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16](수) [동녘이야기] / [동녘글밭] 사(私)가 공(公)이 되었을 때
https://youtu.be/6Yn8_dwWm7o
어제는 나와 우리를 구분하고, 나와 우리에서 비롯된 힘을 들여다 보았읍니다. 그 시작을 뜯어 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나’에서 비롯된 것들이 점차 ‘우리’로 넘어가면 상황은 크게 달라집니다.
사(私)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공(公)으로 넘어가면 그 전체가 크게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사사로운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영역이므로 공공의 힘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공공의 권력으로요. 바로 이 자본권력과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이 그렇습니다. 특히 언론권력은 입법권력, 행정권력, 사법권력에 이어 제4의 권력으로까지 볼 정도니까요. 그만큼 막강한 힘을 발휘하여 때로는 나라를 뒤흔들 정도입니다.
따라서 제4의 권력으로 보는 것은 한편으로 타당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특성은 이 언론권력 뿐만이 아닙니다. 자본권력도 그리고 정치권력도 엇비슷합니다. 힘이 커져 공공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나라의 틀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게 되어 제5, 6의 권력이 됩니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것이 공공성(公共性)입니다.
힘이 작을 때는 그냥 자본가로, 정치인으로 보고, 그냥 그렇게 부를 뿐입니다. 하지만 힘을 행사하게 되면 상황은 크게 달라집니다. 사(私)에서 공(公)으로 바로 바뀌어 더욱 공공성(公共性)이 강조됩니다. 결국, 조화와 균형의 한 축으로 작용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전체인 ‘우리’가 살고, 그래야 개인인 ‘나’가 삽니다.
이처럼 이 ‘나’와 ‘우리’의 문제는 참으로 쉽지가 않습니다. ‘나’를 넘어 ‘우리’로 넓히면 그것은 어느덧 ‘문화’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다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나‘에서 ’우리‘를 느낄 때 ’기쁨‘이 생깁니다. 여기에서 ’느낌‘으로 생기는 것이 바로 ’하나’입니다. 각자가 서로 다른 데, 그 다른 데서 출발을 했는데 어느덧 다르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그 느낌은 노래로, 춤으로 드러납니다. 손짓, 발짓, 몸짓으로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점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 문화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우리 엄마요, 우리 집이요, 우리 나라입니다. 그래서 싹튼 것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이요, 그것을 위해서 재세이화(在世理化)한 것으로 여깁니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누리의 꿈이 ‘홍익인간’으로 압축된 것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연 것이 ‘나라‘인데 그것은 바로 환한 빛의 나라인 환국, 배달, 조선으로 보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이 자주 쓰는 ‘대동세상(大同世上)’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동세상을 열어 가느냐 하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억강부약(抑强扶弱)입니다. 힘센 것은 누루고, 약한 것은 힘을 북돋우어 고르게 잘 사는 우리네 꿈을 함께 이루어가자는 것이지요. 크게 보면 다 같은 ‘우리들’이므로 ‘고루 잘 사는 꿈’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수은 최제우의 가르침도, ‘동학의 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문제의 시작은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은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 자신을 망치게 하는 생각입니다. 갈등이 생기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결국, 평화는 깨어지고 마니까요.
이런 생각으로 오늘도 고마움을 채우며 힘차게 그 오늘을 열어 갑니다. 정말, 고마워요.
첫댓글 오늘의 글밭 제목은 '사(私)가 공(公)이 되었을 때'입니다.
어제의 글밭에 이은 글밭의 성격을 가지고 있읍니다.
어제의 글밭에서 아쉬운 점이 있어서 덧붙인 것입니다.
거기에 저의 생각을 담았읍니다.
그래서 담은 것이...
‘나‘에서 ’우리‘를 느낄 때 ’기쁨‘이 생긴다는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대동세상인 공동체를 이야기했고,
그래서 '억강부약'이라는 방법론도 말씀을 드렸지요.
기회가 되시면 한번, 살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