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방의 진주 대련(大連)을 다녀와서
인터넷신문 한국푸른쉼터신문 http://www.kgatimes.or.kr/ 편집부
ETC두레환경 대표 한원일
최고의 삶을 살기위해
하나의 마음으로 끝까지 정진한다
지난 8월 5일부터 9일까지 4박 5일간 중국 동북 3성(요령성, 흑룡강성, 길림성)의 물류 거점 도시이며 제2의 홍콩을 꿈꾸고 있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 대련을 다녀왔다.
방문 취업제 실시 이후 중국 동포가 대폭 늘어나면서 국내 최초로 『귀국 동포 휴게실』을 운영하여 사회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대인훼리주식회사 (공동대표이사 한준규, 서아주)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가능하였던 이번 여행은, 새로 시작할 중국 동포 취업 주선 사업(남동 공단, 시회공단, 안산공단에 전문 기능직 인력 수급) 과도 맞물려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간 큰 의미가 있었다.
물론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하게 된 딸 수아에 대한 배려도 있었지만, 북방의 진주 대련 여행은 내게 큰 경제적 가치를 발견하고 역사적인 안목을 갖게 해 주었다.
인천 제1국제터미날에 도착하니 대인훼리(주)의 여러분들이 직접 나오셔서 안내해 주셨다. 비자를 받고 환전을 마친 후 차를 한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출입국사무소를 거쳐 일착으로 배에 오르니 유니폼을 입은 여승무원이 우리 딸에게 축하의 꽃다발을 전하였다.
특별식으로 저녁을 먹고 나서 잠자리와 갈매기가 여유롭게 나는 배 위를 많은 동포들과 어울려 거닐었다. 사무장님의 안내로 브릿치에 오르니 선장님과 항해사님들이 저녁 노을속에서 어떻게 배를 운항하는지 설명해 주셨다.
한국해비타트의 일원으로 몽골 테를지에 간 아들 수빈이가 울란바토르엔 도착했는지 걱정되었지만, 오랜만에 딸과 함께 선상 침대에 누우니 수아는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배멀미도 잊은 채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배에서 내리자 대인훼리(주) 현지 직원이 마중을 나왔다. 문원(文園)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렌트한 차를 타고 중국어, 한국어에 능통한 한국부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첫 관광지 노호탄 공원(한 청년이 인어를 습격한 호랑이를 퇴치하고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해안 공원)을 향했다. 공원명칭의 유래를 몰라 그냥 따라 다니다가 인어상을 보았고, 수족관을 돌다가 시간이 되니 공연을 보러가야 된다고 하여 급히 2층으로 올라 수많은 인파가 자리잡고 있는 공연장에서 돌고래 쇼를 보게 되었다. 희고 큰 돌고래와 다리밑으로 입장한 여조련사가 수중에서 펼쳐보이는 동물과 인간의 유영(遊泳)이 환상적이었다. 성해(星海)광장에서 해안 도시 대련의 위용을 나타내는 빌딩 숲과 최근 가격이 상승했다는 아파트를 구경하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 옆으로 다니는 말이 끄는 차를 보았다.

중국적인 것이 보고 싶다하여 자연사 박물관을 급히 갔는데 올림픽 관계로 4시 이후에 입장이 불가능하다 하여 러시아 거리를 찾았다. 한 시간 이상 가이드 언니의 도움을 받아가며 우리 딸이 쇼핑을 하였다. 나는 물건을 골라 흥정을 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동생에게 주겠다고 고른 160원 짜리 루이뷔똥 짝퉁 지갑이 결국 40원에 손에 들어오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선물을 해야 한다며 10원, 15원 짜리 머리핀과 시계를 사기도 했다.
호텔앞 중국 식당에서 냉채와 닭고기 요리를 먹고 방에서 쉬고 있는데, 출국 전에 대학 후배가 소개했던 대련에서 3년 전부터 사업을 하고 있다는 이00 사장한테 연락이 왔다. 나는 딸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를 만났다. 아홉 시가 넘은 시간이어서 마땅한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는지 이00 사장은 운전기사와 함께 주점을 찾느라 애를 썼다. 38 광장이라는 곳에서 겨우 한식집을 찾았다. 한국 소주를 앞에 놓고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테리어 사업을 하고 있다는 그분은 반갑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는지 두 번째 만남에 불과한데도 깊은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일은 많이 따는데,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 고 하여 한국에서 인테리어 업에 종사하고 있는 경영인들과 대화를 해보겠다며 일어섰다. 이때 식당 주인이 들어와 합석하였다. 자금이 일시 경색되어 식당까지 열게 되었다는 그는 주업이 방역사업이었다. 끝으로 [중국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에 젖어 있으며, 정치적으로만 사회주의다] 라는 박00 사장의 4년 중국 경함담을 듣고 자리를 떴다.

이튿날 아침 나는 한국 식당 진고개를 찾아나섰는데, 아침 여섯시에 개점한다는 그곳은 아직 열지 않아 먹을 만한 한식당을 찾다가 딸과 함께 길을 잃었다. 노점에서 말라탕을 먹는 중국인들을 보며 오른쪽으로만 계속 돌았는데 원점이 나타나질 아니하였다. 결국 허름한 뒷골목에서 출발하는 버스 안내원에게 우리 딸이 서툰 중국말로 묻고 나는 한자로 문원 호텔을 적어 안내를 받았다. 수산 시장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골목을 지나 몇 번을 돌자 묶고 있는 호텔이 나타났다.
휴대전화가 울리더니 베이징 대학에 다닌다는 이00 사장의 따님이 우리 호텔에 왔다. 우리 딸은 또 한 명의 언니가 생겨 너무 좋아했다. 앞좌석으로 자리를 옮긴 나는 너무나 큰 교훈을 준 자연사 박물관으로 길을 재촉하였다. 역사적인 기록과 보존을 중시하는 중국인민들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그곳에는 지하 1층에서 3층까지 지구, 지층, 자연광물과 포경에 관련된 도구와 큰 고래, 육상 동물들, 조류 박제와 공룡 자료 등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차 머리를 돌려 고구려 비사성(卑沙城)을 향했다. 수, 당나라에 걸쳐 대규모 공격을 받았던 이곳은 입구를 찾는데도 쉽지 않았다. 대련공과대학원 대학 근처에서, 운전기사가 지나가던 노인에게 한차례 물어 겨우 방향을 잡았다. 중간에 물이 시퍼런 계곡에서는 무더위에 수영복 없이 헤엄치며 피서하는 중국인들과 빨래하는 여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길가에서 수박을 파는 장사는 쪼개 놓은 수박을 먹어댔다.
복숭아나무가 많이 서있는 밭과 옥수수가 입구에서 영근 농가와 반점을 몇 개 지나자 매표소가 나왔다. 가이드가 입구에서 그림 지도를 살피더니 내게 비사성을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40원으로 입장권 4장을 사고는 5백 미터 정도 된다는 비사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파른 길이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가이드와 대학교 1학년 학생은 샌달을 벗어 손에 들고 오르고 우리 딸은 그만 가면 안되겠냐고 몇 번 간청하였다. 나도 난감해 하는데 폭이 좁은 빈차가 한 대 급경사를 오르기에 손을 흔들었더니 내 앞에 멈추었다. 히치하이킹에 성공했다며 네 명이 탔는데, 3분도 되지 않아 비사성이 보이고 점장대(点扙坮)라는 큰 망루가 나타났다. 그리고 돈을 달라는 둥근 얼굴 운전기사의 큰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20원을 주고는 된짱타이를 올랐다. 수나라, 당나라 군사들이 이곳을 점령하고자 했던 의도와 치열한 전투가 한 눈에 들어왔다.

비사성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고는 천천히 하산하였다. 매미 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작을 하던 식당 주인이 안으로 들어선 우리에게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손사래를 했다. 거의 경사가 없는 산 아래 반점에서 생채와 양고기 꼬치구이, 운전기사는 양탕과 공기밥으로 점심을 해결하였다.
거금 30원을 내고 금속탄 밀랍 인형관에 입장하였다. 등소평도, 장택민도, 주은래도, 모택동도, 유소기도, 대처 수상도, 빌게이츠도 보기만 하고 나와 금속탄 해수욕장에서 잠시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님의 혼이 서려 있는 여순감옥을 끝내 가보지 못하고 관광을 마치었다. 저녁 때 본가에서 대인훼리(주)에서 베푸는 만찬이 있었다. 이00 사장님 내외와 따님이 합석하고 부임한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화운부(貨運部) 이00 차장님이 주관하였다.
두 사람을 소개하여 앞으로 대련 동포사회에서 도움을 주고받기를 기원하였다.
마지막 날 이차장님의 안내로 발 맛사지를 받고는 승리광장에서 쇼핑 후 승선하였다.

오후 8시 ‘중국 100년의 꿈’인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이 브라운관으로 중계되었다.
중화(中華) 부흥의 드라마인 개막식은 예술공연을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하였는데, ‘찬란한 문명’과 ‘환희의 시대’를 두 주제로 1만 5000여 명의 군무가 펼쳐졌다.
천하를 호령했던 “강한성당(强漢盛唐-강한 한나라와 성세의 당나라)” 시대로 회귀하고자 하는 중국의 기대가 엿보였다.
대한민국 선수들이 입장하자 피곤한 눈이 감겼다.
다음 날 눈을 뜨자 인천대교 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
ETC두레환경 대표 한원일
최고의 삶을 살기위해
하나의 마음으로 끝까지 정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