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금촌에서 아귀찜을 먹었습니다. 참 맛있었습니다. 맛있게 먹으면서 두 포식자를 머리에 떠올렸습니다. 생선 아귀(마산에선 ‘아구’라고 함)와 불교에서 말하는 귀신 아귀(餓鬼)입니다. 이름처럼 둘 다 게걸스러움의 대명사입니다. 생선 아귀의 뱃속을 보면 온갖 것을 다 잡아 먹는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추리고 모아서 따로 젓갈을 담을 정도입니다.
불교의 귀신 아귀는 어떤가요? 생선 아귀와 이름은 같지만 생김새는 영 딴판입니다. 입은 바늘구멍만하고 배는 남산만합니다. 암만 먹어도 배가 고파 늘 싸운답니다. 이를 아귀다툼이라 합니다.
우리말과 발음이 비슷한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아규먼트(argument)입니다. 발음은 비슷하지만 뜻은 판이합니다. 아귀다툼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욕심을 채우고자 서로 헐뜯고 기를 쓰며 싸운다는 것이죠. 아규먼트는 논리를 세워 따진다는 것. 논쟁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네는 아귀다툼은 잘하지만 아규먼트는 못합니다. 아규먼트 자체를 싫어하는지도 모릅니다. 가끔 정치인들이 나오는 TV토론을 봐도 그렇습니다. 아규먼트보다 아귀다툼이 많습니다. 논리가 빈약할 뿐더러 자기주장과 주의만 내세우기 일쑵니다. 그래서 토론이 아귀다툼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단어의 뜻이 다른 것처럼 아귀다툼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이지만, 아규먼트는 구체적이고 이성적입니다. 감정은 호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은 심장이고요. 호흡을 더 좋아하는 우리네이기에 아규먼트보다 아귀다툼인가 봅니다.
비료로 밖에 쓰지 못 하던 아귀가 어떻게 마산에서 맵고 칼칼한 별미 음식 아귀찜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거기엔 기질(氣質)과 역사가 작용한 때문일 것입니다. 마산은 원래 합포라는 곳입니다. 몽골의 일본 정복, 임진왜란, 일제침략, 개항, 미군정, 독재항거 등 ‘태생적’으로 국제화 도시입니다. 마산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게 마산의 기질입니다. 화끈하고 열정적입니다. 변화에 빠릅니다.
이같은 지형적 기질과 역사가 작용한 아귀찜은 아귀를 말리고 양념을 보탠 음식입니다. 별 볼일 없는 식자재를 ‘편집’한 굿 아이디어 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조상들은 모양새가 빠지는 생선을 먹지 않고 버렸습니다. 모양새뿐만 아니라 이름도 따졌습니다. 참치 멸치 갈치 꽁치처럼 이름의 끝자에 ‘치’자가 들어간 생선은 제사상에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하급 어종으로 흔하고 천하다는 생각에서였죠. 격식을 따지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했다는 말입니다. 아귀도 그렇게 ‘쓰레기 생선’ 취급을 당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쓰레기 생선’에 아이디어를 동원해 정리하고 편집한 음식이 아구찜입니다.
이렇게보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아귀찜을 만든 정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귀찜 정신’은 바로 ‘편집 정신’입니다. 논리와 철학이 정리돼 있는 정신입니다. 생선과 양념과 맛에 대한 정신과 철학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구찜 정신은 너를 잡아먹는 허기진 포식자의 정신이 아닙니다. 너와 내가 섞여서 ‘우리’를 만들어 내는 공동체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귀찜처럼 아귀다툼을 정리하고 편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위 사색당파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네의 아귀다툼도 그 연원을 찾아보면 아귀찜처럼 지형적 기질에서 온 것입니다. 산과 강으로 조각조각 구분돼 있는 우리땅은 칸막이 문화의 전형입니다. 고개나 개울만 건너도 풍습이 다릅니다. 그에 따른 배타성과 지역성이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네는 지금도 여전히 좁은 우물과 낡은 울타리에 갇혀서 자기만 고집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이 어떤 시대입니까? 정보화 시대입니다. 스마트 시대입니다. 열린 자세여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우리'라는 공동체 정신이 있어야 더 넓게 더 높이 더 빨리 뛸 수 있습니다. 칸막이로 조각조각 난 지형적 기질을 아귀찜 정신으로 정리하고 편집하면 아귀다툼을 아규먼트로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엊그제 아귀찜집 맞은 편 구석 자리에서 들리던 소리가 귓가를 맴돕니다. 아규먼트가 아닌 아귀다툼 소리. 귀동냥으로 들은 내용이란 게 별게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한심한 얘기입니다. "아귀가 맞냐 아구가 맞냐" 둘 다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생각않고 끝없이 벌이는 설전이었습니다. 현실은 늘 현장에 있다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평평한 지구, 그 위에서 우리는 울퉁불퉁 살고 있습니다. 아규먼트의 창조적 지향성을 잊은 채…그리고 나는 '남의 남’이라는 사실을 잊은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