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노래 - 악보, 가사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사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ㅡ 아ㅡ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ㅡ 아ㅡ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아 ㅡ아 ㅡ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별의 노래>에 얽힌 사연은 박목월씨의 생전의수필집 <구룸에 달가듯이>에 밝혔다. 사랑할수 밖에없는 불멸의 여인과의 애달픈 이별을 그의 글에서는 주인공의 신분, 이름, 만난 계기, 시기는 고백하지 않았지만 비밀로 하는 이유에 대하여 그는 “자기 평생에 가장 소중한 이름 하나를 감출 줄 모르는 헤프고 어리석은 바보도 없을 것이다.
만난 시기도 수천년 전 같기도 하고, 바로 어제같기도 하다. 이와 같은 추억은 시공을 초월해서 살아있는 것인데.........” 라고 해명 하였다. 노래의 주인공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연한 하늘빛 갑사치마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다음의 재회는 화약냄새가 감도는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였는데 그때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세번째 해후한 그날은 유달리 눈부시게 햇빛은 빛나고 그 눈부신 햇빛 사이로 소복을 입고 걸어오는 한여인을 발견했는데 그녀는 불꽃에 싸여 있었다고 한다.
석고처럼 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고 증병을 앓고 있던 그녀는 그날 밤 자신의 병실을 지켜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병실에서 그녀외 시인이 축배를 들고 있을 때 창밖에는 봄날의 밤이 신비스럽게 커튼사이로 스며들었고 꽃병에는 개나리꽃이 가득 꽃혀 있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어느 날 하오 5시30분경 갑자기 그의 시계는 멎었고, 사랑의 밀애를 나누었던 그녀는 끝내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그때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불어.......”하며 이별의 노래를 그녀에게 조용히 읊어내려 갔고, 그리고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라는 표현을 낭만적인 것 같지만 사실상 그는 “나는 하얗게 재가 되어 삭아내린 기분”이라고 당신의 비애를 표현했다. 훗날 작곡을 한 김성태씨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그녀>는 대구 여성으로 박시인이 대구 금융조합에 근무할 때 사무실에서 첫 대면 했으며 6.25동란시 대구 피난지에서 재회하여 3년간 연애를 한것같다고 말하였다.
시인은 대구 계성고를 졸업, 1939년 문단에 데뷰한후 초기에는 동시를 주로 썼는데 지금 세살먹은 아이도 곧 잘 부르는 유명한 동요<송아지>도 그가 쓴 동시이다. 지금 그의 고향인 경주 황성공원에는 <얼룩송아지>노래 비가 서 있다. 1949년에 그는 이화여중 교사로 부임하면서 서울에 정착하였고 그 후 한양대학 교수로 강단에 서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대표 작품으로 <나그네>가 있는데 이시는 작곡가 이요섭씨에 의하여 1974년 작곡되어 가곡으로 만들어졌고 1978년 3월 28일 <이별의 노래를 남긴채, 그도 우리와 이별을 하고 말았습니다>.
시 <이별의 노래>에 곡이 붙여진 것은 그녀가 숨진 이후 며칠 지나서 대구에서 작곡가 김성태를 만난 날 김성태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해군 정훈 악대를 조직해 지휘를 맡고 있으면서 부산, 대구에서 주로 활동하였는데, 그날도 김성태는 친구인 박시인도 만날 겸 군악대 일도 있고 해서 대구에 찾게 된 1942년 11월초 날씨가 쌀쌀한 늦 가을 밤 두사람은 술집에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다가, 문득 박시인이 새로 지은 시라면서 <이별의 노래>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고 합니다. 시를 속으로 읽는 순간 몽클하는 감동이 솟구치면서 너무도 아름답고 깨끗한 시상에 빨려드러 갔다고 김성태는 말하였다.
그리고 그날 박시인과 헤어져 여관으로 돌아온 즉시 시의 감흥을 멜로디로 나타냈고 오선지가 없어서 백지에 오선을 긋고 악보를 그림으로서 이 가곡은 그날 밤에 탄생 하였던 것이다. 한편 김성태 박사는 1910년 11월9일 서울 중국 광희동 1가 88번지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중량천 부근의 땅을 소유한 집안이었기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 하였다. 김성태는 조부가 세운 교회에 다니며 합창단원으로 노래를 불렀고 성탄절에는 독창도 하면서 음악을 알게 되었다.
훗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한 후에도 흥난파에게서 바이얼린을 배웠는데 연희전문의 현제명 선생이 음악부를 조직해서 합창과 교향악 활동을 지도하고 있을때 현제명은 어떻게 알았는지 김씨가 바이올린도 잘한다는 소식을 듣고,김씨의 스카우트를 학교에 추천하였고 음악을 너무도 사랑했던 그는 상과에서 음악과로 전공을 바꿔 합창과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던 것이다.
1934년 약관 24세때 연전 졸업과 동시에 체계적인 음악수업을 받기위해 도쿄고등음악학교(현 일본국립음대) 작곡과에 유학, 일본에서 작곡을 전공한 최초의 국내 작곡가가 되었다. 집안은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악 공부를 반대하여 돈을 대어 주지 않았지만 그의 소망을 아는 부인이 부모 몰래 패물을 팔아서 일본유학을 보내었다고 한다. “아내가 아니면 오늘의 저는 아마 없을 겁니다”하며 그는 부인에게 감사하였다. 1939년4월초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자마자 전임 이흥렬씨의 뒤를 이어 경성 보육학교 음악주임이되어 사회의 첫발을 내 디뎠고, 이후 1941년 보성전문학교 음악강사로 옮겨 해방때 까지 재직하다 해방 직후 창립된 경성 음악학교<현, 서울음대> 조교수겸 교무과장이 되어 후학을 지도하면서 1876년 서울 음대학장으로 정년 퇴직할때까지 재직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동심초> <산유화> <추억> <한송이 흰백합화>등의 우리 가곡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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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이웨이 원문보기 글쓴이: 박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