 된다..
사명영당이다.사명당이 임진왜란때 고운사와 이곳 수정사에서 승군을 조련시키고 전투준비를 하던 곳이다.
수정사에서 김하락,조성학 의병장은 도움도 받았고....대단한 전투를 벌였다.
김하락 진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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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단양(丹陽)에서 유숙하였다.2일. 풍기(豊基)에서 유숙하였다.3일. 행군하여 동면(東面) 산법동(山法洞) 차계남(車啓南)의 집에 당도하여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순흥부(順興府)에 들려 머물렀다. 조성학의 집이 동군 백운동(白雲洞)에 있으므로 나는 가서 이모(姨母)님을 뵙고 나서 성학을 불러 다시 일어날 것을 권유하니, 성학은 말하기를“군사가 백명도 못 되는데 어떻게 적을 없앨 수 있는가. 발동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므로, 나는 말하기를“옛날에 단지 주먹 하나로 적에게 덤벼든 자도 있으니, 남의 신하로서 이러한 어지러운 시기를 당하여, 오직 군사가 미약하고 형세가 궁하다 해서 소매 속에 손을 넣고 방관만 하면 되겠는가.”하였고, 이모님도 성학을 불러 부탁하되“의로써 국가에 보답하면 죽어도 무슨 한이 있으랴. 너는 나를 위해 염려말고 네 이종형의 말을 듣도록 하라.”하였다.그래서 성학은 마침내 명령을 받고 빠져 나와 진중에서 이틀을 머물렀다.7일. 길을 떠나 영천(榮川) 창보역(昌保驛)에서 유숙하였다.8일. 안동(安東) 유동역(楡洞驛)에서 유숙하고, 이튿날 본동(本洞) 김(金)·전(全) 두 민가의 곡식 30석을 빌어서,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백성 30여호를 뽑아 구호미로 주었다.호서(湖西) 의진(義陣)의 소토장(召討將) 서상렬(徐相烈)이 전군(前軍) 김한성(金漢星)을 보내어 함께 합세하기를 청하자, 조성학이 말하기를“이 군사로 하여금 영천·안동·청송(靑松)·경주(慶州)를 순회하여, 일변으로는 의병을 모집하고, 수 개 연대의 군사를 보내어 경주에 들어가 부윤(府尹)에 나서 줄 것을 청하여 직접 모집하게 하면, 열흘이 지나지 않아서 군의 기세가 크게 떨칠 것이니, 이것이 상계요, 소토장과 더불어 합세하고 이어 영남 각읍의 진을 불러 일제히 힘을 다하여 곧장 대구영(大邱營)으로- 596 -향하면 영남 일대가 크게 의병을 일으킬 것이니, 이것이 중계요, 단독으로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임의로 행군하면 좌우의 보익이 없을 것이매, 이것은 하계이니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을 택하렵니까.”하므로 나는 말하기를“그대의 소견 매우 이치에 합당하다. 그러나 오늘의 급무는 오직 단결에 있는데 호진(湖陣)에서 이미 합세하기를 청하였으니 중계를 취택하는 것이 옳다.”하고, 김한성과 더불어 함께 행군하여 감천(甘泉) 창리(倉里)에서 점심을 먹고, 곧장 예천(醴泉)에 당도하니, 소토장 서상렬이 또 좌익장을 보내어 두어 연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마중나왔다. 그래서 호진(湖陣)에 들어가 반갑게 서로 인사하고, 예천 본진의 의병대장 박주상(朴周庠)을 만나 보았다. 그리고 근처 약방(藥房)에다 숙소를 정하고 이틀을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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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조성학은 자기 스승을 방문하기 위하여 대구 팔공산(八公山)을 향해 떠나 갔다. 수일 동안 진을 머물고 있었다. 나는 달성(達城)으로 가서 적을 토벌하였는데, 서장군의 병력이 부족하다 하여 중지시켰다. 나는 마침내 진을 갈라섰다. 군관 고기준(高箕俊)이 민가의 여자를 간음하고 재물을 강탈하였기로 군문(軍門)을 마련하여 총살하고 군중에 영을 내리되“만약 추호라도 백성에게 범하는 자가 있으면 이 법률에 의하여 처단한다.”- 598 -하였다. 그리고 김태원을 시켜 후히 장사 지내주게 하였다. 행군하여 의성(義城) 금성산(金城山)의 수정사(水淨寺)에 진지를 정하였다.27일. 수정사를 떠나서 청로점(靑路店)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때 경병(京兵) 3백 명이 군위(軍威)에 진을 치고 있다 하므로, 나는 밤을 틈타서 그 진지를 덥치려 하는데, 조성학이 이 무렵 진중으로 돌아와 굳이“안 된다.”하고 말리는 것이었다. 나는 묻기를“그대의 계책은 어디에 있는가.”하니, 조장군은 말하기를“여기서 의흥(義興)읍까지는 20리 밖에 되지 않고, 군중에는 탄약이 전혀 없으니, 만약 뜻하지 않은 변이 있다면 반드시 패하고 말 것인즉, 지금 의흥으로 가서 탄약을 가지고 경주부 기계(杞溪)·죽장(竹長) 양 면으로 향하면, 열흘 이내에 3백 명 군사는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하므로, 나는 즉시 응락하고, 저녁밥을 재촉하여 군사를 먹인 후, 의흥으로 향하면서 군중에 영을 내려“절대 떠들지 말라.”하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빨리 달려 의흥읍 관저로 들어가니, 읍내 사람이 전혀 몰랐다. 그래서 곧장 동헌(東軒)으로 들어가니 본군 군수는 도망해 달아나므로, 조성학으로 하여금 원풍루(願豊樓)에 올라, 군중에게“놀라지 말고 안심하라.”는 뜻으로 타이르게 하고, 곧 무기와 화약을 대여섯 짐 가량 가지고 인리청(人吏廳)으로 진을 돌리는데, 배후에서 갑자기 포 소리가 나므로, 군중으로 하여금 호응케 하였으나 조금 뒤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본읍 이속(吏屬)들이 민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엄습해 오려 하다가 중지하고 모두 흩어졌던 것이었다.28일. 행군하여 고리곡(古里谷)에 당도하여 아침 식사를 하고 나니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비를 무릅쓰고 행군하여 용애(龍崖)에 당도하니, 비가 비로소 갰다. 압곡사(鴨谷寺)에 들어가 진지를 마련하고 하루를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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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이른 아침에 군사를 점고해 본즉, 의성군은 이미 도망가고 다만 16명이 남았으며, 본진의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한 자가 없었다. 의성대장은 나에게“의성으로 회군하여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합세해서 일을 해 나가자.”하므로, 나는 응락하고 행군하여 화목점에 이르러 점심을 먹는데, 동리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어제 저 북녘에 병정 백여 명이 3, 4명씩 대오를 지어, 혹은 신음하고 혹은 다리를 절으며 의성 등지로 도망가고 혹은 신령(新寧) 등지로 도만가면서 모두 하는 말이, 이천 의병은 참으로 강병이니 절대로 우리들이 여기를 지나갔다는- 602 -말을 하지 말라 부탁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오후에 행군하여 의성 오동촌(梧桐村)에서 유숙하였다.4일. 토현(土峴)에 유숙하였다.5일. 운곡(雲谷)에서 유숙하는데 의성대장이 소 2마리를 잡아 군사를 먹이고, 일변으로 영을 내려 의병을 모집하게 하였다.6일. 수정사에 들어가 진지를 정하고 각 면에 영을 내려 군수 물자와 군사들이 입을 군복을 독촉해 받았다.7일. 각 면의 초군이 일제히 모여 수효가 백여 명에 달하므로, 우리 군사와 섞어서 부대를 편성하여, 1기 3대(一騎三隊)의 법으로 부서를 짜 놓으니 군의 기세가 차차 떨치기 시작하였다.8일. 산 아래 각 동리에 영을 전달하여 산 마루 사방에 군막을 마련하게 하고, 여러 장수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파수를 하게 하여, 좌익장 신용희는 운곡의 요긴한 길목을 지키고, 우익장 김경성은 천마봉(天馬峰)을 지키고, 의성대장의 영으로 김두병(金斗柄)은 남현(藍峴)을 지키고, 조성학은 금성(金城) 좁은 목을 지키게 되었다.척후병이 와서 보고하기를“병정 백여 명이 방금 산운리(山雲里)로 들어오고 있다.”하므로, 높은 데 올라 바라보니 과연 그러했다. 그래서 다시 여러 장수로 하여금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맞아 싸우게 하여, 좌·우익장은 군사 3개 부대를 거느리고 비봉산(飛鳳山)에 잠복하고, 김두병은 군사 2개 부대를 거느리고 비봉산 아래 주둔하고, 중군 및 김순삼은 천마봉에 잠복하고, 조성학은 군사 3개 부대를 거느리고 수정사 동구에 잠복하고, 나는 유격병 한 부대를 거느리고 이곳저곳을 지휘하고, 의성대장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남현(藍峴)을 지키기로 하였다.오정에 적병이 곧장 수정동을 충돌하여 들어오므로, 조성학은 보리밭 속으로 기어가서 곧장 적진 앞에 이르러, 고개를 들고 깃발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한 번 호통을 치자, 뒤를 따른 3개 대의 군사가 일제히 포를 터뜨리니, 적은 뜻밖의 일이라 놀라서 다 흩어져 가서 마침내 청로역(靑路驛) 안산으로- 603 -올라갔다. 우리 군사들은 뒤를 쫓아 엄습해, 적을 몇 명을 죽이고 쇠북을 울려 군사를 거두었다.점심 식사 후에 영을 내려, 중군으로 하여금 5개 부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즉시 순호(蓴湖) 안산을 점령하여 적의 두부(頭部)를 치게 하고, 조성학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의 꼬리를 치게 하고, 나는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들락날락하며 의병(疑兵)이 되어 그 중앙을 대적하니 마침내 쏜살같이 나왔다. 미처 서로 어울리기 전에 1초장(哨長) 이준성(李俊性)이 포 한 발로써 적 1명을 쏘아 죽이고, 김인식이 포 한 발로 적 2명을 명중시켜 너머뜨리니, 적이 놀라서 흩어지므로 뒤를 쫓아 엄습해 무찔러 겨우 4명을 명중시키자, 해가 이미 저물었다. 또 회군하려 하자, 이 적이 다시 뒤를 따라 쫓아오므로, 미리 잠복해 있던 포군 두 사람이 제방의 양쪽에서 나타나 한꺼번에 발포하니 적은 복병이 있는가 의심되어 급히 쫓아오지 못하므로, 군사를 철회하여 본진으로 돌아왔다. 뒤에서 다시 빨리 쫓아오므로 나는 친히 천보총을 들고 쏘아 두명을 죽이니, 여러 장수가 힘을 다해 협격하여 네 명을 죽이고 돌아와 함께 수정사에 모여 일군에게 큰 상을 주었다. 그리고 명령을 내려 전과 같이 파수하게 하였다.밤 8시 경에 적병의 대장(隊長)이 수 초(數哨)의 군대를 거느리고 엄습할 꾀를 내어 파수하는 곳으로 들어왔다가, 복병에게 패하여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사13일. 아침 식사 후에 적병이 4개 대로 나누어 와서 호위하므로, 우리 군도 역시 나가 양진(兩陣)이 대치하여 총탄이 비오듯 하며, 오전 8시 경부터 오후 4시 경에 이르도록 승부가 나지 아니하였다. 적은 산길이 험악함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달아나는데, 지나가는 각 마을에서 의복과 소(牛)·말(馬)을 수도 없이 약탈하면서, 의병의 물건이라 칭탁하였으니, 원통하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적병이다.14일. 아침에 조성학이 점괘 하나를 뽑아 보고 즉시 깃발을 거두며“퇴군하자.”하고 크게 외쳤다. 그는 이어- 604 -“적이 왕기를 타고 왔으니, 먼저 이동하는 것이 상책이다.”하므로 나는 꾸짖어 말하기를“무릇 진을 이동하는 사이에 잘못하면 난군을 만들게 된다. 그러므로 예전 명장들이 항상 경계하였거늘, 지금 적이 오지도 않았는데, 먼저 스스로 군의 마음을 동요되게 하느냐.”하였다. 때마침 회오리바람이 크게 불어, 모래가 날리고 돌이 굴러가는 정도인지라, 미처 화승(火繩)을 걸지 못하는데 총귀의 탄약이 먼저 날아가는 터라, 군졸들은 다만 빈총만 등에 메고 서로 돌아보며 벌벌 떨었다.이때에 경기도에서 따라온 포군 두 사람이 방금 병들어 누워 몸을 운동하지 못하므로, 차마 버리고 떠날 수 없어 여러 장수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비봉산을 넘게 하고, 나는 친히 그 두 사람을 부축하여 바위 틈을 찾아 눕히고서 마른 섭으로 가려 두었다. 그리고 나는 비봉산을 오르니, 적이 과연 크게 산채(山寨)로 몰아들어 포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게 하였다. 군사를 거느리고 지동점(地洞店)에 이르러 유숙하였다.15일. 군인 2명을 수정사에 보내어 병든 포군 2명을 등에 업고 오게 하였다. 이 날에 구연영은 적의 기세가 매우 성함을 두려워하여 비밀히 군중에 설유하기를“대장은 본시 영남 사람이라, 친척과 친구가 이 지방에 많이 살고 있으니, 설혹 뜻밖의 변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보호하는 자가 많으려니와 우리들은 천리의 고독이니 누가 즐겨 돌보아 주겠는가. 미리 먼저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 드디어 그 부하 30여 명을 거느리고 몰래 경기도로 향해 떠났다.“아! 슬프다. 약간 의기가 있다는 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죽음에 당하여 변하지 않는 자가 몇 사람이 있겠는가. 이것은 내가 부하를 잘못 어거한 탓도 있겠다. 그러나 역시 국운의 소치다.”탄식하며 오래도록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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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사와 김상종,김하락,조성학,청송의진 자료는 요기참고(김하락 진중일기 http://cafe.daum.net/gaetuel/U2zd/23
의성 수정사는 옛날에 대댄한 곳이었다....목재를 보면...아주 특이한 가람이다.위 구조물도 아주 특이한 형태이다.
1차로 저녁을 먹고...
김홍배소장님과 김정중 사무국장님이 안내하여 2차를 갓다...조기 옆에 원조 식당이 문을 닫아서 우리집식당에 와서 먹었는데.....맛있었다....
하여간 사무국장님은 사진을 잘 못찍는다....사진학교를 보내야 할까보다...
첫댓글 풍기 감천 예천 의성... 이동경로가 보입니다.
예 ...경유지가 전부 전적지가 되는 것이죠....
의성 수정사는 그 가치를 모르고....의성사람들도...가르쳐 줘도 관심없고...
그런데...친일파를 왜 욕합니까?세월호가 100척이 자빠지면 어떻고요...
공무원이 도둑질 하면 어떤가요....
저도 공무원 할때 도둑질좀 할 걸 잘못했습니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