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52> 윤씨·파평윤씨 벼슬 이름에서 유래한 토착 성씨… 파평 윤씨가 80% 차지 세계일보 -입력 2013-07-08 22:08:59, 수정 2013-07-08 22:08:59
한자로 다스릴윤(尹)을 쓰는 윤씨의 유래는 벼슬 이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추론하고 있다. 그것은 윤(尹)이라는 글자가 깍지낄 차(叉)와 삐침(사물)을 결합시킨 글자로 곧 ‘사물을 손아귀에 쥔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스릴윤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윤(尹)은 벼슬의 이름에서 유래한 성씨로 보인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종종 벼슬 이름에 윤(尹)이라는 글자가 붙었다.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윤씨 성의 유래는 조금씩 다르다. 가장 먼저 윤씨 성으로 보이는 이는 칠원윤씨의 시조로 태종무열왕의 태자태사(太子太師)였던 윤시영(尹始榮)이다. 그 외에도 ‘삼국사기’에는 윤빈이라는 사람이 있고, ‘삼국유사’에는 윤경(尹卿)이라는 이름도 나오지만, 후백제의 무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윤단·윤봉·윤전(尹全) 등의 이름이 보인다. 그런 것을 보면, 윤씨는 조씨같이 중국 쪽에서 건너온 성씨라기보다는 통일신라 이후 생성된 토착 성씨로 판단된다.
‘조선씨족통보’ 등의 문헌에 따르면 윤씨의 본관은 149본이나 되는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현재는 파평(坡平) 해평(海平) 남원(南原) 칠원(漆原) 무송(茂松) 함안(咸安) 해남(海南) 해주(海州) 예천(醴泉) 야성(野城) 기계(杞溪) 양주(楊州) 현풍(玄風) 죽산(竹山) 고창(高敞) 평산(平山) 영천(永川) 여주(驪州) 신녕(新寧) 덕산(德山) 등 20여본이 있다.
하지만 해평·해남·무송·칠원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들도 모두 파평윤씨에서 분적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이들 가운데 남원윤씨·함안윤씨·야성윤씨·신녕윤씨 등이 파평윤씨와 합보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윤씨의 80%는 파평윤씨이거나 파평윤씨에서 분적된 가계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파평윤씨 외에는 칠원윤씨·해남윤씨·해평윤씨 등이 있다.
조선시대 윤씨는 민씨·조씨와 함께 왕비를 많이 낸 가문(모두 6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세조의 왕비로는 정희왕후(파평윤씨 윤번의 딸)가 있으며, 성종에게는 두 명의 왕비가 윤씨이기도 했다. 그중 하나는 윤호의 딸인 정현왕후(파평윤씨)가 있고, 연산군의 어머니였던 폐비 윤씨(함안윤씨 윤기견의 딸)도 있다. 그리고 중종의 왕비였던 장경왕후와 문정왕후도 모두 파평윤씨였다. 해평윤씨에서는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가 있다.
전체적으로 윤씨는 조선시대 592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다. 그중 상신 18명, 문형(文衡, 大提學) 6명, 왕비(폐비 1명 포함) 6명, 부마 7명, 봉군 7명을 배출하였다. 윤씨의 대표적 인물로는 윤관·윤증(尹拯)·윤봉길(이상 파평윤씨), 윤두서·윤선도(해남윤씨), 윤치호·윤보선(해평윤씨) 등이 있다.
현재 인구는 29만4708가구에 모두 94만8600명(2000년 국세조사)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김·이·박·최·정·강·조씨 다음으로 많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 전체 인구 구성비로 보면 약 2.1%가 되는 셈이다.
◆파평윤씨(坡平尹氏)는
파평윤씨의 본관인 파평(坡平)은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파평면이다. 파주는 본래 고구려 장수왕 때 파주사현이었는데, 조선 태조 때 서원군과 파평현을 병합하여 원평군이라 하였다. 1461년 파주목으로 승격(昇格)하였고, 1895년 군이 되었다.
파평윤씨의 시조는 윤신달(尹莘達)이다. 그는 고려 태조(왕건)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올랐다. ‘조선씨족통보’와 ‘용연보감’ 등의 문헌에 따르면, 윤신달은 파주 파평산 기슭에 있는 용연지라는 연못 가운데에 있던 옥함(玉函) 속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날 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과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을 윤(尹)으로 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벽상삼한익찬이등 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의 관작을 받아 후손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파평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윤신달의 5세손에는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윤관(尹瓘)이 있다. 그는 고려 선종 때 합문지후와 좌사낭중을 지내고, 여진정벌에 원수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 함주와 영주 등 9지구에 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벼슬이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에 이르렀고, 7형제를 낳아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그래서 파평윤씨에서는 윤관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이렇게 윤신달과 윤관을 거치며 명문가의 반열에 올라선 파평윤씨 가문에서는 ‘잉어’를 먹지 않는 전통을 갖고 있다. 그것은 시조인 윤신달이 연못의 옥함에서 나왔을 때 81개의 비늘이 나 있었다는 것과 윤관이 적에게 쫓길 때 잉어의 도움으로 탈출했다는 전설 때문이다. 그래서 파평윤씨에서는 자신들이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파주(坡州)라는 명칭도 파평윤씨 가문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세조는 계유정난 이후 점차 시국이 안정됨에 따라, 정변 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세조비 파평윤씨(정희왕후)의 고향을 파평윤씨의 파(坡)자와 고을 주(州)자를 따서 파주(坡州)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할머니(태종비, 여흥민씨)의 고향인 여흥(驪興)을 여주(驪州)로 개칭하였다.
윤관의 7형제 아들은 다시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로 분파되었다. 현재 파평윤씨의 분파로는 함안파(咸安派) 남원파(南原派) 덕산군파(德山君派) 문정공파(文定公派) 신녕공파(新寧公派) 대언공파(代言公派) 봉록군파(奉祿君派) 판서공파(判書公派) 야성파(野城派) 전의공파(典儀公派) 소정공파(昭靖公派) 원평군파(原平君派) 소도공파(昭度公派) 판도공파(版圖公派) 소부공파(小府公派) 태위공파(太尉公派)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서 판도공파(版圖公派)와 소정공파(昭靖公派)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이 두 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조선조에서 파평윤씨는 모두 1424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그중 문과가 340명, 무과 86명, 사마시 934명, 역과 41명, 의과 11명, 음양과 2명, 율과 10명 등이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모두 22만1477가구 총 71만39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파평윤씨의 연혁과 인물
파평윤씨는 조선시대 들어와 가문이 크게 번성하면서 명문세도가의 반열에 올랐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6명(함안윤씨였던 폐비윤씨도 합본했기 때문에 파평윤씨로 보아야 할 것이다)의 왕후를 배출했으며, 수많은 과거급제자와 고관대작들이 나왔다. 그중 중종 대에서는 파평윤씨에서 두 명의 왕비(장경왕후와 문정왕후)가 나와 한 가문에서 대윤과 소윤으로 갈려 싸우는 비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판도공파의 파조는 윤승례(尹承禮)인데, 그는 시조 윤신달의 13세손으로 윤척(尹陟)의 아들이다. 그는 공민왕 때 요승인 신돈(辛旽)의 살해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유배되었다가, 신돈이 주살된 후 풀려나 응양군 상호군(鷹楊軍 上護軍)이 되어 왜국의 침입을 막아냈다. 창왕 때는 권근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명나라의 명에 의해 공양왕을 즉위케 하고 판도판서를 역임했지만, 공양왕이 폐위되자 은거하였다.
윤승례의 아들이 세조의 장인인 윤번이고, 윤번의 딸이 정희왕후(세조 비)이다. 판도판서공파는 윤승례의 아들 대에서 제학공파(提學公派) 부윤공파(府尹公派) 정정공파(貞靖公派)로 갈라진다. 그중 정정공파에서 두 명의 왕비가 나와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싸움이 빚어졌다.
윤승례의 아들 윤번은 세조의 장인이고, 윤번의 맏아들인 윤사분(尹士昐)은 우의정, 둘째인 윤사윤(尹士? )은 예조판서, 셋째인 윤사흔(尹士昕)이 우의정이 되어 형제간에 정승을 지냈으며 7∼8대에 걸쳐 국구부원군과 공신부원군, 정승 판서와 당상관들이 배출되어 조선시대 최고의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윤사윤과 윤사흔 두 집안에서 각각 중종의 왕비(장경왕후, 문정왕후)가 배출되어 왕실 및 왕위계승을 놓고, 대윤과 소윤으로 갈라져 싸우는 비극이 일어났다.
윤사윤의 손자인 윤여필(尹汝弼)의 딸이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이고, 그의 오빠가 윤임(尹任)이다. 장경왕후는 세자를 낳고 곧바로 죽었다. 장경왕후의 뒤를 이어 윤사윤의 동생인 윤사흔의 증손 윤지임(尹之任)의 딸이 제2계비로 책봉되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되었다. 먼 친척뻘인 고모와 질녀가 같은 왕비가 된 것이다.
문정왕후는 아들 경원대군(慶源大君, 후에 명종)을 낳은 뒤로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을 끌어들여(소윤)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중심으로 한 일파(대윤)와 정치적 암투를 벌였다. 이를 대윤과 소윤의 싸움이라고 한다. 대윤과 소윤의 싸움은 문정왕후의 아들이 왕위(명종)를 계승함으로써 소윤의 승리로 끝났으나, 소윤 역시 문정왕후가 죽자 몰락하였다. 결국 대윤과 소윤의 싸움은 파평윤씨 판도공파의 몰락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파평윤씨의 판도공파가 몰락한 후 소정공파, 특히 장령공계(노성윤씨)가 번성했다. 소정공파는 윤승례의 형 윤승순(尹承順)의 아들인 윤곤(尹坤)의 후손이다. 윤곤은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손자 윤호(尹濠)는 성종의 장인으로서 딸이 성종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그 후 그는 돈령부영사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윤곤의 후손 중에는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尹弼商)이 있다. 그는 문종 때 추장문과에 급제했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도승지로 왕명을 신속하게 처리하여 우참찬에 특진하였다. 성종 때 영의정에 오르고 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폐위를 막지 못하였다는 죄로 진도에 유배되고 사약을 받았다.
그의 증손인 윤현(尹鉉)은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내고, 선조 때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돈령부영사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밖에 소정공파의 윤사로(尹師路)는 세종의 딸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지고, 세조 즉위년 좌익공신에 책록되고 좌찬성, 중추부영사에 이르렀다.
소정공파는 판도공파가 몰락한 후에, 더욱 번성했다. 특히 이조판서를 역임한 윤강(尹絳)의 후손들에서 위세를 떨쳤다. 윤강은 윤지미(尹趾美) 윤지선(尹趾善) 윤지완(尹趾完) 윤지경(尹趾慶) 윤지인(尹趾仁) 등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중 특히 윤지선과 윤지완 형제는 형제 정승으로 유명하다. 윤지선은 현종 때 병조·이조와 공조판서를 거쳐, 숙종 때 우의정·좌의정에 올랐으며, 윤지완은 어영대장·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또한 소정공파에서는 숙종 때 호조참판을 지낸 윤비경(尹飛卿)의 후손 중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다. 윤비경의 손자인 윤봉구(尹鳳九) 윤봉오(尹鳳五) 윤봉조(尹鳳朝), 그리고 증손인 윤심형(尹心衡) 등이 유명하다. 윤봉구는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숙종 때 집의(執義)·찬선(贊善) 등을 지내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윤봉오는 영조 때 대사헌·우참찬 등을 지냈으며, 윤봉조는 암행어사와 대사간 등을 지내고, 영조 때 부제학이 되고 대제학에 이르렀다. 또 윤심형은 영조 때 부제학·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
첫댓글 용연을 새로이 단장을 해서
전보다 월등히 좋습니다 그런 모습을
설명과 함께 사진을 욜려 주셔서 고맙 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