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576
5월1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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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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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dh5kpgnYs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김윤재 헨리코(태릉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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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충실히 살아온 삶의 흔적!>
거룩한 수녀님들 연피정을 동반해드리고 있습니다. 시작부터 마침까지 대침묵 속에 피정이 진행되니, 시간이 정말 느리게 가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선물처럼 주어진 여유로움에 감사하며, 정말 오랜만에 제 발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비롯해서 몸 전체는 매일 뽀득뽀득 씻고 관리를 하는 편이지만, 잘 보이지도 않고, 늘 가려져 있는 발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오늘 자세히 보니, 정말이지 발에게 미안했습니다. 보기가 흉할 정도였습니다.
매일 바쁘게 오르락내리락, 달리다시피 살아오다 보니 발바닥은 굳은살이 깊이 박히고, 뭐 한번 제대로 발라준 적이 없다 보니 부르트고 갈라져서 참 보기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결코 부끄럽지는 않았습니다. 나름 열심히 살아온 흔적이로구나. 백방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닌 흔적이로구나, 하는 마음에 기뻤습니다.
한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였습니다. 신자들 대부분이 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들과 농사짓는 농부들이셨는데, 영성체 때 펼친 손을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고된 일에 손이 너무나 거칠고 투박했습니다.
사고를 당했던지 손가락 한두 개가 없는 분들도 꽤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끄러워하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열심히 살아오신 흔적이요, 박수받으셔야 마땅한 훈장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노동절인 동시에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입니다.
의아해 하실지 모르겠지만 노동에도 영성이 있습니다.
‘노동의 영성’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사용하신 용어입니다.
‘노동의 영성’, 그 핵심은 아주 쉽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창조주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열심히 노동하셨던 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출가하시기 전까지 양부 요셉을 따라 장인(匠人)으로서 매일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며 사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나갈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나갑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창조사업을 계승합니다. 따라서 오늘 노동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하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가치 부여입니다. 그 어떤 일에 종사하든 자신의 일에 중요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자긍심을 지녀야 합니다.
오늘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을 맞아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 노동자 성 요셉의 전구에 힘입어 은총 충만한 하루, 새로운 에너지를 충만히 부여받는 행복한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모든 일들, 세상을 위해,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임을 확신하십시오. 어려운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매일 되풀이하는 이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내가 성화되며, 내가 하느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는 의식을 지니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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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2pa9sExN0q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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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싸우지 않으면 죄와 싸워야 한다>
오늘 5월 1일, 교회는 노동자 성요셉을 기념합니다.
세상도 오늘을 노동절로 지냅니다. 그런데 세상이 노동을 바라보는 방식과 교회가 노동을 바라보는 방식은 많이 다릅니다. 세상은 노동을 자주 짐으로 봅니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가능하면 적게 하고 많이 받아야 하는 것, 돈만 충분하면 벗어나고 싶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노동이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부당한 임금, 과로, 착취, 경쟁, 인간을 부품처럼 대하는 구조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죄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한 가지 결론을 너무 쉽게 내려 버렸습니다. ‘일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필요악이다. 일은 사람을 망가뜨린다. 그러니 행복은 일하지 않는 데 있다.’ 정말 그럴까요?
오늘 강론의 제목은 이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일과 싸우지 않으면 죄와 싸워야 한다. 이 말은 쉬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중립이 되지 않습니다. 밭을 가꾸지 않으면 그냥 빈 땅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잡초가 자랍니다. 방을 치우지 않으면 그냥 방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먼지가 쌓입니다. 마음도 그렇습니다. 손이 선을 만들지 않으면 상상력이 악을 만듭니다. 시간이 하느님께 봉헌되지 않으면 시간이 나를 잡아먹습니다.
일은 저주가 아니라 창조 때부터 주어진 소명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도 일하시니 당신도 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것을 가르칩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죄 이후의 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땀 흘림의 고통은 죄 이후에 심해졌지만, 일 자체는 타락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하느님을 닮기 위한 소명입니다. 다만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일은 타락의 길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일부터 말입니다.
왜 일을 하면 하느님을 닮을까요? 행복은 자존감입니다. 그런데 자존감은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라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참된 자존감은 ‘나는 하느님과 닮았어.’에서 옵니다. 하느님은 영원히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있는 부모는 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일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순명은 감상적인 순명이 아니었습니다. 책임지는 순명이었습니다. 먹이고, 보호하고, 데리고 피신하고, 다시 돌아오고, 집을 세우고, 일해서 가족을 살리는 순명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만일 요셉이 일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하느님께서 성모님과 예수님을 그에게 맡기셨을까요? 물론 하느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시는 기준은 세상의 능력주의와 다릅니다. 하느님은 부자를 고르시는 것도 아니고,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고르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은총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지만, 인간의 책임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마술이 아닙니다. 은총은 게으름을 거룩함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먼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용서받는 존재이기에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마음씨가 좋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뜻 앞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신비 앞에서 도망칠 수도 있었습니다. 헤로데의 위협 앞에서 주저앉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집트 망명 생활의 고단함 속에서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움직였습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하자 그는 일어났습니다.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하자 그는 밤에 일어나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 하자 다시 움직였습니다. 요셉의 순명은 늘 발과 손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출처: 마태 1,20-24; 마태 2,13-23)
사랑은 감정만으로 사람을 지키지 못합니다. 사랑은 일해야 합니다. 아기를 사랑한다면 밤에 일어나야 합니다. 부모를 사랑한다면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합니다. 공동체를 사랑한다면 청소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맡겨진 일을 해야 합니다. 일하지 않는 사랑은 결국 말뿐인 사랑이 됩니다.
다윗의 이야기가 이것을 무섭게 보여 줍니다. 성경은 다윗의 죄를 소개할 때 이상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해가 바뀌어 임금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뭅니다. 그는 저녁때 잠자리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밧 세바를 봅니다. 그리고 죄가 시작됩니다. 간음, 거짓말, 살인, 은폐. 한순간에 무너진 것 같지만 사실 그 시작은 눈이 아니었습니다. 시작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싸워야 할 전쟁터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싸우지 말아야 할 욕망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졌습니다. (출처: 2사무 11장)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누워 있을 때 마음은 맑아집니까? 아니면 휴대폰을 만지며 비교하고, 불평하고, 음란한 상상에 빠지고, 남을 판단하고, 자기연민에 젖습니까?
몸은 쉬는데 영혼은 더 피곤해지는 경험을 우리는 압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은 창조하고, 돌보고, 사랑하고, 내어줍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그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성에서 멀어집니다. 저도 사실 쉬는 날도 무엇을 해야 할 지 하루 일과를 짜 놓습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선택에 먹힙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그의 단편 「악마와 빵 조각」(1886)에서 노동과 죄의 상관관계를 기막히게 묘사했습니다.
한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가진 것도 많지 않았고, 먹을 것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자기 밭을 갈았습니다. 자기 손으로 땅을 일구고, 자기 땀으로 하루를 버티는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쉬려고 밭둑에 앉아 빵 조각을 먹으려 했는데, 그 사이에 작은 악마가 몰래 다가와 그 빵 조각을 훔쳐 갑니다. 작은 악마는 기대했습니다.
‘이제 저 인간이 화를 내겠지. 욕을 하겠지. 하느님을 원망하겠지. 그러면 내가 이긴 것이다.’ 그런데 농부는 빵이 사라진 것을 보고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져간 자가 배가 고팠나 보지.” 그리고 허허 웃고는 다시 밭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합니다.
이 장면이 중요합니다. 왜 농부는 악마에게 지지 않았습니까? 빵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마음이 한가해서도 아닙니다. 그는 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오늘을 감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 요셉의 두 가지 특징은, 의로움과 일을 사랑함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가르침을 오늘의 말로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노동은 죄를 씻는 세례수와 같고, 게으름은 죄를 낳는 자궁과 같다. 일하는 손은 천사의 손이 되고, 노는 손은 악마의 놀이터가 된다. 그대가 땀 흘릴 때, 하느님께서는 그대의 땀방울 속에 당신의 은총을 섞어 주신다.”(출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창세기 강론』의 노동과 나태에 관한 교부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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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5월의 첫날입니다.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렀습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5월은 ‘성모 성월’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5월에 성모님께 사랑과 공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본당에도 5월에는 행사가 많습니다. 5월 2일은 성모의 밤, 5월 3일은 생활 성가 대회, 5월 10일은 Mather’s day, 5월 16일은 다문화 미사, 5월 17일은 청소년 음악회, 5월 23일은 꾸르실료 재교육, 5월 24일은 견진성사가 있습니다. 시편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바라 얻고자 하는 것 한평생 주님의 집에 모여 사는 것” 이런 말도 있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농부가 여름에 땀을 흘리는 것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기 위해서입니다. 어부가 그물을 던지는 것도 물 때가 맞아야 합니다. 물 때가 맞지 않으면 그물을 던져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물 때가 맞으면 힘이 들어도 힘차게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야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멋진 글이 있습니다. 제목은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입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관해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하기 위해/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대답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요즘 우리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들은 예수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어라.”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죽음도, 권세도, 칼도, 박해도, 굶주림도, 천신도, 악신도’ 사도들의 앞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길, 진리, 생명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산에 오를 때 먼저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작은 표시는 큰 힘이 됩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은 먼저 간 사람들의 땀과 노력입니다. 역사는 혼자 달리는 마라톤이 아닙니다. 역사는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입니다. 앞선 사람들의 지혜를 배우고, 후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남겨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류가 만들어 온 문명이며 문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 희생의 길, 사랑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군중들의 모욕이 있었고, 제자들의 배신이 있었고, 뼈를 깎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부활의 길이었고, 희망의 길이었고, 영원한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공식을 알면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 수 있었습니다. 원리와 이치를 아는 사람은 지도와 나침판을 가지고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교에서는 삼강오륜을 이야기합니다. 불교에서는 팔정도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삶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이런 가치와 척도로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유가 없는 진리는 때로 독선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광신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참된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독점하고 억압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죽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작됩니다. 알은 깨어지는 아픔을 거쳐야만 비로소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는 엄마와 연결된 탯줄을 끊어야만 비로소 스스로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고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순교하였지만, 교회는 온 세상으로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명예, 성공을 추구하는 생명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생명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어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어주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참된 생명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과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신앙으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 행동은 다른 길을 찾고, 다른 진리를 찾아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 항해하는 배를 안내하는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만 밝은 빛으로 안내할 뿐입니다. 밤길을 안내하는 등대도 배가 가까이 오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등대는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등대가 밝히는 빛을 따라서 암초를 피하고,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평생 3가지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대에게 가장 값진 시간은 언제인가?" "그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톨스토이'는 정답까지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사람은 지금 마주한 사람입니다. 지금 내가 마주한 사람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누구도 앞으로 어떤 사람과 인간관계를 맺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세상에 온 유일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그때그때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선행을 다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런 삶이 모여서 영원한 생명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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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저는 때때로 예비자 교리 시간에 숙제를 하나 냅니다. 집에 십자고상이나 성모상으로 기도 공간을 만들어 보라고 말입니다. 내가 사는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고 꾸미는지는 중요합니다. 내가 사는 공간은 나의 내면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로 반론을 펼칠지도 모릅니다. ‘술주정뱅이는 수도원에 가도 수도원이 술집이 되지만, 수도사는 술집에 가도 술집이 수도원이 된다.’ 곧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 말도 맞지만,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우리가 머무는 장소도 중요합니다. 어떤 곳에 머무르느냐에 따라 내면도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러 하느님께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곳이기에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자리에 가려면 하느님 나라와 닮은 장소에 자주 머물러야 합니다.
안젤름 그륀 신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저는 오늘 저녁 마음의 문을 닫고 침묵의 내적 공간에 아무도 들이지 않으렵니다. 그 안에는 당신만 계십니다. 오늘의 문제나 걱정거리, 미래의 불안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지금은 오직 저와 당신만 그 안에 머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고자 합니다. 잠시 예수님과 함께 ‘침묵의 내적 공간’에 머물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사랑으로 마음을 가득 채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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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1-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라고 시작한다.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과 혼란에 휩싸였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놓지 말라고 권고하신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2절). 아버지의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머무는 친교를 의미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쫓겨남도 없고, 멸망함도 없는 참된 거처를 가지게 된다. 곧 하느님 당신 자신이 우리의 거처가 되신다.”(In Io. Evang. Tract. 67,2).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믿음과 사랑 안에서 준비하는 삶은, 단지 미래의 보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서 그 거처를 짓는 행위이다. 주님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3절)라고 약속하신다. 그분이 곧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는 이렇게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는 더 이상 죽음 안에 있지 않고, 그분과 함께 거처하게 된다.”(In Ioannis Evangelium, lib. 9). 곧, 우리의 거처는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분 안에서 하느님과의 친교가 완성된다.
토마스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여기서 길은 거룩한 삶, 진리는 교회의 신앙, 생명은 영원한 행복을 뜻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나는 길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진리이다. 나를 알지 않고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생명이다. 나와 함께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In Io. Evang. Tract. 69,2) 즉, 예수님은 단순히 길을 보여 주시는 분이 아니라, 길 그 자체이시며, 우리가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교회는 이 진리를 끊임없이 선포해 왔다. 교회 헌장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시다.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간다.”(14항) 우리가 아버지께 도달하는 방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랑의 행위로써 길을 걷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성 이레네오가 말하듯이, “살아 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20,7). 그리스도는 이 길과 진리와 생명의 원천으로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신다. 우리는 종종 제자들처럼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고 느낀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우리에게 길, 진리, 생명으로 오셨다. 우리의 불안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시고, 우리의 길을 생명으로 이끄시어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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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노동자의 아들>
마태오 13,54-58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노동자의 아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5)
노동자의 아들 예수가
지혜와 기적의 힘을 지니자
고향사람들은 비아냥댔지
저 사람은
노동자의 아들이 아닌가?
노동자의 아들 예수는
노동자 아버지 요셉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노동으로 세상을 빚는
노동자 아버지 요셉에게서
창조하시는 하느님을 보았겠지
노동으로 스스로를 이루는
노동자 아버지 요셉에게서
스스로 계시는 하느님을 보았겠지
노동으로 벗을 섬기는
노동자 아버지 요셉에게서
돌보시는 하느님을 보았겠지
노동자의 아들 예수가
지혜와 기적의 힘을 지니니
나는 고백하리라
저 사람은
노동자의 아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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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은 길, 진리, 생명>
남자는 살면서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단다. 첫째는 엄마 말, 둘째는 부인의 말, 그리고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여성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 첫째와 둘째 못지않게 셋째가 중요한데 그것은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잘 안내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엉뚱한 곳으로 안내할 때도 있다. 그러나 길의 안내자 역할에 내비게이션은 분명히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가 인생 여정을 살아가면서 때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물을 때가 있다. 최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때로는 목적도 방향도 없이 방황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에 안주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 하느님 품 안에 쉬기까지 늘 불안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천상에 목적을 두고 어떠한 처지, 상황이라도 감당하며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늘을 향한 확실한 안내자는 누구인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길이다. 당신을‘문’(요한 10,9)으로도 표현하셨다. 당신 자신이 종점이 아니라 종점에 이르는 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전하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요한 17,17)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 자신이 진리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다. 그리고 생명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하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다다르는 방법이다. 아버지 하느님과 만남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시다. 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니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최선이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분명하고 확실한 내비게이션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진리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셔서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께서도 그 안에 사신다. 그래서 누군가 예수님을 알면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다.
그리고 생명이시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완전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구원을 알린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시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내 삶을 주님의 삶으로 바꾸지 않는 한 그분은 그저 좋은 분으로 머물 뿐 구원이 될 수 없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 16,9).
“주 하느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매사에 내 뜻을 내려놓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실천하며 순례의 길을 걷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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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며 살기 위해, ‘평범해서는 안 된다.’, ‘특별해야 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평범하지 않은 특별함이 삶 안에서 커다란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이를 위한 에너지 소비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남과 다르게 살기 위해 특별한 ‘나’를 찾지만, 사실 ‘나’라는 그 자체로 특별하고 다른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도 충분히 다르고 특별하게 살 수 있습니다. 굳이 가식이나 위선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남과 경쟁하고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힘 빼고 ‘나’로 살면서 즐거우면 됩니다.
어렸을 때 미술 시간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크레파스가 나빠서, 도화지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알 수 있었습니다. 원래 못 그린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크레파스나 도화지가 있어도 마찬가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미술 시간이 가장 싫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못 하는 것이 있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남들보다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나만의 것도 있기에 충분히 괜찮습니다. 더구나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힘센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스승의 떠남과 베드로의 배반 예고(13장)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을 향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모든 것을 걸고 따랐던 스승이 떠나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배반할 것이라는 말씀에 영적,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런 제자를 향해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처럼,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게 됩니다(요한 14,6 참조). 주님의 사랑 외에는 우리의 구원이 있을 수 없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삶을 살면서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잃고 마음이 산란해지곤 합니다. 그때 세상은 여러 가지 화려한 길과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특별한 ‘나’가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으로도 특별한 ‘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조금 다를 뿐입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통해서만 특별한 ‘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의 뒤를 묵묵히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진정으로 특별한 ‘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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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유언 말씀입니다. 유언이란 남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앞 장면에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복음 13장 36절)라고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복음 14장 1절-2절)
이는 당신이 아버지의 집으로 가신다는 것을 말해주며, 동시에 그곳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는 것을 통해 당신이 그곳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당신은 본 바를 말하니, 아버지를 믿고 또한 당신을 믿으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거처할 곳이 많고 생명의 집이 있어도 가서 거주하지 않으면, 그 집은 나의 거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가 그 거처를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토마스는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복음 14장 5절) 하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당신의 신원을 통해 밝히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복음 14장 4절)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에 속했습니다. 곧 해방의 길입니다. 그 “길”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의 부름에 따라 약속의 땅에 다다르기 위하여 믿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멀고 험한 길입니다.
그런데 점차 이 길의 표상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되었습니다. 곧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길’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곧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갑니다. 사실, 이는 엄청난 발언이요,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진리”(áληθεια)의 원어의 뜻은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진리”이십니다.
동시에, 아버지께 가는 길을 드러내는 보물이 이기에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은 진리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입니다. 곧 당신이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속에 머물러 있으면 참으로 내 제자들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는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복음 8장 31절-32절)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이 신적생명을 베푸십니다.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복음 6장 35절) 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빵이신 말씀을 먹고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줍니다. 곧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알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참된 앎의 길입니다. 그저 안다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그것을 믿을 때라야 그 앎을 진정 알게 됩니다. 참된 앎은 진리를 머리로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요한 복음 14장 1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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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복음 14장 6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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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1)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시며 ‘목수’이셨다는 것은(마르 6,3),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고장 난 세상과 인간들을 고치려고, 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오신 ‘하느님의 목수’이십니다. 그래서 목수라는 직업은 예수님의 사명에 직결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사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그 당시 목수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쪽에 있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메시아’를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직업이 농부라는 뜻은 아니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농부들이 하는 일과 같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2)
하느님은 생명체들을 만드신 분이고, 그 생명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시는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불우이웃 돕기 성금’에 관해서 말할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2코린 9,10)
하느님은 우리에게 씨앗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고, 그 씨앗이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분이고, 그 열매를 풍성하게 늘려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께서 주신 씨앗을 잘 심고 가꾸고 돌보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6-9) 신앙인은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협력자입니다.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3)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은 그 자체로 ‘선’이고,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선’과 ‘사랑’의 반대쪽으로 갈 때가 많습니다. ‘아담’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드신 다음에 그곳을 관리하는 일을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 대한 전권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오염시키거나 파괴할 권한은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일으키는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의 반대쪽에 있는 ‘악한 일’이고,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쟁을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파괴가 아니라 구원을 향해서, 또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향해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4) 복음서에는 ‘농부’이신 하느님과 ‘목수’이신 예수님에 이어서, 사도들이 ‘어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사람 낚는 어부’라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라는 뜻입니다. <‘물’은 ‘죽음’을 상징하고, 물속에 있는 사람을 물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은 ‘생명’과 ‘구원’을 상징합니다.>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사람 낚는(구원하는) 어부’로 변화되었는데,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두 부르심에 응답할 때 자신들의 직업을 버리고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는, 천막을 만드는 일이 직업이었습니다.(사도 18,3)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사도가 된 후에도 직업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서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선교활동을 위한 활동비를 벌기 위해서 그 일을 했습니다. 사도들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원래 직업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는가?”, 또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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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예수님 자신이 우리가 걸어갈 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마감할 즈음에 이제 곧 세상을 떠나야 함을 내다보시고 사랑하시는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후 손수 그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특별한 사랑을 행하셨다. 이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어디까지 겸손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고, 서열에 관계없이 '모두가 서로를 마땅히 섬겨야 함'을 엄중하게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을 토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도 선포되었다. 이 계명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 안에서 세상이 예수를 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을 이어갈 제자들의 사명은 분명해졌다.(요한 13장) 그러나 예수님의 고별식이 순풍에 돛단 듯 매끄럽게 이루어지지만은 않는다.
스승을 팔아넘기게 될 가리옷 사람 유다는 사탄의 굴레를 쓰고 이미 그 자리를 떠났다. 제자단의 으뜸인 베드로조차 목숨을 바쳐서라도 스승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하지만 하루 밤을 넘기기도 전에 스승을 세 번씩이나 배반할 것이라는 예언을 마음에 새겨야 했다. 사태가 이쯤 되었다면 고별식장의 분위기는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피부에 와 닿는다. 여기까지가 요한복음 13장의 흐름이다.
고별식장의 삼엄한 분위기는 모두를 걱정과 불안으로 몰아간다. 당장 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대체 스승은 어디로 간다는 것인지 제자들은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드디어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진다: "너희는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마라." 걱정이나 불안에 듣는 약은 딱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고 말씀하신다.
믿음은 동시에 희망이며 신뢰심이다. 그러나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 제자들의 걱정과 불안이 제거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통상 무지(無知)에서 불안과 걱정이 싹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을 수 있는 설명을 덧붙이신다. 예수님의 '가심'은 잠시의 이별이다. 이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집, 즉 하느님 나라에 모두를 위한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시는 이별이며, 있을 곳이 마련되면 다시 와서 모두를 데려가실 때까지의 이별이다.(2-3절)
예수께서는 이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고 제자들의 '앎'(지식)을 전제하신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동반했던 제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토마스가 나서서 "우리는 당신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5절)라고 반문한다.
토마스는 아직도 불안과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과 '그 길'에 대한 자신의 앎이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표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가 계신 곳이요,
그 길은 바로 당신 자신임을 밝혀주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예수께서 가실 곳은 아버지의 집이다. 아버지의 집이란 아버지 자신을 말한다. 이곳은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지닌 아들의 고향이다.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아들 외에는 아무도 갈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곳에 친히 가서 제자들의 집을 마련하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것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렇다. 이 말씀은 비유법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 도식을 사용한 자기계시인 것이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지식이 부족해서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불식시키셨다. 믿음에 앎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만큼은 아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을 믿음만으로 모든 것은 끝난다. 예수님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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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의 약속을 보증>해 주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기 전에 그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은 통상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머무르시는 공식적인 현존 장소인 성전을 가리키지만, 초월적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의미하기도 하지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스승이 걸어갈 고난과 박해와 죽음의 길이 고스란히 기다립니다. 당장은 그들이 깨닫지 못하지만 이미 예수님께서 누차 말씀하신 바지요. 어쩌면 이 지상에서 머리 둘 곳 없으셨던 스승처럼 제자들에게도 그럴듯한 자리가 주어지지 않을 겁니다.
"거처할 곳"은 살 곳, 곧 생명의 자리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영화롭고 안정된 육적 생명의 지상 거처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아버지 나라의 거처가 마련될 것입니다.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아버지의 집, 그곳은 아버지와 아들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사랑하시고 또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허락된 거처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이미 자리가 있다는 건 말 그대로 구원의 약속입니다. 결코 변하지 않고 번복되지 않을 구원의 보증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합니다.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사도행전 13장 26절)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하심으로써 당신의 구원 의지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그 말씀의 실현이시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현존 자체가 하느님 구원 의지의 확고한 표현이고 완성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천 년 전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일어난 일회성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말씀"으로 우리에게 파견되어 오시니까요.
주님의 말씀이 어느 날은 우리 심금을 울리고 또 어느 날은 복잡하고 바쁜 일정에 밀려 버리기도 하시지만, 깨어서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에게 그분 말씀은 변치 않는 구원의 보증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사도행전 13장 33절)
하느님의 이 말씀은 성경 안의 한 사건으로 머물지 않고,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자신 안에 육화하시도록 허용하는 모든 이에게 매일 실현되는 약속입니다.
주님은 말씀에 목말라 당신 앞에 모여든 이들에게 잉태되시고 출산되시면서, 동시에 말씀을 받아들여 말씀이 된 이를 낳으십니다. 말씀을 품어 말씀과 하나 된 이는 그래서 매일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하느님의 아들, 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복음 14장 6절)
예수님은 우리와 아버지를 잇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우리는 말씀에 머무르고 성체를 모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 되어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자선과 나눔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라도 여전히 들러붙는 악습과 죄악으로 자신의 구원에 의문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이렇게 불완전하고 못난 자신이 과연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을지 두려움마저 들 수도 하지요.
그럴 때는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는 예수님 말씀에 희망을 걸고, 부족한 자신을 인내하며 말씀께서 자신을 정화해 주시도록 겸손히 드리고 온전히 내어 맡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아버지 안에 우리의 거처가 있습니다. 반드시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부족하나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함께 말씀 안에서 '우리의 거처'로 나아가는 여정 되시길 기원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을 보증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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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때로는 가보지 않는 길을 걷고 싶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 더 쉬운 길처럼 보입니다.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고 미련마저 생기기도 합니다. 걸어보지 않은 길이기에 더 끌리기도 합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이생에서 걷지 않은 다른 길도 걸어보고 싶습니다.
가는 길을 두고 때로는 다른 길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약함을 인정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을 성급하게 나무라지는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가지는 한계를 수용하기 위한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할 뿐입니다.
선택한 길을 걸으며 때로 가지는 의심은,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믿음을 쌓는 과정입니다. 의심하는 가운데 키운 믿음은 그만큼 튼튼하게 자랍니다. 의심이 없이 자라난 믿음은 없습니다.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하나의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나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넘어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포기할 줄 아는 용기는 믿음에서 나오는 은총입니다.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흔들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흔들리는 나약함 속에서 굳건함을 키우는 과정입니다. 선택한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걷는 것입니다. 때로는 흔들릴지라도 지금 걷는 길을 항구 하게 걷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두렵지만 걷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길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이끌어 주리라는 희망을 가지는 일입니다. 의심이 생기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걷는 굳건함 가운데 얻는 은총입니다.
때로 그릇된 길을 걷지만, 우리는 바른 길을 찾아 다시 걷습니다. 때로는 거짓을 살지만 진리를 추구합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걷더라도 주님을 갈망하는 것은 주님께서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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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음이 산란하지 않도록 정신 차리기>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언젠가 80이 넘은 노인이 스님과 문답하는 것을 방송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나이가 되니 참으로 인생무상함을 느낀다고 하니 그 스님이 당연한 것을 왜 느끼느냐고 하며 그런 감성에 젖을 이유가 없다는 뜻으로 답을 하였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면서 저는 그 스님이 참 무정하다는 맘이 들었습니다. 노인은 자기감정을 얘기하는데 그 스님은 그 감정을 무 자르듯 자르니 말입니다.
누가 모릅니까? 특히 그 나이의 노인이 머리가 나빠서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마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이성과 감성과 의지의 유기적인 작용에 따라 마음이 형성되기에 어떤 때는 이성에 마음이 더 이끌리고 어떤 때는 감성에 마음이 더 이끌리며 어떤 때는 의지가 더 강하게 작용하기에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생의 끝은 있기 마련이니 마음 산란할 필요 없다고 이성이 말해도 감성은 여전히 이 세상에 미련이 있고 의지는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정리될 때까지 마음의 산란은 피할 수 없는데 그러기에 마음을 뛰어넘는 정신이 주도하도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물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할 따 그 정신이 육적(세속적)인 정신이 아님은 물론이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이것이 사실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과 그 나라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니 우리는 이 정신을 차리면 끝입니다.
그리하면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선이신 우리 창조주이시고 구세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홀로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라고 프란치스코가 권고하는 대로 우리가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신을 지니면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 가는 것이 싫거나 두렵기는커녕 얼른 가고 싶어 할 것이고,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주님을 기꺼이 따라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 성령을 영접할 때까지 정신 차리기를 계속해야 할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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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13,55)
<땀의 찬가인 노동!>
오늘 복음(마태13,54-58)은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는 말씀'입니다.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행하신 예수님의 활동을 '예수님의 공생활'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활동인 '땀의 찬가'입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13,54ㄷ-55ㄱ) 라는 예수님 고향 사람들의 놀람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보지 못하고 노동자의 아들로만 보았습니다.
성모성월이며 가정의 달, 생명의 달인 5월 첫 날은 예수님의 양아버지이신 노동자 성 요셉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 요셉은 직업이 목수인 노동자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는 목수의 아들이셨고, 노동자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
하느님 아버지의 창조 활동을 전하는 오늘 독서(창세1,26-2,3)가 이를 말해주고 있고, 아들 예수님의 땀의 찬가인 공생활이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땀의 찬가인 노동!'
'노동'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보존하는 신성한 구원 활동'입니다.
그런데도 신성한 의미를 지닌 노동의 가치가 무시되고 있고, 노동자들이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 무시 당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요셉과 세상 구원을 위해 정말 열심히 땀을 흘리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열심히 나와 너 그리고 모두의 생명을 위해 땀 흘리는 노동자들이 됩시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을 성실하고 충실하게 완수하여 마침내 악속된 영원한 생명의 잔치에로 함께 들어가도록 합시다!
"주님,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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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5)
초록의 5월은
드러내지 않는 삶처럼
성모님과 성 요셉을
참 많이 닮았습니다.
진정한 인간 관계는
새롭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예수님 역시
그의 삶 안에서
노동을 배우셨습니다.
평범한 노동 속에
깃든 사랑이 곧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보이는
신분이 아니라
살아낸 사랑에 있습니다.
이름 없이, 빛나지 않아도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든 노동은
하느님 앞에서 이미
가장 존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노동과
일상의 평범함 속에
자신을 숨기시고,
그 안에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지금 이 순간의
성실함과 사랑이
가장 깊은 기도가
됩니다.
성 요셉의 삶은
드러내지 않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삶입니다.
가장 충실한 삶이
가장 깊은 것을
이끕니다.
오늘의 평범한 하루를
사랑으로 살아낼 때,
그 삶은 이미 가장 좋은
봉헌의 삶입니다.
성 요셉의 노동은
사랑으로 살아낸
하느님께 드리는
침묵이며 기도입니다.
모든 노동이
존중받길 기도합니다.
세상의 모든
노동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이들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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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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