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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의 심판 경고
호 10:1-8
1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2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3 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4 그들이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
5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
6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책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7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
8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호 10:1-8 / 거짓된 경건과 화려한 제단 건축] 이스라엘은 가지마다 주렁주렁 탐스러운 열매가 가득한 포도나무처럼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그 재산을 제단과 기념비와 신상을 세우는 데에 쏟아 붓고 그 땅에 풍년이 들면 들수록 더욱더 많은 제물을 제단에 바치기에 바쁘다. 2) 그러면서도 하나님께는 진실한 마음을 바치지 않으니 마땅히 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호화스러운 제단을 무너뜨리고 신상들을 쓰러뜨리실 것이다. 3) 그때 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다가 왕도 없게 되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우리에게는 본래 왕이 필요 없지 않은가? 왕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4) 왕들은 지킬 마음도 없으면서 온갖 공약을 퍼뜨린다. 그래서 밭고랑에 독초들이 솟아 오르듯이 온갖 악법이 왕들에게서 쏟아져 나온다. 5)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ㄱ) 벧아웬의 송아지 우상이 다칠까봐 벌벌 떨 것이다. 신상이 헐리는 것을 크게 그 백성이 통곡하며, 그것을 섬기던 제사장들은 신상의 영화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탄식할 것이다. (ㄱ. 벧엘(하나님의 집) 성소를 멸시적으로 벧아웬(죄악의 집)이라 고쳐 부른 것이다) 6) 그 송아지 우상은 그들이 앗수르의 노예로 끌려갈 때 함께 실려 가서 그곳의 대왕에게 선물로 바쳐질 것이다. 에브라임은 그런 물건을 신으로 믿어 온 일 때문에 비웃음을 당하고,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궁색한 정책으로 인해 수치를 당할 것이다. 7) 사마리아도 망하여 온 나라를 휩쓰는 앗수르의 군대 앞에서 왕은 홍수에 떠내려가는 나뭇가지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8)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며 온갖 죄를 저지르던 아웬의 그 죄악의 제단들은 산산조각이 나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일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산들을 향하여 `우리를 덮어 다오!'하고 애원하며, 언덕들을 향하여 `우리 위로 무너져 다오!'라고 울부짖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우상을 섬기는 두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시고 이제 벌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범죄(1-3) 성경에는 많은 곳에서 이스라엘을 열매 맺는 포도나무로 비유하였습니다. 이는 인간 중심의 번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풍요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주의적인 열매를 맺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많은 열매를 맺을수록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일에 사용되었다는 뜻입니다. 주상은 일종의 석상으로 우상 숭배를 위한 도구입니다. 또한 두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는 거짓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 받을수록 세상일에 더 많이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형식적이거나 소홀히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그 진노의 채찍은 재단과 주상의 파괴로 나타났는데, 후에 앗수르의 침략으로 무차별한 파괴와 학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찾아 온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고백합니다(3).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으며 풍성한 축복의 열매로 더욱 감사히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두 가지 큰 죄(4-8)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받게 될 심판은 밭이랑에 돋는 독초와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독초가 산 속이나 황무지에서 나지 않고 밭이랑에서 자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진노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심판을 받게 된 원인은 첫째, 하나님을 배신한 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겨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지만 이들은 벧아웬의 송아지를 섬겼습니다(5; 왕상 12:25-33).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섬기던 신상을 앗수르에 빼앗기게 하시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세워놓은 다윗 왕가를 배반한 죄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로 사마리아 왕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 왕이 아무런 힘도 없는 물거품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울러 산당도 황폐하게 되고 그들 스스로가 죽음의 길을 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7). 이러한 비참한 말로는 최후 심판의 날에 하나님을 거역했던 자들이 하는 탄식과도 같은 것입니다(눅 23:30; 계 6:16-17).
적용: 오늘날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복음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세속적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함께 나눠봅시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습니다. 바돌로매는 몸의 가죽을 벗기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순교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도하며 순교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를 당했습니다. 안드레는 에데사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돌팔매질을 맞고 쓰러진 뒤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누가는 헬라에서 감람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칼에 목이 떨어지면서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다 죽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백 살까지 온갖 시련을 겪다가 죽어간 살아있는 순교자였습니다.
< 설 교 >
두 마음
호세아 10:1-8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애굽에 있던 것들을 그리워 한 것은, 그들이 좋아하던 것들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원하고 좋아하던 것들이 광야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몸은 애굽에서 나왔으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몸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왔으면서도 마음은 소돔과 고모라에 붙들려 있음으로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광야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아하고 기뻐할 만한 것이 없었을까요?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체험하지 못한 것을 광야에서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불기둥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했고, 홍해를 열어서 그들을 살리시고 애굽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했으며, 하늘의 만나를 먹었으며 발이 부르트지 않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는 인도하심을 체험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마음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인해 얼마든지 기뻐하고 감사하고 좋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으로 기뻐했다면 광야에서 어떤 생활을 했든, 배가 고프든 목이 마르든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애굽에 있는 것으로 기뻐하고 좋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왔으면서도 무엇이 중요한가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만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오늘 본문에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많은 열매를 맺었음을 문제 삼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그것이 잘못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에게 맺힌 많은 열매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많은 열매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풍요를 생각한 것입니다. ‘나는 이제 풍요롭다. 먹고 살 걱정이 없다’라는 생각에 빠진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었다면 그것은 나무의 능력이 아닙니다.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수고한 농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농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국 많은 열매로 인해 풍요로운 자신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만약 신자의 위치에 있었다면 많은 열매가 맺힌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의 풍요와 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즉 내게 열매가 달려 있지만 내 힘으로 맺은 것이 아님을 생각할 것이고, 따라서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열매를 인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이 많은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지만, 이것은 많은 것 때문에 감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 감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감사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많은 것이 있게 하신 하나님으로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것 좋은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많이 있지 않을 때, 좋은 것이 없을 때는 자연 감사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수준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열매를 가지고 우상에게 제사할 제단을 많이 세우고 우상을 아름답게 꾸몄던 것입니다. 많은 열매가 우상이 복을 줘서 되어진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나를 풍요롭게 한 우상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2절에서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두 마음을 품은 자로 말씀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마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마음이 나뉜 것을 뜻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두 개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즉 마음이 두 개로 분리되어 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또 한 마음으로 세상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세상을 좋아하는 것은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처럼 전혀 다른 두 마음을 속에 가지고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라도 세상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그것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이스라엘이 또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저희가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3절)고 합니다.
두 마음을 가진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풍요로움에서 나온 인간의 악함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풍요롭다는 것을 여호와 앞에 정당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즉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이 벌을 주셨을 것인데 이처럼 풍요롭게 된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라고 말하는 것도 모든 것이 풍요롭고 부족한 것이 없으니 왕이 날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왕이 왕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 “사마리아 거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를 인하여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 영광이 떠나감이며”(5절)라는 말을 합니다.
벧아웬의 송아지는 우상을 뜻합니다. 즉 그들이 믿고 의지했던 우상이 정작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침략을 받았을 때 전혀 힘이 되지 못하고 도움도 되지 못함으로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믿고 의지했던 것이 힘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해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6-8절도 같은 의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벌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의지한 것이 결국 헛된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항상 이런 식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하나님의 사랑 아래 붙드시기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된다고 여기는 우리에게 돈으로도 안되는 일이 있게 하심으로써 돈도 헛된 것임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이 힘으로 추구하는 것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은총이며 기쁨이라는 것을 배워야 하고 이 마음으로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
일찌기 엘리야 선지는,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바알 우상을 섬기는 무리들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 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시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고 당시 국민들을 경책하였다(왕상 18:21-).
1. 번성에 비례하여 부패해 짐 1-8 하나님의 백성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였는데, 무성하게 열매가 많을 수록 제단(우상단)을 많게 하고,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株像)으 로 알아 아름답게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주신 번영의 증가에 따라서 그 번영을 우상숭배의 죄악에 이용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격노(激 怒)케 하는 큰 죄악이다.
특히 "주상(柱像)"이란 말은, 바알신을 위한 돌로 만든 기둥형의 우 상이다. 이는 가나안 본토인들의 풍습의 하나다. 저희는 두 마음을 품어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섬기고 있으니, 이는 아 첨하는 성질을 가졌으니 고치기 힘들다.
그들은 종교적인 노력은 하면서도 여전히 거짓됨을 탈피하지 못하 니, 이는 마치 옥답(玉沓)에 나는 독초(인진)같다. 독초가 황무지 에 났다는 것은 이상할 것 없으나 경작하는 밭에 났으니 견딜 수 없 는 일이다. "벧아웬"은 곧 벧엘인데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웠던 곳으로 그때부터 벧엘(하나님의 집)답지 못하며, 벧아웬(헛 된 것의 집)이라고 불리움이 마땅하다. 즉 우상의 허망한 것을 지목 함이다.
7-8절은 이스라엘 나라가 앗수르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 될 일에 대 한 예언인데, 왕은 없어지고 세상은 훼파되고 백성들은 막다른 처지 에서 정복자의 가해를 피하려고 차라리 산악이 무너지므로 거기에 묻 혀 죽기를 원할 지경이었다.
2. 죄 값으로 받을 징벌 재니술 9-11 이스라엘 나라가 기브아 사람들(베냐민 지파에 속함)의 범죄를 징 벌하기 위하여 전쟁하였으나 (삿 19:, 20:) 의로운 듯하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기브아 전쟁 이후 기브아인들의 죄와 같은 악을 범하였 다. 기브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에서 베냐 민 족속이 거의 전멸된 것 같은 전화는 아직까지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외침에 의한 멸망을 면하였으나, 필경 여호와 께서 그 나라를 외국 세력으로써 패망케 하신다. 이스라엘이 이때 까지는 암소가 타작 맏아에서 곡식을 먹으면서 곡식을 밟는 것 같이, 쉽고 대우 좋은 일을 하였으나, 이제부터는 멍에를 메고 사람을 태우 고 밭을 가는 소와같이 되리니 이는 곧 외국에 포로되어 가서 종살이 할 것을 뜻한다.
3. 불회개에 대한 경고 12-15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고 하심은 의를 행하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후한 갚음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 회하지 않고 자기 길과 많은 용사를 의뢰하였으니 악을 밭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는 격이다. 자기 신뢰는 악의 근원이다.
14절은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이스라엘을 정복할 때 될 일의 예언 인데 산성이나, 벧아벨이 훼파되고 어미와 자식이 함께 부숴지고 말 것이다.
결 론:이렇게 이스라엘에게 환난이 오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도 아니고, 혹은 앗수르 왕 살만에셀 때문에도 아니고, 다만 벧엘 때문 이라고 한다. 곧, 벧엘에서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때문이라고 한다.
저희가 두 마음을 풍었으니
호 10:1-8
1.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개역, v2),
* 풍성한 수확을 바라는 마음으로 깎아 만든 돌기둥들과 그 앞에 만든 제단들이 늘어갔고..v1,2 금송아지와 이교제사장들도 곳곳에 세워졌으니(특히 유명한 곳이 벧아웬이었다. v5)
* “우리는 여호와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 안 해요. 뭐 두렵지도 않구요.”라고 큰소리치고 있는데... v3 (뭐, 이만하면 막 가자는 거죠.)
* 이렇게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이 사라지게 될 때, 사람들 마음엔 이기심과 온갖 자기중심적인 악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라...
* 마치 밭이랑에 독초가 돋아나듯 거짓맹세와 빈 약속들(사기)이 난무하고, 사법정의는 사라져 버렸다는... v4
*** 그니까, 자세히 보니까 두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이네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 욕심과 돈벌이에 필요한 건 다 숭배하는, 욕심에 충실한 사람들이니까요... 그래서 새번역은 두 마음을 품었으니... 를 “마음에 거짓으로 가득 찼으니”라고 번역하네요ㅠㅠ
* 하나님의 백성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찾으나 실은 마음에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
*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이름 팔아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고, 그들은 인간이 기본적인 욕망인 남들보다 좀 더 많이 가지고, 좀 더 잘 살고, 좀 더 잘 먹고 사는 걸 자극하고, 그걸 미끼로 종교장사하고 사는 거잖아요?
* 벧아웬의 금송아지와 거짓 제사장들이나, 곳곳에 깎아 세운 돌기둥만큼이나 오늘날 교회에서, 기도원에서 각종 신유와 축복 대 성회라는 이름으로, 부흥성회라는 이름으로, 특새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라 부르는 우상숭배 잔치들을 계속하고 있으니..
* 두 마음을 품은 게 아니라, 오직 한 마음, 욕심에 근거해서 사는 사람들과 그걸로 돈벌이하는 종교장사꾼들..
* 그렇다면, 간단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동서고금 어디에나 다 있으니, 갸들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심판하시도록 내버려두고, 내가 그 속에 들어있지만 않으면 되는 거죠.
* 뭐가 종교장사치의 목소리인지 잘 분별하는 것이죠. 어느 교회, 어느 목사가 금송아지 우상을 하나님이라 부르며 숭배하고 있는지 분별하고, 또 내 속에 어느 목소리가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내 욕심인지 잘 분별하는 것!
* 그리고 이렇게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따르고자하는 사람들을 잘 찾아내고 같이 공동체가 되어 살아가는 것, 같이 진짜 예수님의 몸, 교회가 되어가는 거죠.(딤후2:22)
2.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 하나님은 그들을 앗수르에 넘기심으로써 더 이상 왕(독립된 나라의 상징)에 대한 희망도 꺾여버리고(v3)
* 이 땅의 금붙이들은(그게 금송아지였더라도) 다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게 될 거고..(그래도 돌아오는 건 수치뿐이라..) v5,6
* 사람들은 당면한 파괴와 노예사냥을 피하고자 허둥거리며 “산들아 우릴 숨겨다오. 언덕들아 우릴 덮어다오.”라고 부르짖게 될 거다.v8
***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예언하신 대로 이미 심판받은 기록들이 우리 손에 들려있어서 익숙한 이야기인데...
* 이 심판의 목소리 중에 우리에게 익숙한 게 눈에 들어옵니다.
“산들아 우릴 숨겨다오. 언덕들아 우릴 덮어다오.” 라는 목소리.. 바로 예수님이 마지막 심판을 선포하시면서 하신 말씀(마23:30).
* 우리의 앞날에도 이스라엘사람들처럼 분명 하나님의 심판대가 남아있다는 무서운 말씀!!
* 그래서 우리 앞에 놓인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야 한다는..(빌2:12)
* 물론 예수님을 잘 따르고 실제적으로 순종하고 사는 사람들에게야 뭔 일이 있겠습니까만, 말로만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 하면서 지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문제겠죠... 혹시 내가 뭔가 잘못해서 지옥으로 떨어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중세성도들처럼, 95개조를 교회 게시판에 붙이기 전의 루터처럼 벌벌 떨 필요는 없겠지만, * 마음의 중심을 새롭게 함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분별력으로 매일매일, 지금 여기에서의 일상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한걸음 한걸음을 걸어가는 게 중요한 것임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정한조 목사
호세아 10:1-15
찬송가 266장 ‘주의 피로 이룬 샘물’
심판의 경고(1-8절)
호세아 선지자는 계속해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삶이 총체적으로 부패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1-8절이 바로 그 사실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랜 기간 통치하였던 왕은 여로보암2세였습니다. 또 그가 통치할 때에 북이스라엘은 최전성기를 구가하였습니다. 군사적으로 막강하여 다윗과 솔로몬 때 만큼이나 국경이 길어졌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습니다. 여로보암2세 통치 후반에 호세아 선지자는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절의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풍성함의 이유를 우상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제단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주상_한 곳에 서 있는 우상’을 꾸미는 일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두 마음을 품다’는 ‘마음이 나뉘어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현 중에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을 행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하기 위해서 많은 전쟁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제나 군대의 하나님,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나서는 ‘전쟁의 하나님’이 아니라 ‘풍요의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알’을 비롯한 우상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치를 때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고,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할 때는 ‘바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 사실을 잘 지적한 것이,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여호와와 바알 중에서 누가 하나님이신지를 선택하라는 외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의 제단을 파괴하시고, 주상_돌기둥을 부수신다고 하십니다. 즉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못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5-6)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책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벧아웬’은 ‘벧엘’을 뜻하는 지명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최남단에 위치한 곳인데, 그곳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와서 처음 처음 단을 쌓았던 곳이었고, 야곱이 돌베개로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던 곳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1세가 백성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 거기에다 금송아지를 세우는 등 우상숭배를 하게 되어, ‘벧엘_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벧아웬_사악의 집, 허무의 집’이라고 경멸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집을 사악의 집, 허무의 집으로 만들어 버린 것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야렙 왕’의 문자적인 의미는 ‘싸움의 왕’입니다. 그는 ‘아시리아제국의 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상숭배는 곧 나라를 허무는 출발이자 마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8)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물의 표면에 맺히는 거품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거품이 무지갯빛을 띠고 아무리 영롱하게 보일지라도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또 거품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더 빨리 터집니다.
또한 ‘거품’은 ‘나뭇토막’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강물이나 시냇물 위에 떠 있는 나뭇토막이나 나뭇가지는 조금 있다가 다시 보면, 떠내려가고 나서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멸망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한 나라의 왕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잘 꾸미려고 했고, 정성을 다했던 벧엘에 세운 산당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최초의 대중가요가 ‘황성옛터’입니다. 한때 찬란했던 고려의 왕궁, 만월대를 바라보고 지은 노래입니다. 2절 가사 앞부분이 이러합니다.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하나님의 집이 우상숭배의 도시가 되어 버린, 벧엘이 이와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징계(9-15절)
9-15절은 북이스라엘의 죄를 기브아까지 소급하여 추궁하고, 결국 징계를 당할 것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9-10)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그러니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이 어찌 기브아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 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리니 그들이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그들을 치리라
북이스라엘은 기브아 시대 때부터 당시까지, 300년 이상을 지속적으로 죄를 짓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브아 시대’는 사사기 19-21장에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일어난 일은 입에 담기도 어려운 참극입니다. 한 레위인의 첩이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서 성폭행과 살해를 당하자, 그 시체를 12조각을 내어서 이스라엘 각 지파로 보내어서 기브아 사람들이 저지른 만행을 온 나라에 알렸습니다. 그래서 전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베냐민 지파는 그 일로 인해, 전멸할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그 일은 생각도 하기 싫은 치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는 지금의 시대가 그 옛날 사사시대처럼 잔혹하고 추악함이 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물리침을 당하는 ‘두 가지 죄’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과 ‘반역 정부를 세운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우상숭배와 연결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 대용품_우상’을 섬기게 되었고, 다윗의 계보가 아닌 다른 정부를 세웠기 때문에, 성전을 대신하기 위해 벧엘에 송아지 우상을 세웠던 것입니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의 대용품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11)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뜻합니다.
북이스라엘은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트랙터와 같은 농기구가 없던 당시에 소가 해야 할 일이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밭을 가는 일도 해야 했고, 곡식을 등에 지고 옮기기도 해야 했으며, 곡식을 빻기 위해 연자맷돌도 돌려야 했습니다. 그 중에서 소의 가장 쉬운 일은 곡식을 밟는 것이었습니다. 소가 곡식을 떨 때에는 입에 망을 씌우지 않는 것이 율법의 관례이었기 때문에 곡식을 떠는 소는 곡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북이스라엘이 복과 형통, 풍요는 좋아하지만, 율법이 요구하는 책임과 의무는 행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이 사람도 태우고 수레도 끌어야 하고, 밭도 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먹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로 이방에게 압제를 당하며, 곤고한 날을 보내게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곡식의 씨를 심고, 열매를 거두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고 명령하십니다. ‘공의를 심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져서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려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하신 분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을 향하여서는 긍휼한 마음, 깊은 공감을 가지고 삶을 나누는 것이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경험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인애’입니다. 인애는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이고, 떨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사랑입니다.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묵은 땅을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묵은 땅은 오랫동안 경작하지 않아서 길처럼 딱딱해진 땅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의 심령이 욕망만을 추구하느라 율법과 말씀의 쟁기로 한 번도 뒤집어 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 마음의 땅을 뒤집으면 공의의 비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땅을 아무리 뒤집어서 거기에 곡식을 심어도, 물이 없으면 결실할 수 없습니다. 뒤집음과 공의의 비가 합해져서 의의 열매를 결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촉구함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이 어떠하였는지 이렇게 증거합니다.
(13)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북이스라엘 백성이 ‘갈고’, ‘거두고’, ‘먹은’ 것은 전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밭 갈아 심은 것은 ‘악’이었고, 거둔 것은 ‘죄’였으며, 먹은 것은 ‘거짓 열매’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의뢰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많은 용사_군사력’이었습니다. 여로보암2세의 군대로 나라를 충분히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14-15)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 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
북이스라엘은 국방력이 강하고, 산성을 높이 쌓으면 나라가 지켜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높이 산성을 쌓아도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벧엘에 송아지로 우상을 만든 것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게 부서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시작되는 새벽에 이스라엘의 왕이 잡혀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고대에 왕의 죽음은 곧 전쟁의 패배를 의미하고, 전쟁의 패배는 곧 국가의 멸망과 동의어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2세가 죽은 후, 30년 동안 6명의 왕이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혼란을 겪다가 아시리아제국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완전히 무너지게 된 제1 원인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아니하고, 자신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은 바알을 비롯한 가나안의 토착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이것은 남유다가 바빌론의 포로가 된 이유도 동일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고, 그 삶이 무너지는 가장 큰 원인은 우상숭배입니다. 고대에는 우상숭배가 돌과 나무와 같은 눈에 보이는 형상이었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병든 이기심(욕망)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주인을 자신으로 삼고, 하나님은 조력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알라딘의 마술램프에 나오는 ‘지니’ 정도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길을 자신이 정하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만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잔치를 여시고 초대를 하는 데도, 자신은 밭을 샀기 때문에 나가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소를 샀기 때문에 시험을 해 봐야 한다고 말하며, 결혼했기 때문에 내 생활에 더 치중해야 되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과 민족이 거리와 골목에 있을 때, 길과 울타리 가에 있을 때 불러주심을 받았다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고 보면 깨닫게 됩니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이며, 내 길을 고집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길에 순종하는 것이 최상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삶은 없으며, 그것보다 인생을 더 가치있게 사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사는 것이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이기심의 묵은 땅, 욕망의 묵은 땅, 세속적 가치관의 묵은 땅을 기경하여 공의를 심음으로, 하나님의 인애를 거두며, 하나님의 은혜의 비를 경험하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에브라임 사람들이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에 집중하다가 그렇게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집중하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나, 잃어버리는 경우가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 삶의 ‘벧엘_하나님의 집’을 ‘벧아웬_사악의 집, 허무의 집’으로 전락시키는 일도 없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우리 삶에 있는 묵은 땅들을 갈아엎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인애를 거두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공의로운 비를 경험하는 복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열매 맺게 하신 것에 집중하다가, 그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을 잊은 일은 없습니까? 있다면 그 때 어떤 교훈을 얻으셨습니까?
2. 두 마음을 품는 것, 마음이 나뉘게 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어떤 경우에, 또 어떤 일로 마음이 나뉘게 됩니까?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겠습니까?
3. 당신의 삶의 영역에서 묵은 땅으로 있는 곳은 무엇입니까? 그 영역을 어떻게 기경하실 수 있겠습니까?
4. 하나님과 하나님의 대용품을 겸하여 섬기려고 하지 아니하고,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
호 10:1-8
1. 무성한 포도나무라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왜 제단을 많이 하는 것이 문제일까?
3. 왜 번영할수록 헛된 신을 위해 돌기둥을 많이 세울까?
4. 그들이 품은 두 마음은 무엇인가?
5. 이스라엘이 무엇때문에 벌을 받는지는 알고 있나?
6. 왕이 있어도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발언은 무엇을 뜻하나?
7. 이스라엘은 왜 거짓 맹세를 하고 지키지도 않을 언약을 맺었나?
8.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나나?
9. 사마리아 주민들은 무엇때문에 걱정하고 슬퍼하는가?
10. 왜 송아지는 앗수르의 야렙 왕에게 바쳐지나?
11. 우상을 의지한 이스라엘은 어떤 상황이 될 것인가?
12. 사마리아 왕은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13. 이스라엘은 아웬 산당에서 어떤 죄를 지었는가?
14.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어떤 상태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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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많이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 그것은 물질적 으로 번영한 북이스라엘의 그림이다. 그러나 물질적 부요는 이들을 영적으로는 풍요롭게 하지 못했다. 재물은 오히려 그들을 타락을 향하여 질주하도록 고무한 것이 아니었을까?
열매가 많을수록 이스라엘은 제단을 많이 쌓고 땅의 수확이 많을수록 그들은 돌로 된 우상들을 더욱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다. 번영이 이들을 삼킨 것이다.
한 분 남편이신 하나님을 제쳐놓고 이스라엘은 매춘부 노릇을 한 것이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를 이스라엘은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뜻이다. 제 정신이 있는 남편이라면 이런 아내를 받아 들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이들에게 벌을 주실 수밖에 없으시다. 하나님은 그들이 아낀다는 우상의 제단을 부수고 돌기둥을 무너뜨리실 것이다.
그때에야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 왕이 없다고 푸념을 하며 왕이 있어도 무슨 소용이겠느냐고 한탄을 한다. 무슨 뜻인가? 왕들조차 백성들에게 거짓 맹세를 하고 가짜 언약을 만들어 백성들을 착취한다는 뜻인가? 백성들은 서로 법정에 고발하고 사회정의는 시궁창으로 던져 버린 그런 분위기다.
앗수르로 옮겨진 송아지 우상때문에 사마리아 주민들은 걱정하고 백성이나 지도자들은 우상의 영광을 잃었다고 슬퍼한다고 하니 기막힌 어불성설이다.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더니 이들은 총명은 암흑으로 곤두박질 친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을 보고 계신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수 있겠는가? 혼미한 자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앗수르에게 혼주걱이 나게하신다. 사마리아 왕은 마치 물거품처럼 스러져 버린다. 하나님 없는 인생이 영원할 줄 착각한 모양이다. 우상들의 제단이 있고 돌기둥이 세워져 있는 아웬의 산당은 한낱 잡초로 덮힐 것이라 한다.
그때 이스라엘은 산들이 자기들의 수치를 덮으라 하고 언덕에게 자기들 위해 자기들 위에 무너지라 할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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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경제적 번영이 가져온 북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의 현장에 있다. 나는 질문이 생긴다. 왜 그들이 물질적 풍요를 누릴 때 우상의 제단을 더 늘리고 돌기둥을 더 많이 세워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우를 범하였는지 이해가 안된다. 그것은 사실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 왜 물질이 번창할때 하나님만을 심길 수는 없었던 것일까? 하나님은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하신다.
나는 두 마음을 묵상해 본다. 하나님은 엄연히 인격체이시고 우상은 인격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만 온전히 드려야 할 자기들의 마음을 우상과 나눈 것일까?
나는 무성한 포도나무에 주렁 주렁 달린 열매들을 가시화 해 본다. 그것은 분명 풍요로움이다. 그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번창함을 가져온 재물이 북이스라엘에게는 독이 된 것이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이 주인을 미워하고 저 주인을 사랑하거나 혹은 이 주인을 떠받들고 저 주인을 업신 여길 것임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3)
나는 맘몬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부나 재물을 가리키는 언어다. 맘몬은 하나님처럼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왜 맘몬을 섬긴다는 표현을 쓰는가? 나는 여기에 이스라엘의 타락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탄이 맘몬을 미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 한 것이 아닐까?
그것은 분명 권세다. 악의 권세다. 이스라엘이 그 권세에 휘말려 하나님께로 닥아갈 수가 없었던 것일까? 나도 세상의 권세 잡은 사탄의 세상에 사는 이상 나도 그 권세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것이 영적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이스라엘 같이 될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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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보면서 나의 사랑하는 조국, 한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대략 200여년 남짓한 한국의 기독교 역사를 생각하며 나는 오늘의 한국을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 읽고 싶어진다.
주변 나라에 휘둘리며 식민지였던 한국은 경제적으로 극빈자 수준이 아니었던가?
경제 성장률이 급상승한 현재 한국의 하나님 사랑도 상승하고 있는 것인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도 섬기고 재물도 섬기는 나라가 되어서는 아니되는데. 나는 나의 조국 한국을 위해 기도한다. 한국이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나라가 되기를 그리고 소나무 뽑던 조상의 기도정신으로 북한을 살리고 실크로드를 거쳐 예루살렘까지 복음의 깃발을 꼿는 한국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나 역시 이스라엘처럼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내게 죽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 백성이라는 징표를 보이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이요 하나님 백성으로써의 나의 정체성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나의 일편단심의 표징이요 그 마음이 퇴색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나의 삶의 목표이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향한 나의 일편단심을 cafe 316으로 하나님께 바치고 싶다. 그것을 나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