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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4. 연중 제 15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께서는 세상(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일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만약 밤하늘에 별들이 백 년에 한 번만 나타난다면, 우리는 모두 별들이 나타나는 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것입니다. 사실 어떤 천문학자들은 우주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먼 훗날 언젠가는 별들이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맨눈으로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지금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별들이 서로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이 별들을 총총히 모여 있는 것처럼 보는 것은 이 지구가 그 별들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 은하 바로 옆의 이웃 은하인 안드로메다 은하는 우리 은하로부터 250만 광년 떨어져 있다고 하는데, 그 사이에는 어떤 별도 행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안드로메다 은하를 하나의 별처럼 다른 모든 별들 사이에 총총하게 떠 있는 수많은 별들 중 하나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익숙함은 실재의 본질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신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신은 그냥 여태까지 익숙해져 있는 것만을 실재라고 여기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표현하는 대로 우리의 정신은 "관성의 법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정신은 익숙해져 있는 것의 겉만을 바라볼 뿐 내면의 깊은 본질을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티로와 시돈 지방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들과 기적들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그들은 눈을 떴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장 큰 은총을 체험했던 이 도시들은 그분이 일으키신 놀라운 일들의 더 깊은 의미를 바라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정신이 지금까지 자기들에게 익숙해져 있는 것들에 쏠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깊이 깨달았듯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온 우주의 모든 존재는 하느님의 자취와 얼을 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존재는 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신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에는 그 예술가의 얼이 들어 있다고 우리는 믿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나벤투라 성인은 이 세상 안에는 하느님 삼위일체의 자취가 들어 있다고 확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정신의 익숙함으로 인해 이런 진정한 현실을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서로 안에서는 물론이고 세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내어 주시는 공짜의 선물들을 미쳐 알아보지 못하고 살아가는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니 지금 영의 눈을 뜨고 우리 주변의 우리 형제자매들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존재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도록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주 새로운 국면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랬고, 다른 많은 성인과 신비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영의 눈으로 바라보려면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방식으로만 바라보려는 우리의 정신을 깨우는 것에서 그 첫 걸음을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서로에게 자기 사랑을 놀랍게 보여주려고 뜻밖의 선물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처럼,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뜻밖의 은총과 선물을 주시기도 하고,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자리와 상황 속에 그것을 감추어 두시기도 합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며, 그 놀라움 안에서 당신의 현존과 섭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나자렛은 가장 뜻밖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나타나엘도 이렇게 말했던 겁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그리고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이방인(뜻밖의 것들의 상징) 점성가들은 멀리서 와서 경배드렸지만, 동족(익숙함의 상징)인 헤로데는 그분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뜻밖의 것들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인 로마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고(마태 8,10),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마태 15,28). 또한 율법학자에게는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여겼던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0,37).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소외된 세리와 죄인들과 벗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행적은 거의 모두가 예상 밖이었고, 당시 종교 권위자들은 그분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분을 알아본 순간, 그분을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온전한 감각 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눈앞에 있는 것을 제대로 보고 듣고 느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 4,9.23; 7,16; 마태 11,15; 루카 8,8; 14,35)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많은 소리와 영상에 둘러싸여 있어, 대부분을 걸러내야만 합니다. 우리의 모든 감각들이 속임수에 넘어가기 쉬운 아주 위험한 시대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정신을 깨워 새로운 눈으로, 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것들 안에 우리를 너무도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선물들을 수없이 감추어 두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하느님의 외아드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당신과 하나이신 분)을 우리에게 내 주실 만큰 우리를 너무나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부터 믿는 것이고, 또 그 하느님께서 우리가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당신의 놀라운 현존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미리 마련해 주시는 놀라운 선물들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그러므로 더 나아가서는 영의 눈을 떠서 이 현실 안에 있는 선물들을 바라보고, 또 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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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4. 연중 제 15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키를 낮춰야만 천국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의 여정이 계속됩니다. 주교좌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성당의 구조가 게르 형태입니다. 주임 신부님이 콩고 출신 콘솔라타 수도회 소속 신부님인데, 아주 친절하게 환대해주셨습니다. 미사후 살레시오회 몽골 지부장 최원철 티모테오 신부님의 대성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대성당 중앙 제대 오른편에 작고 소박한 목각 성모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사연을 들어보니 참으로 특별했습니다. 다르항 성당 근처 쓰레기 야적장을 터전삼아 어렵게 살아가시던 할머니 한분이 하루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특별한 형상을 한 목각 인형을 발견했습니다. 범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집에 가져와 장롱 속에 고이 모셨습니다. 어느날 사랑의 선교 수녀회 수녀님들이 그 할머님 집을 방문하셨는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장농을 열어 보여드렸더니 수녀님들 보기에 성모상이 틀림없었습니다. 그 소식이 몽골 지목구장 조르지오 추기경님 귀에 들어갔는데, 추기경님은 그 성모상을 대성당 제대 옆에 모셨습니다. 성모상을 최초 발견한 할머님은 후에 세례를 받고 열심한 신자가 되었답니다. 2023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몽골을 방문하셨을 때 그 할머님은 주교좌 성당 바로 옆에 특별히 마련한 전통 게르 안에 전통 복장을 한 채 교황님을 맞이하는 특별한 임무를 맡으셨습니다. 전통 게르의 출입문은 아주 낮습니다. 키를 낮추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티칸 시국의 최고 수반이며 가톨릭교회 최고 목자이신 교황님이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고개를 크게 숙이시어 게르에 들어오신 후 할머니와 친밀하게 인사를 나누시는 모습은 당시 몽골 국민에게 크고 신선한 충격을 남겼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오후나 흐렐수흐 몽골 대통령을 만난 뒤 방명록에 평화의 순례자로서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젊고 고대적인, 현대적이고 전통이 풍부한 나라를 찾아오게 되어 기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너무나 따뜻하고 소탈하며 인간미 넘치는 모습에 몽골 대통령은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황님께서 선종하신 후 유럽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만사 제쳐놓고 그분께서 묻혀 계신 로마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찾아 참배했습니다. 주교좌 성당 바로 옆에 살레시오회 몽골 지부가 위치해 있습니다. 6명의 형제가 공업학교와 오라토리오,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을 위한 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멀리 한국에서 피정객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송구하게도 여름 캠프 중이던 아이들이 인사하러 왔습니다. 얼굴들을 보니 8-90년대 제가 돌보던 우리 아이들의 얼굴과 흡사해 깜짝 놀랐습니다. 앳되고 순박한 아이들이 저희를 위해 노래까지 한 곡 불러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강력한 어조로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순례 기간 중에 회개가 무엇인가 많이 묵상했습니다. 좁디 좁은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것이 회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정 관념의 틀을 과감히 깨고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회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보다 경제력이 약하다고 무조건 아래로 보고 불쌍히 여기는 의식을 버리는 것이 회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만, 우리 가족만, 우리 국민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웃 나라, 가난과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이웃 나라도 내 일처럼 안타까워하고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참된 회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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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4. 연중 제 15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0-24)> 1) 이 말씀은, 죄인들이 당하게 될 심판과 멸망을 예언하는 말씀이 아니라,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는 “고을들에 있는 죄인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입니다. 어떤 고을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의인이 심판과 멸망을 당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만 꾸짖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 전체’를 꾸짖으신 일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은,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려 주셨지만, 그 은총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로 해석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에는 차별 대우가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차별적으로 특정 고을들에서만 기적을 많이 일으키신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셨지만 그것을 스스로 버린 어리석은 사람으로 솔로몬 왕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흔히 생각하는데 사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다. 그의 마음이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그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시어, 이런 일, 곧 다른 신들을 따르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도, 임금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1열왕 11,9-10).” 솔로몬의 지혜와 분별력은 원래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1열왕 3,12). 그런데 말년에 우상숭배에 빠짐으로써 하느님을 배반했고, 지혜와 분별력을 잃었습니다. 우상숭배에 빠진 것 자체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끝까지 지키지 않고 버린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2) ‘벳자타 못 가의 병자’도 그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14-16).” 그 병자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신고한 일은 분명히 ‘배은망덕’입니다. 긴 세월 동안 앓고 있던 중병을 고치고 건강하게 되었다는 기쁨보다 안식일을 어긴 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배은망덕입니다. 따라서 그는 몸은 건강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구원의 반대쪽으로 간 사람입니다. <배반자 유다도 사도로서 받은 은총들을 스스로 버리고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점에서 역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회개는 원래 은총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은총을 받은 줄 모르는 사람들이거나, 알지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뭔가 아쉬운 일이 생기면 주님을 찾고, 주님께 애원하다가, 그 상황이 지나가면 주님께 감사드리지도 않고 그냥 주님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자기가 주님께 청하는 것을 자신의 권리로, 또 그 청을 들어 주는 것을 주님의 의무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자기는 은총을 받은 적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주님께서 은총을 주셔도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모습들은 전부 다 어리석은 모습이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지금 계속 반복되고 있는 ‘어리석음’이라는 말은, 머리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고 죄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심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만 욕심내는 탐욕 등을 버리지 않는 것이 그 원인일 텐데,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일은 남이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일이고, 본인이 스스로 크게 깨달아야 하는 일입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보면, 그 부자는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나중에 깨닫게 되는데, 그것을 깨달은 때는 너무 늦은 때였습니다(루카 16,27-28). 저승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깨닫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고, 절망과 후회만 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꾸짖으시는 것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회개하라고 타이르시는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