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障碍)가 바로 부처
일과 수행 중에 오는 장애를 수행으로 돌려라.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통하는 것이요 통함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것이니,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저 장애 가운데서 보리도(菩提道)를 얻으셨느니라.
세상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만일 먼저 역경에서 견디어 보지 못하면 장애가 부딪칠 때
능히 이겨내지 못해서 법왕의 큰 보배를 잃어버리게 되나니, 역경을 통하여 부처를 이룰지로다.
- 보왕삼매론 -
역경을 통하여 부처를 이루라…
이 거룩한 말씀은 늘 나의 마음을 흠뻑 적셔줍니다.
나날이 행복하지만은 않은 일상을 도리어 더욱 값진 행복으로 되돌려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나날이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나아가는 일상이 늘 걸림 없이 뻥 뚫리길 바랍니다.
그러다가 장애가 올 때 한없이 괴로워하고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며
때로는 크게 좌절하기도, 포기하기도 합니다.
장애가 바로 부처이며 괴로움의 경계가 바로 부처 되는 경계임을 알지 못합니다.
죽기 싫어하는 우리의 마음. 그러나 죽지 않는 영원한 삶을 준다고 하면 덥석 붙잡을 수 있을까요.
남들은 다 늙어 가는데 주위는 모두 변해 가는데
나만 죽지 않고 늙지 않고 늘 그대로 생생하다면 그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친구들이며 사랑하는 여인이며 부모님 모두가 늙어 가는데 홀로 젊음을 즐길 수 있을까요.
오히려 늙고 죽어 가는 모습이 부러울 것입니다.
늙어 가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은 사실 자연스러운 인연의 흐름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변화나 인연의 나타남을 “역경”이라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마장(魔障)입니다.
역경의 나타남 또한 미리 지어 둔 업식(業識)의 과보(果報)일 뿐입니다.
자신이 지어 둔 악한 행위에 대한 정당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중생의 경계에서 “역경”은 괴로움의 대상이지만,
수행자에게 “역경”은 다스릴 재료, 수행의 재료에 불과합니다.
지어 둔 업식(業識)을 닦을 소중한 기회입니다.
이렇듯 막힌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소중한 뚫릴 기회이며,
잘 된다고 안주(安住)할 때가 가장 막히기 쉬울 때입니다.
그 마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역경도 순경이 될 수 있으며 순경도 역경이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또한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인생의 역경이 없었다면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땅히 깨침을 구하고자 하는 수행자라면 역경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마장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역경이나 마장은 부처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역경과 나를 둘로 보지 않고 내 안에서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당당히 떳떳이 맞설 수 있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역경을 미워할 필요도 없으며 가슴 아파하거나 괴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와 둘이 아니라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으로 사랑하는 가운데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심(嗔心)과 분심(忿心)으로 화를 내며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기에 나무라는 부모의 마음처럼 그렇게 모든 분별심을 놓고 싸우는 것입니다.
역경을 견디어 보지 못한 사람은 즐거운 경계가 오더라도 바로 맞아들일 수 없습니다.
역경과 순경은 그 뿌리가 하나이기에 역경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자만이 순경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역경을 견디어 보지 못하면 더 큰 장애가 왔을 때 결코 이겨낼 수 없습니다.
역경을 이겨낸다는 것은 내면의 힘과 수행력을 키워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경을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입니다.
절하고 염불하고 독경하는 것이 소극적 수행이라면
역경과 순경을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이며 적극적 수행이요 생활 속의 수행입니다.
일을 하는 중에, 수행하는 중에 장애가 온다면 마땅히 수행으로 돌릴 일입니다.
밖에서 오는 일체 모든 경계 또한 실제로는 내 안에서 오는 경계이기에 나를 닦을 일이지
경계나 장애 탓으로 돌릴 일이 아닙니다.
가만히 돌아온 삶을 돌이켜 보면 어떻습니까.
괴로운 일들, 온갖 장애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어요?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런 모든 괴로운 일들로 인해
지금의 나는 이만큼 성숙해지고 나를 이끌어 온 소중한 공부였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경계라도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경계가 아닌
우리를 이끌어 주고, 성숙시켜 주고, 진화시켜 가려는 소중한 공부의 재료일 뿐입니다.
내가 이겨내지 못할 경계라고 하는 것은 아예 이 세상에 있지도 않으며, 내 삶에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내 앞에 나타난 그 어떤 경계라도 그것은 내가 이겨낼 수 있고,
그 경계를 통해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소중한 공부일 뿐입니다.
역경과 장애야말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가장 큰 스승이지요.
역경이나 마장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우리 생각처럼
어떤 실체가 있어서 우리를 괴롭히려고 찾아오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역경도 마장도 다 내 마음의 나타남일 뿐입니다.
무섭다거나, 괴롭다거나 하는 그런 고정된 실체적 성품이 있어서
나를 괴롭히고 겁주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연 따라 잠시 꿈처럼, 환영처럼,
물거품처럼 우리 마음의 그림자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 마장이 오더라도, 귀신이 덮치더라도 그 어떤 괴로운 역경이 나를 괴롭힐지라도
결국엔 내 마음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그러니 거기에 놀아나서 휘둘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론일 뿐, 실제로 역경 속에 빠져 있을 때는 도무지 헤어나지 못할 것 같고,
도저히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을 것처럼 괴롭단 말입니다.
도저히 그 순간은 한 턱을 넘어설 길이 보이지를 않아요.
그래서 더욱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보다 넓게 볼 수 있어야 하고,
더 명확하게 실상을 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계속 빠져 있지 말고 그 밖으로 빠져나와 훤칠하게 넓은 시선으로 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 길은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역경이라도 길은 있어요.
우리가 이겨내지 못할 일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공연히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경계에 빠져,
꿈같은 허깨비 놀이에 빠져 언제까지 발버둥 치고만 있을 것입니까.
나도 공하고 경계도 공하고 작용 또한 공한 것입니다.
공한 가운데 인연 따라 꿈처럼 일어나는 걸 역경(逆境)이다. 순경(順境)이다.
분별해서 스스로 빠지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턱 놓고 가면 꿈을 깰 수 있습니다.
공연히 경계에 놀아나지 않고도 시원스레 갈 수 있어요.
본래 자리, 자성 부처님 굳은 중심을 잡고 다 놓아버리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아갈 일입니다.
역경과 장애를 능히 이겨내면 법왕의 큰 보배를 얻게 되나니,
역경을 통하여 부처를 이룰지로다 라고 했습니다.
역경과 장애를 능히 이겨내었을 때 그 경계가 소중한 깨달음의 씨앗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역경을 도리어 부처님의 큰 보배로 돌이킬 수가 있는 것이지요.
역경을 통해서 부처를 이룰 수 있습니다.
마냥 기쁘고 즐거운 순경 속에 도리어 마장은 터를 잡고 앉는 것입니다.
순일하게 일이 잘 풀려나갈 때를 조심하고,
역경으로 힘겹고 어려울 때 도리어 당당하게 나아갈 일입니다.
- 법상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