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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태국의 모습을 모두 12편에 걸쳐 비교적 소상히 쓴 글로써 태국 방콕에서 10년을 살아 왔다는 이세진씨가 2004년도에 월간조선 사이트 <태국 통신원>에 연재한 내용이다. 아릿따운 여인 Monika Martin의 목소리에 취해 소설 한편 읽는 셈치고 천천히 즐겨 봄도 좋으리라.
방콕은 가장 아름다운 것과 가장 추한 것이 공존하는 도시 이다. 혼돈과 질서가 사이 좋게 같이 사는 도시 이다. 방콕은 천사와 창녀가 동거하는 도시 이다.
아메리칸 드림처럼 청운의 뜻을 품고 와서 일확천금을 할 수 있는 곳은 아니어도 남의 간섭 받지 않고 최대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도시 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곳이다. 외국인이 크게 태국인의 적대감에 부딪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도시 이다. 사람들이 양순(良順)하고 외국인을 관용하는 분위기 탓이다.
정년 퇴직한 노인들도 젊은 여자와 같이 새 삶을 구가할 수 있는 곳 이다. 아름다운 몸매의 아가씨도 많은 반면 게이도 많은 도시 이다. 궁전같은 실내장식에 무릎 꿇고 써비스하는 호스테스가 있는 바에서 귀족처럼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백밧으로 마실 수 있는 술집이 공존하는 도시 이다.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오래된 건물의 벽들은 시커멓게 썩어서 불쾌하며 추하게 보이고 여기 저기 벽이 헌 집들도 많고 도심의 전봇대는 전깃줄 전홧줄이 얽혀 가로수들을 위협하고 있는 도시이다. 더운 날씨 덕분에 하수도 냄새로 코를 감싸쥐게 하는 도시이다. 그뿐만 아니라 시가지의 여기 저기에 흘러가는 개울물은 도시의 폐수를 담고 있어 검은 색이다. 그런가 하면 싯가 3천만 밧이라는 포쉐와 버스 길이만한 링컨컨티넨탈 리무진이 도심을 달리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태국의 전봇대는 4각이다. 뱀이 감고 올라가지 못하도록 4각으로 만들었다고 흔히 말들 하는데, 글쎄... 그게 이유일까? 서울의 전봇대는 모두 지하로 매설되어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방콕의 전봇대들은 해마다 늘어나는 전선과 전화선 덕분에 오버로드된 듯 축 처져 있는 곳이 많고 도시의 미관을 해치고 있다. 때문에 수난을 당하는 것은 가로수들이다. 전깃줄이 걸리게 되면 사정없이 가지를 잘라내기 때문이다.
도심의 주요 간선(幹線) 도로 이외에는 인도의 보도블록이 잘되어 있지 않아 들쭉날쭉이 심하고 숙녀들이 하이힐 구두를 신고 다니기에 매우 불편해 보인다. 게다가 날씨는 사철 폭염이 내려 붓기 때문에 10분만 걸으면 등에 땀이 흥건해 지고 와이셔츠가 달라 붙는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런 불편하고 누추해 보이는 방콕에 한 번 살아 보면 잊지 못해 또 오고 싶어하는 것이다.
방콕은 인구 6천2백만 명이 사는 태국의 수도 이다.
차오 프라야 강은 도시 곳곳으로 연결되는 운하를 거느리고 있어 방콕은 "동양의 베니스"라고 불려지던 도시이다. 도시를 무작위(無作爲)로 가로지르는 운하는 옛날에는 배가 다니는 주요 교통로 였다. 지금은 큰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다리가 많이 놓여 배가 다니는 수로로는 가치를 잃은지 오래이다. 그러나 아직도 배에 손님을 싣고 다니는 운하가 있다. 값이 싸다는 것뿐만 아니라 러쉬아워에 버스보다 빠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원도 지사 였던 최각규씨가 무역 사절단을 대동하고 태국에 온 적이 있다.
지금은 우리가 여유를 갖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나라도 잘 살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들보다 더 행복해 진 것인가?
우리는 세계인과 좀더 잘 지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이방인과 어울려서 사이 좋게 살아 본 역사가 없다.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서투르기 그지 없다. 태국인의 이방인과 잘 지내는 지혜에서 배워야 한다. 이방인을 관용하고 그들의 장점을 국가 발전에 끌어들이는 현명함을 이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경제 규모에서 세계 12위라는 우리는 이제 아시아의 선진국이다. 과거의 외세관만 가지고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수주의와 유대인적인 민족주의만 가지고는 21세기 역사를 선도하는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우리 가치관의 잣대만을 들고 다니며 세계인에게 들이대서는 그들을 감동시킬 수 없다. 20세기는 자본 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대 사상에 의해서 세계가 지배 되었다. 그러나 21세기를 시작하는 지금 한 가지 사상은 죽어가는 폐병환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사상이 21세기를 지배 할 것인가? 분주하게 외국인과 교류하지 않고는 새로 태동하는 지배 철학에 뒤지는 자가 될 것이다.
앞으로 오는 21세기를 세계의 3류 국가로 전락하여 세계사의 뒤안 길을 방황하는 서러운 역사를 되풀이 하려는가?
영국인 한테 태국을 왜 좋아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태국인은 외국인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는 것 같다. 외국인에 대해서 배타적이지 않다.
춥고 음습한 날씨를 갖고 있는 독일이나 영국, 스웨덴 등의 북 구라파 나라들의 노인들이 정년 퇴직하고 사철 따뜻한 태국에 와서 사는 사람이 많다.
태국의 국민성은 순하고 부드러운 편이다. 연장자나 윗 사람을 존경하고 그들의 말에 잘 순종 한다. 학생들은 스승에게 무릎 꿇고 과제물을 제시하고 어른들은 부처와 승려에게 합장배례(와이) 하므로서 예를 표한다. 여기도 역시 공자의 장유유서(長幼有序) 사상이 영향을 미치는 동양권 이다. 나도 회사에서 여러 명의 직원을 겪어 보았는데 순종적이라는 인상을 뒷 받침 해주는 사람이 많았다. 집에서 식모를 고용해도 대개 말 잘 듣고 주인을 거역하지 않는다.
처음 방콕에 온 사람은 승용차, 버스, 삼륜차, 오토바이가 내는 소음과 공사장에서 나는 포크레인으로 땅파는 소리, 건축 현장의 철빔 박는 뇌성과 같은 '땅 땅'거리는 소리 등 귀에 거슬리는 소음에 놀란다. 철물점에서 철판 자르는 소리, 건물의 바닥재로 쓰이는 대리석 깎는 소리, 주차장의 호루라기 소리 등의 소음에 짜증을 내기도 한다. 동네에서는 가끔 젊은이들이 골목에서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며 양동이 등을 북 삼아 두드리며 노래하는 소음에 시달리기도 한다. 가히 소음 공화국이다.
그런가 하면 방콕은 교통 지옥이라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비만 오면 교통 체증은 절정을 이루는데 한 시간씩 길바닥에 차가 서 있어야 되는 때도 있다.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잘 빠지지 않기 때문에 물이 차서 자동차가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방콕은 지면의 높이가 해발 1미터 밖에 안 된다. 도심은 지난 10년 동안 객토를 하고 포장을 다시 해서 물이 차는 곳은 거의 없어졌으나 변두리는 여전히 물이 찬다. 그런가 하면 방콕의 길들은 도시 전체가 미로 이다. 옛부터 있어온 자연 발생적인 길들을 조금 넓혀서 현재까지 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방콕에는 오토바이가 많다. 또 택시 오토바이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교통 체증이 심할 때 택시 오토바이는 진가를 발휘한다. 차는 멈춰 있어도 오토바이는 차들의 사이 사이를 뚫고 계속 앞으로 전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마이카 시대는 보통 오토바이 시대를 거쳐서 온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은 오토바이 시대를 건너뛰어 곧바로 자가용 시대로 들어선 경우 이다. 세계 초유의 고속 경제 성장을 여기서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태국은 지금 오토바이와 자가용차가 공존하고 있는 시대인 것처럼 보인다.
방콕은 환락가가 많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마다 외국 관광객이 1천만명 이상 찾아 오고 있다. 관광객의 속성이 먹고 마시고 놀고 쇼핑하는 것이다. 이들이 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돈 벌이가 될 것이다. 관광은 쌀과 함께 주요한 이 나라의 외화 수입원이다. 그러다 보니 무희가 출연 하는 술집이 많고 창녀도 많다. 에이즈 환자가 많다고 한다.
정부는 이 때문에 딜렘마에 빠져 있다. 내 놓고 발표하자니 관광객이 줄어들 것이고 통계를 숨기자니 치료와 국민 계몽에 지장이 있는 것이다. 번화가인 실롬 거리에는 팟퐁이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환락가가 있는데 밤에는 야시장과 함께 불야성을 이루는 곳이다. 10년 전쯤 에이즈가 그리 알려지지 않았을 때는 관광객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 에이즈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이 뜸해진 것이라고 상인들은 말한다.
술집이나 유흥가 쪽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여자들이 많다. 돈 벌이가 잘 되는 유흥가에 시골 처녀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태국에 여성 인구가 많아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여자들의 사회활동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시장의 채소 과일 장수로부터 대기업의 중역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사회활동이 눈부시다. 은행의 창구에 가면 뒤에 앉아 있는 차장 지점장급에 여성이 많다.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도 거의 여자의 책임인 것 같다.
방콕에는 속속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는데 새로 짓는 건물마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자랑하고 있다. 태국인들은 건물 디자인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서울 처럼 천편 일률적으로 성냥갑 거꾸로 세워 놓은 것 같은 모양이 아니다. 멋있게 지어놓은 고층 건물들을 본 한국인들의 반응이 재미있다.
초현대식 건물과 지상철과 지하철이 5분 간격으로 다니는 대 도시 이지만, 비온 뒤에는 개구리 울음 소리와 새벽에 닭 우는 소리, 각종 새소리, 매미가 떼지어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 방콕이다. 새벽에 집밖의 나무에 와서 잠을 깨우는 각종 새소리는 신기 하기만 하다. -계속-
새벽에 담논 사두악의 수상 시장에 가면 여인네들이 삿갓을 쓰고 좁고 긴 목선에 각종 신선한 야채와 과일 생선을 싣고 노 저어 와서 파는 수상 시장을 볼 수 있다. 방콕의 도심으로는 운하들이 막혀 더 이상 들어 올 수 없으나 변두리에서는 아직도 집에서 소출한 농산물을 배에 싣고 와 파는 것이다. 옛날 타이인들의 수상 생활과 경제 활동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는 태국에만 있는 독특한 풍물로서 외국 관광객들의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샹그릴라 호텔과 오리엔탈 호텔, 쉐라톤 호텔이 일렬로 서있는 차오 프라야 강변에서 앞이 버선코처럼 뾰족하게 쳐들고 있는 이국적인 모양의 목선을 타고 운하를 한 바퀴 돌면 강가에 기둥을 박아 지은 수상 가옥들을 볼 수 있다.
자기의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 최저 생활을 할 수도 있고 귀족처럼 살 수도 있는 곳이 방콕이다. 가진 것 없는 사람도 남의 눈치 안보며 살고 있는 곳이다.
숯불을 난장에 내어 놓고 돼지 목살이나 머릿 고기를 굽고 있는데, 술꾼이라면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울 것이다. 커무양이라고 부르는 돼지 목살 구이에 태국 위스키 쌩솜이나 씽하 또는 크로스터 맥주 한병을 비우고 가라는 강한 유혹을 거절하기가 힘들 것이다.
쌀 국수를 잘하는 집은 많다. 굳이 수쿰빗 26이나 수쿰빗 4의 전통있는 뀌띠아우 집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집 가까운 곳 어디든지 뀌띠아우집은 많다.
도시 서민층은 사철 티 샤츠 두벌 반바지 두벌 슬리퍼 한켤레로 지낸다.
그렇게 산다고 해서 잔뜩 주눅이 들어 부자의 눈치를 살피며 살지 않는다.
더러워 보이는 길거리 난장 식당에도 서양인들이 많이 앉아서들 무언가 먹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걸 보고 어느 한국인이 방콕에는 질 낮은 서양인들이 많이 온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에는 넥타이에 정장을 한 서양인이 많은 반면 방콕은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서양인이 많기는 하다.
여유가 있다면 수쿰빗 31의 나르시서스나 통로의 피아노바, 스쿰빗의 멤버쉽 클럽, 쏘이 랑스완, 싸톤의 멤버쉽 클럽에 가보라. 호스테스가 양탄자에 무릎을 꿇고 써비스하는 귀족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식도락가라면 분위기 좋은 불란서, 이태리, 독일, 영국 식당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방콕에는 그 나라 사람이 하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식당이 다 있다. 중동 식당을 비롯 베트남, 인도, 중국, 일본, 한국 식당 등 아시아는 물론 불란서, 독일, 이태리, 영국, 스위스, 아일랜드 등의 식당을 그 국적의 사람들이 직접 하고 있다.
또 당신이 미식가라면 차이나 타운에 가 보라. 샥스핀 요리, 제비집 요리, 용봉탕 요리를 잘하는 집이 얼마든지 있다. 당신이 수산물 요리를 좋아한다면 수쿰빗 쏘이 24의 씨푸드 마켓 식당을 가보라. 우선 규모의 방대함에 압도당할 것이다. 그리고 살아 퍼덕이는 생선과 눈을 올리고 쳐다보는 머리통만한 게, 세계적으로 제일 비싼 요리로 쳐주는 바닷가재와 싱싱한 새우가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If it swims, we have it.' 이라는 선전문구가 말하듯 해산물 종류는 다 있다.
방콕 중심가의 어느 골목을 가도 일본 식당이나 술집, 가라오케가 일본어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태국에 사는 일본인은 5만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산업계의 거의 전 분야에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들어와 있다. 대학의 연구소등에도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먼 훗날을 내다본 장기적인 투자인 것이다. 중공업, 자동차, 석유화학, 전자, 지하철, 백화점등의 분야에서 일본의 투자는 괄목할 만한 것이다. - 계속 -
일본은 특히 자동차 분야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데 태국을 동남아 자동차의 메카로 육성하려 하고 있다. 주변국들의 소득 수준이 올라갈 때에 대비해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일찍부터 동남아 시장을 선점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태국 식당은 보통 값이 싼 편인데 음식 종류도 많고 특히 태국 음식은 한국인들이 쉽게 친해질 수 있다. 고추 가루와 간장을 많이 쓰고 우리의 된장과 비슷한 콩으로 만든 장도 있다. 태국 음식은 짙은 향료를 많이 쓴다. 전부 천연향을 쓰는데 우리의 입맛에는 좀 진한 것도 있다.
화학 제품의 식초를 쓰지 않고 레몬즙으로 대신하고 생선의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팍치'라고 하는 향초를 쓰는데 향이 너무 진해서 보통 한국인들은 싫어한다. 박하닢도 향료로 많이 쓰이며 모기를 쫓을 정도로 향이 짙은 풀닢도 똠양꿍(새우찌개)의 향료로 쓰인다. 월라파 라고 하는 진한 향을 가진 고춧닢 비슷한 향채는 쏨땀을 시키면 같이 나오는데 숙취를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음식에 향을 많이 쓸 뿐만 아니라 쏘스도 여러 가지가 있다. 한가지 음식에 한가지씩의 쏘스가 다 있다. 돼지 고기는 쏘스 A 오리고기는 쓰스 B 닭고기 튀김은 쏘스 C 이런식으로 쏘스가 다양하다.
당신이 중동의 건설 현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면 양고기에 향수를 느낄 것이다. 수쿰빗 쏘이 3의 중동 식당에 가보라. 통째로 누워 있는 양고기에서 갈비를 떼어 내어 식당 앞에 마련된 숯불 화로에서 구워 줄 것이다.
당신이 통돼지 바베큐를 좋아한다면 수쿰빗 쏘이 23에 있는 독일 생맥주집에 금요일에 가보라. 커다란 통 돼지가 바베큐 화로 안에서 돌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파람 3에 애저 통돼지 구이만을 전문으로 값싸게 써비스하는 식당도 있다. 일반적으로 태국인들은 쇠고기보다 돼지고기를 선호한다. 태국의 소들은 모두 물소들이기 때문에 육질이 질기다. 한국 식당을 포함한 외국인 식당들에서는
태국의 김치라고 우리가 말하는 쏨땀을 먹고 싶다면 화람퐁 역 앞에 황혼이 깃들 무렵에 가보라. 수없이 많은 외국의 배낭족들과 함께 싼값에 얼마든지 골라서 찹쌀밥을 곁들여 즐길 수 있다.
차오프라야 강변이나 크렁떠이 시장 주변의 불량주택에 실망했다면, 수쿰빗 31에서 63까지의 주택 들을 가보라. 최소 1라이(480평)에서 10라이(4,800평) 정도의 개인집들이 꽉 차있음을 알 것이다.
차들이 거의 일제라서 작다고 생각되면 잠시만 기다려 보라. 버스 길이만한 링컨 컨티넨탈 리무진이 나올 것이다.
민주광장 근처에 있는 카오산 로드는 세계의 배낭족들이 엄청 모여드는 곳이다. 갖가지 국적의 갖가지 피부색의 인종이 모여들어 매일 젊은이들의 축제가 벌어진다. 먹는 것과 숙박비가 최저로 들고 국내 여행에서 값싸고 편리한 교통편과 먹거리 숙박 시설 값싼 항공권의 정보가 넘쳐 나는 곳이다. 한국의 배낭 여행자들도 빼놓지 않고 들르게 되는 곳이 이 카오산 로드이다.
당신이 젊은 축이라면 시암 스퀘어의 하드록 까페나 수쿰빗 쏘이 26이나 실롬의 디스코 텍을 가보라 선남 선녀들이 밤 세워 춤을 출 것이다. 에뜨랑제인 당신은 국외자로서의 보는 즐거움을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눈에 뜨이거든 같이 춤추지 않겠냐고 프로포즈 해도 크게 흉 될 것은 없다.
방콕의 건물들이 규모가 작다고 생각되면 씨나카린의 씨콘 스퀘어나 칫롬 4거리의 월드 트레이드 쎈터, 빠뚜남의 베이욕 타워, 라차다의 훠춘 타워를 가보라. 벌어진 입을 다물기가 힘들 것이다.
아침 일찍 거리를 나가 보면 부녀자들이 음식을 들고 집 앞에 죽 나와 서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담황색 옷을 입고 맨발로 대 여섯 명씩 떼지어 오는 스님을 맞기 위해 서있는 것이다. 방콕의 어느 골목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인데 이것을 보면 불교가 태국인의 마음 밑바닥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음식을 봉지 봉지 넣고 봉투에 따로 돈을 넣어 준비하고 있다. 맨발의 스님이 자기집 앞에 오면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음식과 돈 봉투를 바친다.
스님은 중생에게 치성을 드리는 기회를 주기 때문에 보시를 베풀고 있다는 것이 교리이다. 스님은 중생을 제도하는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지 동냥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안해 하거나 송구스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문외한의 눈에는 그게 그거로 보이는데 말이다. -계속-
불교의 교리는 현세에서 덕을 많이 쌓으면 내세에 부자로 태어난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억겁(億劫)의 세월을 두고 윤회(輪廻)하면서 이승에서 저승으로 저승에서 이승으로 넘나드는 존재라는 것이다. 결코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이 생과 사의 끝없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음 수양과 끝없는 선(禪)과 많은 공덕을 쌓음으로서 해탈하는 것이다. 태국인들이 가난해도 웃으면서 마음 편히 살고 있는 것은 이런 내세관을 가지고 있는 불교의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다. 태국의 불교는 또한 사회의 안정에 기여하고 있는 것 같다. 사회 전체가 작은 충격에 쉽게 동요되지 않는다.
태국, 스리랑카, 베트남 등의 동남아 국가들은 소승(小乘) 불교이다. 중국, 한국, 일본의 불교를 대승(大乘) 불교라 해서 구분 짓고 있다. 어떤 스님한테 그 차이점을 물은 적이 있었다. 소승 불교는 개인의 구제(救濟)에 중점을 두는 반면 대승 불교는 중생을 다같이 제도(濟度)하자는 교리의 차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소승 불교는 이기적이지 않느냐고 했더니 하나씩 구원해서 숫자가 많아 지면 중생이 되니 결국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태국의 불교는 자기만의 복락을 비는 이기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다. 태국의 전래 샤마니즘인 '피'를 믿는 사당이 아직도 많고 미신이라고 지탄받고 있음에도 시골에서는 전래의 민간 신앙과 불교가 결합해서 성행하고 있다.
영국인 친구가 아침에 불당 앞에서 정성껏 예불 드리는 여인을 보고 "부처님, 바라옵건데 오늘 제발 돈 보따리를 좀 줍게 해 주옵소서" 하고 빌고 있는 것이라고 농담을 했는데, 어느 정도 태국 소승 불교의 실체를 표현한 말인 것 같기도 해서 실소를 한 적이 있다.
불교는 태국인들의 의식 전반을 차지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들의 국교 이다. 많은 휴일과 국경일들이 불교와 관련 있다. 역대 왕들이 살았던 옛 왕궁과 같이 있는 절 왓 프라께오는 외국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가 되어 있다. 궁전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인데 왕실에서 예불을 드리던 절이 이 궁안에 있는 것 이다. 처음 방문한 한국인은 우선 절 모양이 한국의 것과 너무 다른데 호기심을 갖게 된다.
절 건물의 표면에는 황금색, 코발트색, 붉은 색, 초록색의 휘황 찬란하게 번쩍이는 손톱만한 타일을 붙였다. 그 옆 건물의 외벽에는 꽃들의 문양을 모자이크해 놓았는데 소름끼치는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여러 개의 탑들은 한국의 돌을 쌓아 만든 탑과는 아주 다르다. 원뿔 모양을 하고 있고 유연한 오목 곡선을 만들며 위로 뻗어 끝이 창끝 처럼 뾰족하게 되어 있다. 이 탑의 표면도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타일을 붙여 치장했다.
그러나 왓 프라께오의 백미(白眉)는 높이 75cm의 메머럴드 불상이다.
왓 프라께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왓 트라이밋트라는 절이 있다. 이 절에는 무게 5.5톤의 순금 불상이 있다. 나와 같이 갔던 한국인이 현 시가로 1,000억원 정도라고 얘기해서 웃은 적이 있다.
차오 프라야 강을 건너서 톤부리 쪽에 새벽사원 이라고 불리는 왓 아룬이 있다. 높이 75m의 사각 뿔대 모양의 탑이 유명한데 새벽 사원이라는 이름과 같이 새벽이나 석양 무렵에 탑의 실루엣이 강의 풍경과 어울어질 때가 가장 아름답다.
태국인들의 순하고 너그러운 외면을 한 꺼풀 벗겨내면 단단한 자존심과 자부심을 갖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자존심의 이면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이 뒷받침하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긴 재위 기간을 자랑하는 왕의 존재가 있다.
왕의 권위를 부정한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태국인들과의 교유(交遊)에서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관계가 단절됨은 물론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고대의 유적과 현대적인 고층 빌딩, 고가 전철과 지하철이 무리없이 공존하고 있는 도시가 방콕이다. 차오프라야 강변 샹그릴라 호텔 가까운 곳에 행인을 실어나르는 선착장이 있다. 톤부리에서 시내로 직장인 학생 시장에 가는 주부들을 실어 나르는 배가 교통 수단으로서 아직도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옆 다리 위로는 벤츠차가 줄을 잇고 달리고 있다.
방콕은 시가지의 어디를 걸어도 무언가 재미 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이색적인 구석이 있는 도시 이다.
피부가 검은 여자도 태국에선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 같다.
태국의 인종 구성은 꽤 복잡하지만 대체로 피부가 하얀 북방계 한족, 피부가 검은 남방계 말레이족, 동쪽에서 온 크메르족과 타이족이 주류 이다.
냉동닭 수출로 최대의 재벌이 된 CP 그룹, 철강과 니싼 자동차, 가와사끼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는 시암 그룹, 최대의 은행인 방콕은행의 오너, 섬유로 재벌이 된 사하그룹등이 중국계이다. 신그룹의 오너이면서 현직 수상인 탁신 시나와트라도 조부 때 중국에서 이민 온 경우이다.
태국은 미스 유니버스를 두명 배출했다. 한명은 70년대이고 또 한명은 80년대 중반에 미스 유니버스가 되었는데 이름이 홍사쿨라라는 미인이다. TG항공의 모델로도 활동을 해서 90년대 중반까지도 TG항공을 타면 광고 영화에서 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태국 여성들은 몸매가 아름답다. 다이어트에 별 신경쓰지 않아도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여성이 많은 것 같다. 타이 여성들의 식습관에서 그 이유의 일단을 보게된다. 타이 여성들은 한번에 많이 먹지 않고 조금씩 자주 먹는다. 때문에 먹고 남아서 축적되는 칼로리를 방지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런가 하면 모두 쌍꺼풀 눈들을 하고 있고 눈매가 아름답다. 태국인들 사이에는 쌍꺼풀이 아닌 눈이 더 인기라고 하니 우리에게는 아이로니가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체격은 한국 여성보다 작다. 대학에서 강사를 하는 한국인이 대학생들을 인솔하고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갔었는데 한국인들이 모두 고등학생으로 보더라고 했다.
크렁떠이 시장은 방콕에서 제일 큰 오픈 마켓이다. 밤새워 시골에서 올라온 싱싱한 야채, 과일, 여러 가지 곡식, 고기류, 해산물, 가금류 없는 것 없이 다 있는데 가격들이 엄청 싸다. 서민층에서 상류층까지 하루종일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데 비만 오면 땅이 질퍽거리고 각종 쓰레기가 내뿜는 냄새로 코를 들기가 어렵다.
여기서 한 2km 쯤 떨어진 곳에 방콕 최고의 백화점이라는 엠포리엄 백화점이 있고 세계 첨단 브랜드 전문점이 모두 모여 있다. 루이 비똥, 쎌리느, 크리스찬 디올, 구찌, 리바이, 죠지오 알마니, 웅가로, 지아니 베르사체, 발렌티노, 프라다, DK NY, 샤를르 주르당, 롤렉스, 까띠에, 피아젯, 론진, 불가리 등이다. 여기에 미국, 일본의 유명 브렌드 의류는 다 모여 있고 전자 제품 쪽으로 가면 GE, 쏘니, 필립스와 함께 삼성, LG도 큰 매장을 점하고 있다.
빠뚜남 마켓과 보배 마켓은 각종 의류점이 집결되어 있는데 손님의 90 퍼센트가 동 유럽과 소련의 보따리 장수들 이다. 때문에 싸이즈가 모두 큰 옷들 밖에 없다.
북부 버스 터미널 가까운 곳에 짝뚜짝이라는 시장이 있는데 화려한 색상의 T샤쓰, 청바지, 목재 가구, 골동품, 화초, 히피족이 좋아할 것 같은 수 놓은 가죽 잠바 등 여러 가지 물품을 팔고 있다. 특히 골동품점에는 재미있는 물건들이 많이 있다. 오십년은 됨직 해 보이는 추가 있는 시계, 40년대에 나왔다는 영문 타자기, 삼십년 되었다는 중고 리바이 청바지, 2차 대전 때 신었다는 군화, 오십년 되었다는 싱어 미싱 등이 있다.
방콕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국제학교가 일찍부터 있어 왔다. 주로 미국과 영국 재단에서 세운 미·영의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초·중·고등학교 들이다. 최근 3, 4년 내에 국제학교가 부쩍 더 많이 설립되어 현재는 50여개가 된다. 이 중 3, 4개 학교가 역사도 오래 되었고 소위 1류 학교인데 12학년 과정까지 졸업하고 미국의 IVY 리그나 영국, 호주 대학으로 진학 하는 학생이 많다. 교사들은 미국, 영국에서 초빙한 교사 자격증 소지자들로 철저하게 미국 동부 사립학교 수준의 교육 씨스템을 자랑한다.
한국 사람들이 자녀를 미국이나 카나다 호주로 유학을 많이 보내는데 방콕의 미, 영 학교를 선택한다면 경비가 적게 들 것이다. 하기야 생할비라면 미국보다 적게 들겠지만 학비야 미국 동부의 사립학교 수준이다. 일년에 1 만불 정도 이다. 이는 초·중·고등학교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한 반의 학생은 20명을 초과하지 않고 교사들은 학생의 성격, 취미, 특성등을 잘 파악하고 지도 하고 있다. 인격적인 교육으로 자발적으로 아이들이 학습에 참여하도록 지도한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학교를 좋아 한다.
여름 방학이 2달 정도로 매우 긴데 이 기간에는 아이들이 빨리 개학이 되어 학교에 가고 싶어한다. 상위 학교는 캠퍼스도 넓고 각종 운동 시설, 수영장, 강당, 음악실, 과학실 등 부대 시설도 잘 되어 있다.
미국으로 유학간 어린 학생들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마약이나 나쁜 친구와 어울려 아이를 버리게 된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부모의 의사에 따라 반 강제로 미국에 떠밀려 왔다. 공부에 대한 비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미국 생활에 대한 준비도 덜돼 있다. 부모가 가라고 하니까 막연한 호기심에서 그들의 의견에 따랐을 뿐인 것이다. 학교에 입학해서 보니 자기가 배운 몇 마디 영어로는 도대체 선생과 친구들과의 의사 소통이 어렵고 거기다 주눅이 들어 쉬운 말조차도 입이 안 떨어 진다. 저희들끼리 하는 말은 도통 알아 들을 수도 없다.
게다가 이 친구들이 덩치는 왜 그리도 큰지 그들 앞에 서기만하면 겁부터 난다. 본토 서양 아이들의 텃세가 있기 마련이다. 주눅이 들어 다니는 아이를 왕따시키거나 놀려댄다. 주위에는 자기가 처한 어려움을 상담하고 조언해 줄 마땅한 어른도 없다.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로 1년쯤 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데 중국이나 베트남, 히스페닉계등 우선 덩치에서 만만한 애들이 접근하게 되고 친구가 된다.
학교에서 칭찬을 받으며 제 위치를 찾고 자기 존재의 당위성을 인정받지 못한 아이는 학교 밖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다른 친구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마약, 싸움질에 몰두한다. 용돈이 모자라게 되면 절도도 서슴치 않는다. 또 기왕 하는 거 또래 중에서 우뚝한 존재로 인정 받고 싶어진다. 악행은 점점 더 대담해 지는 것이다.
대개 이런 변화 과정을 거칠 것이다. 특히 아이가 버리기 쉬운 곳이 미국이라고 한다. 판단력이 아직 미숙한 아이를 아무 제약이 없는 너무 자유스러운 분위기에 갖다 놓으니 제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모양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이를 미국에 보내는 것은 실패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쓴 일대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 계속 -
이런 서양의 학교에 비해 태국의 국제학교는 훨씬 안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동양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체격에서 열등하지 않다. 서양 아이들이 있다지만 그들에게도 외국이다. 태국 아이들이 텃세를 한다면 힘으로도 겨뤄 볼만 하다.
태국 국제학교의 아이들은 미국에 비해서 위험에 노출될 기회가 많지 않다. 우리와 같은 동양 문화권이기 때문에 사회 분위기가 비슷하고, 어른을 존경하고
태국은 관광 대국이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은 한국보다 한 수 위이다.
우주의 시간에 비한다면 찰라에 지나지 않은 것이 인생이다.
겉으로 행복해 보이고 걱정이 없어 보이는 가정도 안을 들여다보면 꼽사등에 한짐씩 짐을 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얼마 전 우리는 남들이 부러워해 마지 않는 엄청난 돈과 명예를 가진자들의 허무한 마지막을 목격했다. 한국에 몇 안되는 재벌 기업의 오너도 현역 도지사도 선거로 시장에 당선되어 떵떵거리던 자도 대 건설회사의 사장도 일반의 기대를 저버리고 새처럼 고층 건물에서 몸을 날리고 돌맹이 처럼 한강에 몽땅 뛰어드는 것을 보았다. 돈과 명성을 주체할 수 없이 많이 가지고 있던 자들이다.
그런 것들이 행복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반증에 다름 아니다.
'부족한 것 없이 다 갖추어진 다음에 인생을 즐기자. 집도 사고 아이들 대학까지 마치고 자동차도 3,000cc 정도로 갖춘 다음 놀러 다니자. 그 때는 세계 여행도 다니고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이나 마이아미의 팜비치, 스페인의 카나리 해변, 남프랑스의 리비에라 해변에서 해수욕도 즐기자. 이국의 묘령의 여인과의 로맨스도 그 때 생각하자.'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즐길 자격 요건에서 미달인 사람이다.
부족하고 가난한 중에 여유를 갖는 방법을 터득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태국인들은 우리보다 현명하다. 다 갖춘 다음에는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시점이다. 내일 모레 화장장으로 갈 사람이 무슨 여한이 남아있어 세계 여행인가.
한국인은 "인생을 즐기자" 하면 무슨 문둥이가 나타난 것처럼 이상하게 볼 것이다. 한국인들이 너무나도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말이기 때문이다. 쉬면서 일도 해야 성수대교가 무너진다든가 삼풍 백화점이 내려 앉는다든가 격포에서 240명 실은 배가 뒤집어 진다든가 지하철 공사장이 무너진다든가 하는 일이 안 일어난다.
조급증은 큰 병이다. 이런 사고는 조급증의 병이 생산해낸 재해이다. 여기 여행 업계의 태국인이 '빨리 빨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관광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빨리 빨리'를 입에 달고 다닌다. 쇼핑점에 들어가서도 빨리 빨리 식당에서 먹는 것도 빨리 빨리, 차 타는 것도 빨리 빨리, 버스에 앉아서도 빨리 빨리 비행기 타고도 빨리 빨리를 외치며 서두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조급하다. 전철역에서 줄을 섰다가 정작 기차가 들어오면 순서도 없이 몰려 든다. 기차역에서는 출발 시간까지 충분한데도 개찰구를 나오자 마자 뛴다.
서울에서 아침 출근 길에 끼어 들려는 차와 안 비켜 줄려는 차는 신경전을 한참 동안이나 치루고 나서야 어찌 어찌 순서가 정해 진다. 두 차의 빨리 빨리 철학이 충돌하는 것이다. 나는 방콕에서 끼어 들기를 시도했을 때 양보하지 않는 차를 만난 적이 없다.
방콕에 살고 있는 아주머니가 친정 부모들이 왔는데 택시를 잡기만하면 다리도 불편한 노인들이 뛰어가서 재빨리 들어가더라고 했다. 여기는 그렇게 뛰지 않아도 뒤에서 빵빵 거리지 않으니 그러지 말라고 매번 말하다가 지치더라고 했다.
방콕의 차들은 앞 택시의 손님이 내려서 트렁크의 짐을 천천히 내리고 다시 앞으로 가 운전수에게 차비를 천천히 지불하고 하는 것을 조용히 뒤에서 기다린다.
한국인들은 그렇게 조급하게 서둘러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방콕은 교통 지옥이라고 세계에 알려져 있다. 비가 오면 교통 적체가 더 심하지만 평소에도 한 시간씩 막히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추안 릭빠이 전번 수상이 국빈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외신 기자 클럽 회견 석상에서 어느 한국 기자가 질문을 했다.
"방콕에 취재차 방문 했을 때 교통이 막혀 약속 시간에 맞추어 목적지에 가기도 어려웠고, 방콕의 교통에 대해서 불평하는 태국인도 많이 만났습니다.
"사실입니다. 방콕에서는 요즈음 신 상품이 잘 팔리고 있습니다. 차 안에서 쓰는 요강입니다. 이런 정도로 방콕의 교통은 최악입니다. 정부도 일찍부터 방콕 교통의 심각성을 알고 공적인 사적인 논의들도 많이 했습니다. 저는 제가 수상에 취임하면서 첫번째로 국민들한테 약속한 공약이 방콕 교통 문제의 해결이었습니다. 장기적인 계획으로 지금 도시 외곽으로 빠지는 고가도로를 많이 건설하고 있고 고가 전철도 완성 단계에 있습니다. 지하철도 지금 시작단계에 있습니다. 이 계획이 완성되면 방콕의 교통은 획기적으로 좋아지리라고 기대합니다."
수상이 외신 기자들과의 회견 석상에서 요강 얘기를 할 정도로 교통은 지옥이다. 한국에서 추석에 운전하고 귀향행렬에 참가해본 사람은 요강의 필요성을 알 것이다. 지금은 추안 릭빠이 수상이 말한 것 처럼 외곽 도로가 완성되어 있고 고가 전철과 지하 전철이 완성되어 있어 그 때 보다는 교통이 나아 졌다.
이런 태국인 들의 넉넉하고 서두르지 않는 심성이 외국인들이 살아가기에 편안함을 주는 모양이다. 좋은 집이나 좋은 음식 좋은 옷으로 말한다면 뉴욕이나 파리, 런던을 능가 하겠는가?
이런 인정들을 병원에 가도 경험하게 되는 것이 방콕 생활이다.
방콕에서 병원에 가본 사람들은 한국의 병원과 금방 비교하게 된다.
한국의 권위의식 또는 엘리뜨 의식을 가지고 잔뜩 거만한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할 줄 모르는 의사들에 습관이 된 우리들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의사들의 태도에 면역이 된 한국인들은 거만을 떨고 권위있게 보여야 믿음이 간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이다.
방콕의 북쪽에 위치한 국제 공항은 싱가폴의 창히 공항과 함께 동남아 최대 규모이다. 방콕 공항은 러시아의 에어로플롯를 비롯 , 브라질 발리그, 중동, 아프리카 항공사, 북한의 고려 민항까지 전세계의 항공기가 거의 다 들어온다.
때문에 방콕의 동쪽 농누하우에 신공항을 짓고 있다. 신공항 계획 단계에서 싱가폴의 반대에 부딪쳤다. 싱가폴과 방콕이 서로 동남아 허브로서의 임무를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싱가폴은 깨끗하고 도로 정비등이 잘되어 있는 도시이기는 하지만 경직되어 있는 사회 분위기가 방콕과는 사뭇 다르다.
방콕은 항구 도시 이다.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정기 수송선이 다 있어 문류 운송에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중동, 유럽, 남북미주, 아프리카, 동남아 어디든 쉽게 정기선을 잡을 수 있다. 한국의 선사(船社)들도 지점을 다 가지고 있는데 한진 해운, 현대 상선, 동남아 해운, 흥아 해운이 방콕에 지점을 두고 있고 정기선을 띄우고 있다.
한국이 동북아 허브로서의 역할을 국가 목표로 정해 놓고 노력하고 있다.
몇 년 전에 필리핀에서 한국의 단체 관광객이 집단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
국회에서 해외노동자 고용법이 통과된 후 좀 나아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불법 노동자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의 공장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고용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들어낼 수 없다는 약점을 이용하여 임금 착취 인권 유린 말 못 알아듣는다고 함부로 욕하고 한다면 장기적으로 국익에 손해이다.
우리는 일본을 욕할 때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잔인하다고 말한다. 시어머니를 욕하면서 자기가 시어머니가 되면 그대로 답습한다고 했던가?
방콕의 근교에는 가볼만한 관광지가 많다. 악어 수만 마리가 있는 악
악어 농장은 방콕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사뭇파칸에 위치해 있는데 우선 그 많은 악어들에 놀라게 될 것이다. 악어가 3만 마리가 있는 농장도 있다.
파타야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바닷가의 휴양 도시이다. 월남전이 한창일 때 캄보디아 국경 근처의 싸타힙에 부대가 있던 미 해군들에 의해서 개발된 휴양지 이다. 당시에는 보잘 것 없는 민박 시설과 원시 해변이 있었을 뿐이었다.
바다를 옆에 끼고 있어 공기도 상쾌하고 차들이 붐비지 않아 넉넉한 분위기 이다. 해변의 백사장은 10km가 넘게 길다. 또 백사장을 따라서 야자수가 쭉 늘어서 있는 풍경은 이국적이며 비키니 차림의 선남 선녀들이 거니는 모래사장은 낭만적인 흥취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산호섬이나 코창섬 같은 가까운 섬으로 배를 타고 관광을 갈 수도 있고 바다 낚시 해양 스포츠 시설들도 두루 갖추고 있다. 최근에는 잠수함까지 등장하여 바다 밑 관광도 가능해졌다. 가까운 코란섬에 배로 도착해서 섬의 뒷편으로 가면 타이만에서 몰려오는 파도가 거세다. 마른 나무를 주워다 모닥불을 피우고 캠프화이어를 한다면 일상의 췌사(贅事)를 씻어버리기에 충분하다.
파타야로 오세요
타이만에서 불어 오는 해풍에 실려
구리빛 피부의 선원과
어선 가득 배때기 하얀 생선을 싣고
열대의 꽃을 한아름 안고
해변의 캠프 화이어에 젊음을 불사르고
뭉게 구름이 수평선 저 너머
특히 차오프라야 강변의 오리엔탈 호텔은 설립한지 100년이 넘는 호텔인데 세계 최고의 호텔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가장 오래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시설과 써비스에서 세계 최고이다. 규모가 크지는 않다. 손님이 편안하게 느끼는 아담하고 아늑한 분위기와 강변에 접해 있는 아름다운 야외 식당은 세계최고의 호텔 답다. 영국의 소설가 썸머세트 모옴이 집필했던 장소로도 유명한데 호텔의 구관을 'Author's House'라고 명명했다.
제 1회 ASEM(아시아 유롭 정상회담) 총회가 방콕에서 열렸을 때 영국, 불란서, 독일, 이태리, 스페인, 스웨덴등 구라파의 거의 모든 정상들이 오리엔탈 호텔에 묵었었다. 이 때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은 그 옆의 쉐라톤 호텔에 투숙하게 되어 나는 개인적으로 못내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방콕은 한국이 반납했던 아시안 게임을 포함해서 4차례의 아시안 게임을 개최했으며 1998년의 아시안 게임을 치르기 위해 새로운 스타디엄도 많이 신축했고 여기로 연결되는 고가 도로도 많이 건설했다. 가까운 장래에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정부 관계자가 말한 적이 있다. - 계속 -
태국의 한인 이민 역사는 꽤 긴 세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 2차 대전말에 일본군으로 버마 국경 전투에 참전하고 있던 중 1945년 종전이 되어 태국에 눌러 앉은 한인이 있었다. 당시의 버마는 영국의 식민지 이었으므로 영국과의 전쟁이었다.
따라서 태국은 전쟁의 참화를 모면할 수 있었고 종전후부터 지금까지도 일본과는 유대를 돈독히 하고 지낸다. 일본군으로 참전했다가 태국에 남게 된 한인은 10여명 이었다. 이들은 일본 교육을 받은 일본통 이었으므로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거나 일본의 회사와 연계해서 사업을 한 사람도 있었고 위생병의 전력을 이용해서 의료 시술로 생계를 삼은 사람도 있었다.
모두 젊은 시절에 태국에 정착했으므로 태국 여자들과 결혼을 했다.
그 후 한국 동란이 발발하여 태국군을 파병하기에 이르렀고 50년대와 60년대에 태국군과 결혼하여 태국에 온 여자들이 있었다. 이때까지도 태국에서의 한인 사회는 눈에 잘 뜨이지 않는 미미한 존재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태국에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말 여행 자유화가 실시되면서부터 이다. 여행사를 필두로 기념품 가게 식당 한약방 가라오케 술집등이 늘어나게 되었다. 바로 뒤이어 해외로 진출하는 기업체가 늘어나면서 노동집약 산업인 의류, 완구, 양말, 신발을 필두로 건설 토건 회사 전자와 부품산업 컴퓨터 관련 산업, 자동차 부품, IT 산업등이 들어왔다.
현재 태국에는 14,000 ~ 15,000명 정도의 한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사관이나 한인회에 신고들을 잘 안하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 파악이어렵다.) 대부분 방콕에서 살고 있지만 촌부리, 시라차, 차청사오, 파타야, 라용의 공장 지대에도 상당수의 한인이 살고 있다.
인구분포로 봐서 여행업과 여행 관련업 종사자들이 제일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 또 개인 사업자들이 회사에 근무하는 인구보다 많다. 개인 사업분야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해 보고자 한다.
골프장 임대업과 골프 투어 유치업, 옷 가게, 골프 샵, 자동차 임대와 여행 안내, 항공 티켓 판매와 화물 훠워딩, 도서 대여, 영화 필름과 DVD등 대여업, 명함등의 인쇄업, 신문지국, 컴퓨터 수리, 한약재 수출과 한약방, 비지니스 컨설팅, 인력 소개소, 한글 잡지 발행, 소규모의 호텔업과 하숙업, 정수기 대여업, 이삿짐 쎈터, 가라오케, 맛사지, 룸쌀롱등의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교육 인력 자원부의 인가를 받고 자금 지원을 받고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의 학교가 있고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한인 국제학교도 있다. 한인 학교는 외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국어 교육 못지 않게 영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방콕에만 10여개의 한인 기독교 교회와 카돌릭 성당이 있고 한인 불교 사찰도 2개가 있다. 아직은 한인들 수가 많지 않아 한인 자체로 소화할 수 있는 대형 생산 공장이나 유통 업체가 없다. 이런점에서 아직은 본국 의존도가 높은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동차 같은 업종에서 투자를 많이 한다면 부품 업체등이 따라서 들어오게 될 것이고 자동차는 부품 종류가 1만여종이 되기 때문에 부대 업종에서 한인 산업이 활성화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 자동차가 태국 시장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같아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 자동차가 독자적으로 우뚝 설수 없고 부대 산업 설비가 따라와 주어야 된다는 점에서 동남아 어느 나라 보다 태국은 유리란 입지 조건을 갖고 있다. 일본의 토요타, 혼다. 니싼, 스즈끼, 이스즈 5대 자동차 회사가 모두 태국에 생산 공장을 가지고 있어 부대 산업이 잘 발달되어 있다.
그리고 태국 자체 시장도 동남아에서 가장 큰 시장일 뿐만아니라 주변국들과 육로로 연결되어 있어 장래가 유망한 미래의 자동차 시장인 것이다. 동남아 국가들은 북미 공동시장과 유럽 공동 시장에 맞서 ASEAN 공동 시장을 태동시켰다. 2002년부터 품목별로 관세를 낮추기 시작하여 동남아 국가들이 취약한 IT, 통신 장비쪽에서 먼저 무관세 제도를 시작하였다. 2012년까기 농산물을 끝으로 ASEAN 무관세 지역이 완성된다.
한인들은 대개 태국의 상류 사회의 생활들을 영위하고 있다. 보통 아이들을 미.영 재단의 국제 학교에 보내고 있고 월세 3만밧~5만밧(90만원~150만원) 정도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방콕은 전세 아파트라는게 없고 전부 가구가 갖추어진 월세 아파트로서 태국인들은 콘도(미니엄)라고 부른다. 방콕의 콘도는 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해서 지은 것이다.
위의 평수는 공유면적이 포함 안된 실평수 이다. 태국인들은 수퀘어 미터를 쓰는데 100 스퀘어 미터라고 말할 때 실평수 100스퀘어 미터를 말한다. 아파트 형태는 미국식으로 널직 널직하고 큰 평수의 아파트가 많다.
한국인이 방콕에서 산다는 것은 먹는 것과 생활용품값이 싸다고 해도 위와 같은 아파트 가격과 국제학교에 아이들이 다닐 경우 학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생활비가 결코 적게 든다고 말할 수 없다. 또 자동차 값이 비싸다. 비싼 관세 때문인데 예로 현대 쏘나타 가격이 한국 가격의 두배 정도 이다. 자동차를 현지에서 생산하지 않고는 일본차와의 경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태국의 역사와 문화를 말할 때 불교를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문화 유산은 거의가 불교 사원이거나 불교와 관련이 있는 유적들이다. 옛 왕궁을 찾아도 정교 일체의 정치 제도를 가지고 있던 태국은 궁전과 절이 같은 장소에 존재한다. 지금도 태국은 정교 일체의 나라로서 태국의 남자는 모두 중으로서 수련 기간을 2~3 개월 마쳐야 한다. 국민 개병 제도와 함께 국민 개승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버마의 침략에 의해 지금은 폐허가 된 옛 아유타야 왕조의 궁전에 가도 궁전을 빙 둘러서 불상이 서 있고 버마군에 의해 불에 타고 목이 모두 부러진 채로 남아있다. 이토록 왕궁과 불교가 일체가 되어 있던 태국에 카돌릭 선교사가 들어와 선교를 시작한 것은 200년 전쯤이다.
에스파냐의 제수윗 교단이 아시아에 포교를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 이었다.
태국은 한국보다 먼저 서양 선교사들이 포교를 시작하였다. 비행기가 없던 19세기에 배를 타고 선교 여행을 떠났을 것이고 지역 특성상 동남아에 먼저 진입 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급기야는 에스파냐에서 제수윗 교단이라는 급진적 카돌릭 정화 교단이 출현했고 이들은 부정을 저지르는 성직자는 물론 점쟁이 무당 이단자를 화형 시키는 마녀 사냥을 주도 하기에 이르렀다. 나중에는 교황에 의해서 이용당하는 교황 친위대로의 역할을 하게 되지만 출발 당시에는 카돌릭 정화와 포교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이다.
카돌릭 부패 척결을 부르짖고 일어난 루터 칼빈 등의 개신교가 햇볕을 보게 된 것은 발생지인 유럽이 아니고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미 대륙에 간 일단의 영국인들에 의해서 이다. 본격적인 개신교의 세계 선교는 미국인들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한국의 개신교에서 태국에 선교사들을 많이 파견하고 선교에 힘쓰고 있지만 그 성공 여부는 아직 미지수 이다. 방콕에도 한국 선교사들이 많이 있으나 지방에도 많이들 나가 있다. 특히 치앙마이 북쪽의 산족 선교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경우도 있다고 듣고 있다.
종교에 관한한 역사적으로 한국은 유별난 포용력을 보여왔다.
불교가 들어온 신라 시대에는 귀족 사회의 종교 이었으나 샤마니즘과 무속신앙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한국 사회의 저변층까지 확대되어 펴져 나갔다.
그리고 한국에 정착한지 100년 남짓의 기독교는 오늘날 인구의 25%(기독교계에서는 달리 주장한다)를 차지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종교로 자리잡았다.
태국은 불교의 역사가 길고 국민들의 마음에 불교가 너무 깊게 뿌리 박혀 있을 뿐만 아니라 국교로서 보호하고 있는 한 여타 종교가 들어와서 빛을 보기란 어려워 보인다.
물론 태국은 일찍부터 민주주의 헌법을 채택하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무슬림 힌두교 카돌릭 개신교 일본의 남녀 호랑개교까지 다 들어와 있고 자유스러운 종교 행위가 보장 되어 있다.
한국의 통일교가 처음 방콕에 들어왔을 때 사회의 저변층에 뚫고 들어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는 듯이 보였었다. 젊은이들이 집을 나와 단체로 합숙하면서 교리를 배우고 기도회에 참석하고 나중에는 단체로 결혼을 시켜주느니 하면서 선교에 힘쓰고 있었다. 태국 정부에는 국민 윤리 위원회라는 국가 윤리 문제를 심의 의결하는 기구가 있다. 왕실과 수상과 대법원장 국립 대학 총장으로 결성되는 국가 이념의 최고 심의 결정 기관이다. 여기서 통일교에 관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추방 명령을 내린 일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가 우상 추방을 주장하면서 불단과 불상을 철거하고 추방당한 일도 있었다.
태국은 분명 축복받은 나라이다. 각종 농산물과 과일 축산물 낙농제품 해산물이 먹고 남아돌 정도로 풍부하게 소출된다. 또 땅이 넓어서 방콕에서 차로
'기차는 원의 중심을 달린다' 라는 제목의 수필이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적이 있었다.
이 광대한 평야를 처음 본 한국인들의 반응은 "야 여기에 한국사람들 데려다 놓으면 날고 기겠는데..." 하는 것이다. 좁은 땅에 사는 우리 눈에 그냥 놀려 둔 넓은 평야는 아깝기만 하다.
국토의 북쪽 끝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이르러서야 산들이 나타나는데 히말라야 산맥에서 뻗어나온 산들로서 해발 2,500m가 넘는 산들이 있다. 이 깊은 산중에는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진 소수 민족들이 살고 있다. 아카, 카렌, 몬, 리슈, 파뎅등 50여개 소수 인종 부락이 있다. 현재도 이들의 주된 생업은 양귀비 재배라고 한다.
태국에도 이의 운반책이 있어 마약 비지니스에 관여하고 있는 조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산족들을 보기위해서 외국인들이 많이 몰려오고 있다. 특히 용감한 서양 사람들의 탐험 여행 코스가 되어 있고 이로 인해서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으니 외화 획득원의 하나 인 것이다.
나도 이 산족 마을 한 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부락의 모습이 우리의 옛날 시골 농촌 마을과 비슷한 것에 놀랐다. 나무 기둥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바르고 마른풀을 엮어서 지붕을 이어 놓은 모습은 한국 농촌의 초가집과 같았고 화장실은 나무 널판지를 양 다리 간격으로 대서 볼일 볼 수 있도록 했으며 돼지 우리는 통나무를 엮어 만들어 놓았는데 내가 어려서 본 한국 농촌 마을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었다.
한국의 관광객은 최근 연간 약 70만명이 태국을 방문하고 있고 이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이다. 한국 관광객 수가 중국 일본 다음으로 많은 숫자인데 한국의 인구에 비해서 대단히 많은 사람이 태국을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
퇴직 후 연금을 받는 서양인들이 많이 와서 살고 있고 이들이 쏟아 붓는 외화는 불로소득이나 다름이 없다. 주석 광산, 싸파이어 광산, 은 광산, 철광산이 있는가 하면 남쪽의 안다만 해상에서 석유도 나온다. 최근 다시 쏭클라 남쪽 바다에서 유정이 발견되어 바다 밑에 파이프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런 풍부한 자연의 혜택으로 인성이 각박하지 않다. 매사가 여유롭게 흘러간다. 남을 밀치고, 제치고, 밟고, 디디고 올라서야만 하는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고도 먹는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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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86년도에 가 보았던 곳, 밤의 관광이 특이 했던, 옛날의 추억을 되새겨 주누만..다시 가고 싶은 곳인데
작년인가 방콕에가서 일주일 있었는데 12월에도 낮에는 32도가 올라가고, 상하라는 것이 뭔지를 알려 주는 곳이더군, 왕궁이 침수할 정도이니 우리나라 풍수쟁이를 보내 왕궁터 및 태국 수도터를 다시 조사함이 좋겠는데 누가 함 갈 볼라나?
동남아 등지는 <등 따시고 배부른> 소위 강남이고.... 우리는 <춥고 배고픈> 강북이니라....
내 팔자가 그런 걸 옥황상제께 하소연하리요, 용왕님께 하소연하리요....
제비들이 가는 강남은 태국이고 그곳 카페거리에서 홀제비들이 짝을 만나 바람을 피우는 곳
20년전 태국추억은 짝퉁이 많고 상류 여인들은 팔등신 그리고 남성들은 여성에 밀려 은행장도 거의 여자.. 한국남성에 우호적/ 태국관광객은 영덕게가 맛이없다고 한국쌀은 기름끼가 많아 설사한다고.. 파타야 실내 바다풀장이 인도네시아 흑진주 여인과 오버랩되어 생각나는 밤 .그리운 건 아직도 뜨거운 밤
언제나 한 번 가보려나. 태국 공부 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