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의 업적이라면 몇 가지가 있다고 전 봅니다. 우선 말 그대로 방어전 일변도 백제가 그나마 공세도 할 수 있는 군사력으로 재편에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관산성에서 대패한 이후, 51년간 백제와 신라가 전면전을 한 적은 한번도 없을 정도로 백제는 신라에게 승률 0%를 자랑했죠. (위덕왕 때 2차례 국경전투에서 모두 대패) 그런 신라에게 작으나마 승리를 조금씩 얻어낸 거 자체로 엄청난 내적 정치효과를 누린것은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마침 친 백제계 (소가가문)이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일본과의 관계를 확실히 백제동맹권내로 끌어들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라의 전선이 한강-추가령구조곡의 대 고구려 전선, 소백산맥과 평택만선의 대 백제전선, 한반도 동해,남해안의 대 일본전선 3개로 늘어났다는 점도 들 수 있겠습니다. (신라의 전력분산도가 이시기 최악으로 전선이 확대되어버립니다)
사실, 삼국사기의 그 원본을 읽어 봐도, 유흥에 심취하였다기 보다는, 왕권의 위상을 높이고 그만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에 배를 띄워 들어가고, 크고 위엄있는 건물을 축조한 단면이 말년에 이르러 많이 나오긴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사치를 일삼았다든지 백성이나 귀족들의 지지를 잃을 만한 우매한 짓을 고집했다든지 하는 식의 표현은 아닙니다. 단지 그 풍류의 빈도가 좀 잦았을 뿐이죠.. 기록 보면 아시겠지만 그 간격은 몇 개월씩입니다. 언제부턴가 무왕이 말년에 국력이 기울 정도의 사치를 부렸다는 왜곡된 내용들이 나오던데; 전 그 점을 더 이해 못하겠더군요
백제말기의 기록들은 신라의 개입때문인지 조금 믿지 못할 구석들이 여러모로 보입니다. 무왕, 의자왕의 경우는 왕권을 급성장시킨 분들이죠. 의자왕 말년엔 거의 독재정치까지 할 정도였죠. 그앞에 있던 왕들의 미약한 왕권에 비하면 엄청난거죠. 그러한 자신감이 궁궐증축과 대규모 연회로 보여지는것이죠. 또한 저는 대수대당과 고구려의 양다리외교는 무왕의 유연한 외교술을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첫댓글 의자왕의 대대적인 반격은 무왕 대의 중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무왕은 국력을 착실하게 다져서 성왕 전사 이후 신라에게 열세에 놓였던 백제의 국력을 역전시켜 놓았죠.
백제무왕의 평가는 본문에서 잘 설명되어 달리 이견이 없습니다..공감하니다.
하니다 ^^;; 이젠 이런 오타도 보다 보면 디시체처럼 느껴집니다.. 힛 재미있습니다.
헉~ 합니다의 오타가 확실합니다...ㅎ.ㅎ..그러니다(그렇습니다), 하니다,등등....이거 경북 안동지방 방언과 유사하네요....
무왕의 업적이라면 몇 가지가 있다고 전 봅니다. 우선 말 그대로 방어전 일변도 백제가 그나마 공세도 할 수 있는 군사력으로 재편에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관산성에서 대패한 이후, 51년간 백제와 신라가 전면전을 한 적은 한번도 없을 정도로 백제는 신라에게 승률 0%를 자랑했죠. (위덕왕 때 2차례 국경전투에서 모두 대패) 그런 신라에게 작으나마 승리를 조금씩 얻어낸 거 자체로 엄청난 내적 정치효과를 누린것은 사실입니다.
관산성 전투 이후 백제가 한번 이깁니다. 보통 체면 치레로들 많이 알고 있지만... 그리고 그 이후 두어번의 소규모 국지전 말고 무왕 전 대까지 백제와 신라간의 전쟁은 없죠.. 언제 대패를 했다고 나옵니까? 위덕왕 대 뒤져 봤는데 그런 적 없던데요..
그리고 내정에 상당히 신경쓴게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전쟁을 하더라도 국력에 맞는 소규모 충돌을 자주 일으켜서 신라의 피로도를 누적시켰다는 점입니다. 40년간 꾸준하게. 아마 그 정도 끈기는 삼국시대 전체에도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두 번째는 마침 친 백제계 (소가가문)이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일본과의 관계를 확실히 백제동맹권내로 끌어들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라의 전선이 한강-추가령구조곡의 대 고구려 전선, 소백산맥과 평택만선의 대 백제전선, 한반도 동해,남해안의 대 일본전선 3개로 늘어났다는 점도 들 수 있겠습니다. (신라의 전력분산도가 이시기 최악으로 전선이 확대되어버립니다)
반면 단점으로는 말년에 대규모적인 궁궐이나 정자 등 유흥에 너무 심취해서 완전한 성군으로 보여주는데 실패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대수,대당 외교에서 이중적인 자세를 취해서 특히 당의 대 백제관을 좋지 않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삼국사기의 그 원본을 읽어 봐도, 유흥에 심취하였다기 보다는, 왕권의 위상을 높이고 그만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에 배를 띄워 들어가고, 크고 위엄있는 건물을 축조한 단면이 말년에 이르러 많이 나오긴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사치를 일삼았다든지 백성이나 귀족들의 지지를 잃을 만한 우매한 짓을 고집했다든지 하는 식의 표현은 아닙니다. 단지 그 풍류의 빈도가 좀 잦았을 뿐이죠.. 기록 보면 아시겠지만 그 간격은 몇 개월씩입니다. 언제부턴가 무왕이 말년에 국력이 기울 정도의 사치를 부렸다는 왜곡된 내용들이 나오던데; 전 그 점을 더 이해 못하겠더군요
백제말기의 기록들은 신라의 개입때문인지 조금 믿지 못할 구석들이 여러모로 보입니다. 무왕, 의자왕의 경우는 왕권을 급성장시킨 분들이죠. 의자왕 말년엔 거의 독재정치까지 할 정도였죠. 그앞에 있던 왕들의 미약한 왕권에 비하면 엄청난거죠. 그러한 자신감이 궁궐증축과 대규모 연회로 보여지는것이죠. 또한 저는 대수대당과 고구려의 양다리외교는 무왕의 유연한 외교술을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