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의 기도문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이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 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의심부터 내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겟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사나 죽으나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업에는 물론 전도활동에도 열심을 내었다.
1883년 여름과 이듬해, 즉 신학교 마지막 해에 그는 뉴 저어지(New Jersey) 주 폼턴(Pomton)에 있는 교회를 맡았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선교사의 비전을 갖게되었고 1884년 11월 목사안수를 받고 뉴욕 시에 있는 한 교회의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인도선교를 위하여 의학을 1년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는 엘린우드 박사의 지원과 '맥윌리암스'의 기부(6천달러)로 1884년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목회선교사(Clerical Missionary)로 파송되었다.
언더우드는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월 25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한국 사회가 갑신정변으로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에 우선 정박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헵번(I, C, Hepburn) 박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선교사업에 필요한 훈련을 받는 한편 미국 선원들을 위한 전도집회를 열었고, 이수정에게서 2개월간 조선말을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한국으로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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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선교사입니다. 선교 초기 그의 흔적이 묻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그는 한국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양화진 언더우드가의 가족 묘역에는 4대에 걸쳐 모두 7명이 묻혀 있습니다.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기독교 전파가 불법인 상황에서도 언더우드는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북한지방으로 여러 차례 전도여행을 가서 그 곳에 있던 많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세례 신청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은, 로스 선교사와 한국인들에 의해서 만주에서 번역된 신약성경이 북한지방에 두루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더우드는 8살 연상의 릴리아스 호튼과 서울에서 결혼하였는데, 이들은 신혼여행조차 전도여행으로 다녀올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습니다. 언더우드는 의주에서 세례문답을 통과한 33명의 남자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 땅에 가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들 신혼부부는 1600Km 이상을 여행하였고 600여명 이상을 치료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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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는 미국으로 돌아가 안식년 기간을 보내는 중에도 강연과 신학교 방문 등을 통해서 직접 후배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에비슨, 무어, 레이놀즈, 테이트, 리 등이 언더우드의 영향으로 한국에 온 선교사들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국선교사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언더우드 타자기의 소유자이던 언더우드의 형 (존 토마스 언더우드, John T. Underwood)이 재정을 지원한 덕분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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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는 초대 성경번역위원장을 맡은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위원장으로서의 그 책임을 다 하였으며, 한국에 오게 될 선교사와 외국인들을 위해서 손수 영한사전, 한영사전, 한국어문법서들을 만들어 직접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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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는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 교회의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조선기독교대학'(나중에 세브란스 의대와 합해져서 연세대학교가 됨)를 설립해서 초대학장을 맡는 등 한국 대학교육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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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2세는 아버지를 이어서 조선기독교대학의 3대 교장으로 학교의 발전에 공헌하였고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민간고문으로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언더우드 3세도 연세대학교의 교수와 이사로 봉직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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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