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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지 [列國誌] 700
■ 3부 일통 천하 (23)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3장 명군 명신 (6)
그러는 사이 약속한 한 달이 지나갔다.
악양(樂羊)은 부하 한 사람을 중산무공(中山武公)에게 보냈다.- 항복하시오.
중산무공(中山武公)은 다시 악서를 성 위로 올려 보냈다.악서(樂舒)는 슬피 울며 애걸했다.
"아직 의견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한 달만 더 말미를 주십시오.""좋다."
악양(樂羊)은 다시 한 달 동안의 여유를 주었다.또 한 달이 지났다.
중산무공(中山武公)은 역시 악서를 성 위로 올려보내 말미를 달라고 청했고, 악양(樂羊)은
마지못한 듯 그 청을 수락했다.
이렇듯 세 번이나 기한을 연장했기 때문에 싸움 한 번 없이 3개월이란 시일이 흘렀다.
그래도 중산무공(中山武公)은 여전히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위군의 선봉장 서문표(西門豹)는 악양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이상하다. 악양 장군이 정말로 아들 때문에 공격을 미루는 것인가?'
참다못해 그는 악양(樂羊)을 찾아가 물었다."벌써 3개월이 지났습니다.
원수께선 중산성(中山城)을 공격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악양(樂羊)이 대답했다."있소.""혹시 그것이 아들 때문입니까?"
"아니오. 우리가 중산국(中山國)을 정벌하러 온 것은 그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었소.
만일 내가 공을 세우기 위해 서둘러 공격하면 중산국의 백성들은 큰 고통을 당하게 되오"
"내가 3개월 동안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중산국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요. 그래야 점령한 후에도 이 곳을 편안히 다스릴 수 있을 것이 아니겠소?"
악양의 대답에 서문표(西門豹)는 크게 감탄했다.
"아, 악양 장군이야말로 병법의 오의(奧義)를 깨달은 사람이로구나!"
그 무렵, 위(魏)나라 조정은 악양의 일을 놓고 몹시 시끄러웠다.
원래 위나라 대부들 중에는 악양(樂羊)을 미워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자가 하루아침에 원수(元帥)라는 높은 자리에 오른 것에 대한
질시(嫉視)에서였다.그들은 악양(樂羊)이 3개월간이나 중산성을 공격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물을 만난 고기들처럼 신이 나서 악양을 참소(譖訴)시작했다.
- 악양은 자기 자식을 염려하여 3개월간이나 공격을 미루고 있습니다. 이는 주공의 믿음을 저버리는
배신 행위입니다.- 악양(樂羊)을 즉시 소환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군사와 비용만 허비할 뿐입니다.
- 악양이 중산국(中山國) 임금과 공모하여 우리 나라로 쳐들어올 계획을 꾸미고 있습니다.
- 악양이 공격하지 않는 것은 중산국 땅의 반을 할양받기로 밀약했기 때문입니다.
갖가지 내용의 참소장이 하루에도 수십 통씩 올라왔다.
처음에는 무심히 넘기던 위문후(魏文侯)도 나중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악양을 천거한 상경 적황(翟璜)을 불러 물었다."경(卿)은 이 일을 어찌 생각하오?"
적황은 서슴없이 대답했다."악양(樂羊)이 3개월 동안 중산성(中山城)을 공격하지 않은 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악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 후로도 계속 참소장이 올라왔다.
그러나 위문후(魏文侯)는 그것들을 모두 상자 속에 넣어두고 일절 답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사자를 보내어 악양을 위로했다.- 커다란 저택을 마련해 두었으니 부디 개선해 돌아오시오.
마지막 기한까지도 항복 사자를 보내오지 않자 악양(樂羊)은 마침내 북채를 쥐었다.
둥둥둥둥! 공격신호였다.석 달간 충분히 휴식을 취한 위군(魏軍) 병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중산성을 향해 돌진했다. 새로이 제작한 운제(雲梯)와 충차(衝車)도 동원되었다.
위군(魏軍)의 공격은 성난 파도와도 같았다.
삼대(三隊)로 나뉜 군사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대로 성을 공격했다.
한대가 밀려가면 다른 한대가 빠졌고, 그 한대가 빠지면 또 다른 한대가 몰려갔다.
중산성(中山城)은 견고했으나 이 같은 위군의 공격을 감당하기에는 군사 수가 너무 부족했다.
보름쯤 지났을 때 중산국 장수 고수(鼓須)가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그러자 중산국에서는 탈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대부 공손초(公孫焦)가 또 하나의 꾀를 내었다.
"사태가 매우 급합니다. 이제 한 가지 계책밖에 없습니다.""무엇이냐? 어서 말하라."
"악서(樂舒)가 세 번이나 여유를 달라고 청했을 때 악양(樂羊)은 세 번 모두 그 청을 들어주었습니가.
그것만 보아도 악양이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악서(樂舒)를 장대 위에 비그러매어 성 위에 내보이십시오. 악서는 죽지 않기 위해
살려 달라고 부르짖을 것이며, 악양(樂羊)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공격을 중단할 것입니다."
중산무공(中山武公)은 생각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악서를 불러들였다.
"이는 연극일 뿐이다. 결코 그대를 죽이지 않을 터이니 안심하고 장대 위에 매달려라."
연극이라는 말에 악서(樂舒)는 마음 놓고 장대 위에 매달렸다.
장대가 성 위에 세워지자 악서(樂舒)는 성 아래를 향해 죽는 소리로 애걸했다.
"아버지여! 이 몸을 살려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물러가지 않으면 소자는 죽습니다."
악양(樂羊)이 그 광경을 보았다.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성 위를 향해 호통을 쳤다.
"너는 참으로 못난 자식이다. 나의 말을 자세히 들어라. 너는 벼슬을 살면서도 그 나라를 위해
회생의 계책을 세우지 못했고, 적과 싸우면서도 능히 이기지 못했다.
또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도임금에게 항복을 권하지 않았으며, 도탄(塗炭)에 빠진 백성을
구해야 하거늘 그 또한 실행하지 못했다.""이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젖먹는 어린애처럼
살려 달라고 애걸하니, 참으로 나는 그 꼴을 보기 어렵구나. 너 같은 놈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
내 손으로 친히 죽이리라!"악양(樂羊)은 말을 마치자마자 활을 들어 시위를 당겼다.
장대에 매달린 악서(樂舒)가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했다.
장대 아래의 중산국 군사들을 향해 황급히 외쳐댔다."어서 나를 내려라.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 한다!"군사들은 급히 장대를 뉘여 악서를 풀어주었다.
악서(樂舒)는 중산무공에게로 가 말했다."신의 아버지는 위(魏)나라만 생각할 뿐
자식은 조금도 생각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공께선 성을 지킬 방도를 달리 강구하십시오."
그때 곁에 있던 공손초의 눈빛이 반짝, 하고 빛났다.중산무공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비가 우리 성을 치니 그 자식은 죽어 마땅합니다. 악서(樂舒)를 참수형에 처하십시오."
701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701
■ 3부 일통 천하 (24)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3장 명군 명신 (7)
악서(樂舒)를 참수형에 처하자는 공손초(公孫焦)의 말에 중산무공(中山武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번 일은 악서의 죄가 아니다."
"악서(樂舒)만 죽으면 신에게 위군을 물리칠 계책이 있습니다."
중산무공(中山武公)은 허리에 찬 칼을 풀어 공손초에게 건네주고는 등을 돌렸다.
공손초(公孫焦)가 악서를 향해 외쳤다."너는 우리 나라를 위해 죽어 주어야겠다.""잠깐............"
그러나 공손초의 칼이 더 빨랐다.악서(樂舒)는 말을 채 맺기도 전에 가슴에 칼을 맞고 쓰러져 죽었다.
공손초(公孫焦)가 다시 중산무공에게 아뢰었다.
"신의 계책이란 이러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식을 생각하는 아비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주공께선 악서의 시체로 국을 끓여 악양(樂羊)에게 보내십시오."
"악양(樂羊)은 자식을 끓인 국을 보면 슬픔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슬픔이 지나치면 넋을 잃게 되고,
넋을 잃으면 싸울 생각이 없어집니다. 그때를 노려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면
어찌 승리를 거둘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달리 계책이 없는 중산무공(中山武公)은 공손초가 시키는 대로 악서의 시체로 국을 끓였다.
그러고는 사자를 뽑아 그 국물과 잘린 머리를 성 밖 악양에게로 보냈다.
사자가 그것들을 악양에게 바치며 말했다."우리 주공께선 위군(魏軍)을 물리치지 못한 죄를 들어
악서(樂舒)를 죽이고 그 시체로 국을 끓였습니다. 이것이 그 국물과 목입니다.
지금 성안에는 악서의 처자가 남아 있습니다.""만일 원수께서 중산성(中山城)을 다시 공격하기만 하면
우리 주공은 악서의 처자를 다 죽일 작정이십니다. 원수께서는 며느리와 손자를 살리고 싶으시면
지금 곧 군대를 철수하십시오."그런데 악양(樂羊)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아들 악서(樂舒)의 잘린 머리를 쏘아보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 못난 놈아! 네가 무도한 임금을 섬겼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이는 모두 네가 스스로 청한 것이다."말을 마치자 악양(樂羊)은 손을 뻗어 악서의 시체를 끓인 국물을
후루룩 마셔버렸다.그릇은 순식간에 비었다. 그는 그릇을 내주며 중산국 사자에게 말했다.
"너의 임금이 보내준 국이 참 맛있구나. 중산성(中山城)을 함락하는 날 내가 직접 네 임금에게
감사할 것이다. 너는 네 임금에게로 돌아가 돌아가 우리 군영에도 가마솥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라!"
이 말을 들은 사자는 사색이 되었다.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성으로 돌아가 중산무공에게
그대로 보고했다.처음 노렸던 바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자 중산무공(中山武公)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아아, 이제는 항복할 수도 없구나.
위(魏)나라 군사가 성 안으로 들어오는 날 그는 어떤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지 몰랐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몸서리쳐졌다.
그 날 밤, 중산무공(中山武公)은 내궁의 한 빈 방에 들어가 목을 매고 자살했다.
다음날 아침 중산무공의 시체를 발견한 공손초(公孫焦)는 만사가 끝났음을 알았다.
그는 성문을 열고 위군 진영으로 나가 항복했다.악양(樂羊)은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고 아들까지 죽인
공손초(公孫焦)를 그 자리에서 쳐 죽었다. 이어 성 안으로 들어가 중산국 백성들을 위로한 후
궁성을 접수했다.중산성(中山城)을 포위한 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위문후(魏文侯)는 악양이 중산국을 정벌하고 개선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친히 성문 밖까지 나가
영접했다."이번에 장군이 나라를 위해 아들을 잃었으니, 이는 다 과인의 허물이오."
"나라를 위하는 일인데, 어찌 사사로운 정(情)에 얽매일 수가 있겠습니까?"
위문후(魏文侯)는 악양을 자신의 수레에 태워 궁으로 들어갔다.
악양(樂羊)은 중산국 지도와 가지고 온 보물을 위문후에게 바쳤다.
다음날, 궁성 안에 큰 잔치가 베풀어졌다.악양의 개선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모든 신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위문후(魏文侯)는 악양에게 술잔을 내렸다.
"이번 일은 오로지 장군의 공이오!"위문후의 거듭된 치하에 악양(樂羊)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부터 나의 앞날은 탄탄대로다!'잔치가 끝나갈 무렵이었다.위문후(魏文侯)가
좌우 시종을 불러 분부했다."상자를 이리 내오너라."시종들이 두 개의 큰 상자를 들고 나왔다.
상자들은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모두들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궁금히 여기는 중에 위문후(魏文侯)가 다시 분부했다.
"이 상자를 악양 장군의 집까지 갖다 드려라."악양(樂羊)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필시 상자 속에는 금은 보화가 들어 있을 것이다. 다른 신하들이 질시할까 염려되어
저렇듯 단단히 봉한 것이 틀림없다.'집으로 돌아온 악양(樂羊)은 집안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저 상자를 중당(中堂)안에 들여놓고 모두 물러가라!"혼자서 그것들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자물쇠를 열었다.그런데 천만 뜻밖이었다.상자 안에는 금은 보화가 들어 있지 않았다.
신하들이 위문후에게 올린 듯한 상소문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악양(樂羊)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그것들을 일일이 읽어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악양의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짙게 들어찼다.
상소문의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한결같이 악양을 죽여야 한다는 글이었다.
악양(樂羊)은 이마에 솟은 땀방울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없는 동안에 이렇듯 많은 신하들이 나를 참소(讒訴)했구나. 만일 주공이 나를 믿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이번 일에 성공할 수 있었으리오!"다음날, 악양(樂羊)은 궁으로 들어가 위문후 앞에
엎드렸다."이번에 신이 중산국을 쳐서 이긴 것은 오로지 주공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신은 오로지 싸움터에서 칼만 휘두른 것에 불과합니다. 신에게는 아무런 공이 없습니다.
어제 받은 상을 도로 반납하겠습니다."위문후(魏文侯)가 흐뭇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소. 나였기에 장군을 의심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장군이었기에 나의 뜻을
성취시켜준 것 또한 사실이오. 장군과 나는 똑같은 공이 있소. 그대는 앞으로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살도록 하오."그러고는 악양을 영수군(靈壽君)에 봉했다.
영수는 중산국의 땅으로 그 점령지를 악양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 위문후(魏文侯)는 한 가지 납득할 수 없는 조치를 취했다.
악양에게 내렸던 병권을 모두 거두어들인 것이었다.
악양을 천거한 바 있는 적황(翟璜)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위문후(魏文侯)를 찾아가 물었다."주공께선 악양이 뛰어난 장수라는 것을 아시면서
어찌하여 그의 병권을 모두 거두어들이셨습니까? 그에게 군사를 맡기면 우리 위(魏)나라 군대는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그런 유능한 인재를 썩히는 것은 아깝습니다."
하지만 위문후(魏文侯)는 웃기만 할 뿐 종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적황(翟璜)이 궁에서 나오다가 이극(李克)을 만났다.
이극 또한 자하의 제자로 위문후의 정책 고문으로 활약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서(漢書)>의 <식화지(食貨志)>에는 이회(李悝)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그 역시 적황과 마찬가지로 많은 인재를 천거했고, 특히 곡물 가격을 적정하게 책정하여
농민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적황(翟璜)은 이극에게 방금 전 위문후에게 했던 말과 위문후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한 일을 들려주고는 물었다.
"나는 주공의 뜻을 알 수 없소. 그대는 이 일을 어찌 생각하시오?"
그러자 이극(李克)이 조금 전 위문후와 같은 표정의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악양(樂羊)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오. 자기 자식의 시체를 끓인 국을 단숨에
마신 사람이 타인에게는 무슨 짓인들 못하겠소?
그대는 옛날 역아(易牙)가 자식을 죽여 제환공에게 바친 일을 알고 있겠지요?"
"하지만 관중(管仲)은 역아를 믿을 사람이 못 된다고 끝내 제환공에게 천거하지 않았소이다.
악양(樂羊)도 바로 그와 같은 경우가 아니겠소?"비로소 적황(翟璜)은 크게 깨달았다.
70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