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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大丘, 大邱)를 관향(貫鄕) 삼은 성씨(姓氏)-1
1. 달성김씨(達城金氏)
과거 대구 지명의 추이(推移)에서 달성(達城)과 대구(大丘, 大邱)는 동의어(同義語) 일 수도 있었으나 또는 전혀 다른 별개(別個)임을 가리키는 말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대구서씨(大丘徐氏)와 달성서씨(達城徐氏)는 시조(始祖)부터가 다른 별개의 본관(本貫)이었지만 『달성하씨씨와 대구하씨, 달성배씨와 대구배씨』등은 전혀 같은 대상을 그렇게 임의로 나누어 일컬은 바였다.
전자 서씨(徐氏)처럼 달성(達城)과 대구(大邱)가 별개로 양립(兩立)하는 성씨로 또한 달성김씨(達城金氏)와 대구김씨(大邱金氏)가 있었다. 단 대구김씨 경우와 달리 달성김씨는 시조(始祖)의 성명 외에 그 연원과 유래가 전혀 알려지지 아니한 상태로 전해내려 온다.
곧 대구 지역을 관향으로 삼은 또 하나의 김씨인 달성김씨(達城金氏)가 있었다. 시조가 김담(金淡)이라 하는데 신라김씨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 의하면 김담은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진사(進士를 지냈다고만 되어 있어 여타(餘他)의 사적(史籍나 연대에 대서는 전혀 상고(詳考)할 수가 없다. 또 전후 세계(世系)와 본관을 달성으로 삼은 연유 또한 밝힐 수 없다.
이 달성김씨가 1930년도 국세조사 자료에 나타나지 않아 후손들의 집성촌(集姓村)도 알 수 없다. 다만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달성김씨는 1985년에 총 79가구 439명이요, 2000년에 총 405가구 1,281명인 것으로 조사되어 있으므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관지를 삼은 달성(達城)은 현재 대구광역시 일원의 옛 지명으로 별호(別號)로 삼한시대에는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 했다. 6세기 경에는 신라(新羅)에 귀속되었다. 군현재(郡縣制)가 정비되면서 초기에 위화군(喟火郡:대구광역시 달성군(達城郡) 가창면(嘉昌面) 일대]과 달구화현[達丘火縣:달구벌(達句伐)]로 나뉘어 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景德王) 16)에 위화군(喟火郡)은 대구현(大丘縣)으로, 다사지현(多斯知縣)은 하빈현(河濱縣), 설화현(舌火縣)은 화원현(花園縣), 추량화현(推良火縣)은 현효현(玄驍縣), 치성화현(致成花縣)은 해안현(海安縣)으로 각각 바뀌었다. 그리고 하빈현(河濱縣)·화원현(花園縣)은 수창군(壽昌郡), 해안현(海安縣)은 장산군[獐山郡:경산(慶山)], 현효현(玄驍縣은 화왕군(火旺郡:昌寧)에 속하게 되었다. 현효현(玄驍縣)은 544년(眞興王 5)에 참량화정(參良火停)이 설치된 군사적 중심지이다. 940년(太祖 23) 수창군(壽昌郡)은 수성군(壽城郡)으로 개칭하고 1018년(顯宗 9)에 경주(慶州)의 관할이었다가 1390년(恭讓王 2) 감무(監務)를 두면서 독립했다. 대구현(大邱縣)은 1018년(顯宗 9) 경산부(京山府:星州)의 속현(屬縣)이 되었으나 1143년(仁宗 21) 현령(縣令)을 둠으로써 승격하기 시작했다.1394년(太祖 3)에 대구현(大邱縣)은 수성현(壽城縣)과 해안현(海安縣)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1419년(世宗1)에 군(郡)으로, 1466년(世祖12)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했다. 1601년(宣祖 34) 경상도(慶尙道) 관찰사령(觀察使令)이 설치되면서 경상도(慶尙道)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현종(顯宗) 때에는 풍각현(豊角縣)을, 숙종(肅宗)때에는 화원현(花園縣)을 다시 합병하여 면적을 확대함은 물론 교통의 요지를 확보했다. 영조(英祖) 때에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변경하였으며, 1895年(高宗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大邱府) 대구군(大邱郡)이 되었다가 1914년 군면페합(郡面廢合)으로 대구부(大邱府)의 시가지 부분인 대구면(大邱面)이 대구부(大邱府)로 독립하고 옛 대구부(大邱府의 일부와 현풍군(玄風郡)의 일부가 통폐합되어 달성군(達城郡)이 되었다.1938년 달성군(達城郡)의 일부가 대구부(大邱府)로 편입되었고, 1949년에는 대구시(大邱市)로 개편되었다. 1981년에 대구직할시(大邱直轄市)로 승격되었고, 1988년에 달서구(達西區)가 신설되었다.1995년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로 개편하면서 달성군(達城郡)을 통합하였다.
2. 달성서씨(達城徐氏)
달성서씨(達城徐氏)는 대구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姓氏)이다. 달성서씨(達城徐氏)의 시조 서진(徐晉)은 고려시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오르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지면서 달성에 세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진(徐晋)의 출생 년도는 대략 서기 1260년에서 1280년 사이로 추정된다. 부인은 초계주씨이다. 조선 후기 간행된 《만성보(萬姓譜)》에 달성서씨의 시조 서진이 대구서씨의 시조 서한(徐閈)의 증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달성서씨 유허비는 대구 달성공원(達城公園)에 있다.
달성서씨는 시조인 서진이 봉익대부 판도판서에 오르고 달성군에 봉해진 이후 아들 서기준(徐奇俊)과 손자 서영(徐潁)까지 3대에 걸쳐 달성군에 봉해졌다. 이후 증손인 서균형(徐鈞衡)이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신돈(辛旽)을 탄핵하고,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의 아들 서침(徐沈)은 정몽주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조선 개국 이후 전의소감(典醫少監)을 지냈다.
서침이 달성에 살고 있을 때 조선 세종조에서 달성을 나라의 관방으로 쓰겠다며 거두어 들이고자 하며 그 보상책을 논의하자 서침이 보상받기를 사양하고 그 대신 대구 부민들이 관청에 바치는 적모의 이자를 한 석당 닷 되씩을 감해 줄 것을 주청하니 조정에서 특별히 허락하여 대구 부민들이 조선말까지 그 혜택을 받았다. 서침의 박시제중(博施濟衆)에 감복(感服)한 대구 사림(士林)들이 1665년에 대구에 구암서원(龜巖書院)을 건립하고 서침을 봉안하여 매년 제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고 달성은 달성공원으로 바뀌어 대구 시민들의 도심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서침은 3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장남 서문한(徐文翰)은 승사랑으로 광흥창 부승을 거쳐 현감을 지냈고, 차남인 서문간(徐文幹)도 중시에 올라 현감을 역임했으며, 3남 서문덕(徐文德)은 이조정랑과 만경현감을 지냈다. 또 대사간이었던 서충(徐衷)의 증손인 서한정(徐翰廷)은 세종 때 진사로 태학에서 학문을 연구했으나,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소백산 기슭에 은거하였다.
임진왜란 때 서응시(徐應時)는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휘하에 들어가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으며, 서인충(徐仁忠)은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김상헌과 함께 화의를 반대했다. 또 서수천(徐壽千)은 이순신 막하에서 선봉수문장으로 임명되었다.
근현대 들어 구한말에는 시서화에 능해 팔능(八能)이라 불렸던 서병오(徐丙五)가 있으며,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서상일(徐相日)과 총독부 요인을 암살하려다 체포된 서상한(徐相漢) 형제가 유명하다. 또 사헌부 감찰 서목렬(徐穆烈)의 아들 서재승(徐在承)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영주 근방에서 활약하였다.
달성서씨는 고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다. 서균형(徐均衡), 서좌(徐坐)가 고려 문과에 올랐고, 서도(徐渡), 서변(徐忭)이 조선에서 문과에 올랐으며 기타 무과(武科) 23인. 생진시(生進試) 14인이었다.
통계청에 의하면 달성서씨 인구는 1985년 94,873가구, 398,363명, 2000년에 132,270가구 429,353명,. 2015년에 407,431명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달성서씨의 집성촌으로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동, 동구 도동, 북구 태전동(이매), 경북 영천시 본촌동, 봉동, 작산동, 포항시 구룡포읍 구만리, 상주시 공성면 평천리,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 안동시 남후면 수하동, 청송군 파천면 지경리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참고:대구서씨와의 관계]-달성(達城) 서씨와 대구(大丘)서씨는 족보상으로 시조가 다르다. 달성서씨는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있고, 대구서씨는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 서한(徐閈)을 시조로 하고 있다.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는 그 근원이 같다고 추측은 되지만 분파된 시기와 계대를 확실히 고증하기 어렵다. 달성서씨는 향파(鄕派)로 대구서씨는 경파(京派)로 부르기도 한다. 달성서씨는 서한의 증손으로 추측되는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대구서씨는 시조 서한(徐閈) 이후 2∼6세의 세계가 실전되어서 고려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지낸 7세 서익진(徐益進)을 중시조로 모시고 대동보(大同譜)를 서로 달리하고 있다. 달성서씨는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파라 하고 대구서씨는 소윤공(少尹公)파라고 갈래 지우기도 한다. 두 파는 1702년(肅宗 28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 하여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으나 1736년(영조(英祖) 12년)에 경파(京派)만이 단독 족보를 만들어 대구서씨(大丘徐氏)로 갈라섬으로써 양파가 완전히 족보를 달리하게 되었다. 조선조 방목 등 각종 문헌에 대구서씨 인물들의 관향이 달성으로 되어 있다.
3. 달성하씨(達城夏氏-大邱夏氏)
달성하씨(達城夏氏)는 현재의 대구광역시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 중 하나인데 대구하씨라고도 일컫는다. 1923년(일제 대정 13년) 전고대방(典攷大方)에 대구하씨(大丘夏氏)로 나타난다.
달성하씨 시조는 중국 송(宋) 나라에서 대도독(大都督)을 지낸 하흠(夏欽)이다. 그는 고려 인종(仁宗, 1122년~1146년) 때 고려에 귀화하여 달성(達成, 대구)에 정착하였고, 그의 아들 하용(夏溶)이 나라에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으며 그 후 후손들이 본관을 달성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달성부(達城府)에 토박이 성씨(姓氏)가 다섯이 있는데 하씨(夏氏)가 서씨(徐氏),배씨(裵氏),백씨(白氏),이씨(李氏)와 열립(列立)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흠의 현손 광신(光臣)이 고려 때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하였으며, 혁하(赫河)가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조선조에 와서는 인경(仁敬)이 첨지중추부사를, 시우(時雨)가 부호군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외 정조 때의 학자 시찬(試鑽)은 학행으로 유명했으며,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열암집(悅庵集)'을 저술했다.
오늘날에 와서 하씨(夏氏)는 달성을 단본으로 하여 경북 달성, 경산 지방과 경남 밀양, 강원도 원주지방, 전북 순창, 장수 지방 등지에서 많이 살고 있다. 통계청(統計廳) 인구조사(人口調査)에 따르면 달성하씨는 1985年에 總 713家口 2,823名이던 것이, 2000年에는 1,250가호 4,028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지 달성(達城)은 현재 대구광역시 일원의 옛 지명으로 별호로 삼한시대에는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 불렸다. 6세기 경에는 신라에 귀속되었다. 군현제가 정비되면서 초기에 위화군(喟火郡: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일대)과 달구화현(達丘火縣:達句伐)으로 나뉘어 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위화군은 대구현(大丘縣)으로, 다사지현은 하빈현(河濱縣), 설화현은 화원현(花園縣), 추량화현은 현효현(玄驍縣), 치성화현은 해안현(海安縣)으로 각각 바뀌었다. 그리고 하빈현‧화원현은 수창군(壽昌郡), 해안현은 장산군(獐山郡:慶山), 현효현은 화왕군(昌寧)에 속하게 되었다. 현효현은 544년(진흥왕 5)에 삼량화정이 설치된 군사적 중심지이다. 940년(태조 23) 수창군은 수성군(壽城郡)으로 개칭하고 1018년(현종 9)에 경주의 관할이었다가 1390년(공양왕 2) 감무를 두면서 독립했다. 대구현은 1018년(현종 9) 경산부(京山府:星州)의 속현이 되었으나 1143년(인종 21) 현령을 둠으로써 승격하기 시작했다. 1394년(태조 3)에 대구현은 수성현과 해안현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1419년(세종 1)에 군으로, 1466년(세조 12)에 도호부로 승격했다. 1601년(선조 34) 경상도 관찰사영이 설치되면서 경상도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현종 때에는 풍각현(豊角縣)을, 숙종 때에는 화원현을 다시 합병하여 면적을 확대함은 물론 교통의 요지를 확보했다. 영조 때에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변경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대구군이 되었다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대구부의 시가지 부분인 대구면이 대구부로 독립하고 옛 대구부의 일부와 현풍군의 일부가 통폐합되어 달성군이 되었다. 1938년 달성군의 일부가 대구부로 편입되었고, 1949년에는 대구시로 개편되었다. 1981년에 대구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88년에 달서구가 신설되었다. 1995년 대구광역시로 개편하면서 달성군을 통합하였다.
이 문중의 유적으로는 만촌동에 하효자정려각(夏孝子旌閭閣)과 독무재(獨茂齋)가 있고, 망우당공원에 ‘달성하비유허비(達城夏氏遺墟碑)’가 세워져 있는데, 이가원(李家源)이 짓고, 서수생(徐首生)이 글씨를 썼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達城은大邱의舊號이다當初新羅時에는達句火縣또는達弗城이요景德王時에이르러大丘縣으로고쳐졌고朝鮮世宗時에는郡으로昇格하고世祖時에는都護府로昇格되어드디어嶺南의雄府로크게발전되었다東國與地勝覽에依하면達城府에는토박이姓氏다섯이살고있는데夏氏가裵白徐李와함께列立하였다達城夏氏世譜를詳考하면夏氏는아득한옛날春秋時代에서비롯되어秦漢唐을거쳐趙宋에이르러漸次繁昌하게되었으며始祖大都督欽公이宋에서高麗에옮겨왔고그의아들溶이胡兵을물리친功勳으로達城君에受封되면서부터府南立巖골지금의鳳德洞에定着하고達城으로貫을삼았다達城君의아들致雲은大將軍이요曾孫에光臣과右臣두兄弟가있었는데昆光臣은明宗때벼슬이吏部侍郞에이르렀으며季右臣은淳州府使로到任하여그곳에定着하였으므로그後孫들이湖南의淳昌潭陽一帶에世居하고特히光臣은至極한孝誠으로老母를奉養하였기에그에關한傳說的인이야기가오늘에이르기까지傳해오고있다어느날病床에누운老母가光臣에게복숭아가먹고싶다고하였으나때는깊은겨울이므로求得하기가어려웠다光臣이뒷산에올라가自己孝誠이不足함을恨歎하고있을때瞥眼間큰호랑이가나타나꼬리를흔들며등에타란시늉을하기에光臣이그등에타고어떤산골외딴집으로가게되었는데그집에서仙人으로부터복숭아를얻어돌아왔다고한다그뒤母夫人의喪을當하여墓곁에三年廬墓하였으므로忠肅王丁卯年에旌閭門을세우게하고子孫들에게는赴役을免除해준事實이嶺南地理誌와江漢黃景源의孝子夏公旌閭碑에실려있다孝子光臣에서副護軍時雨에이르기까지十四世에걸쳐벼슬이이어졌으며특히光臣의十二代孫同樞公仁敬은壬辰倭亂을當하여十四歲의어린나이로祖上의來歷을적어後孫에게傳함으로써家門의所自出을알게하였으며그의아들雲瑞는宣祖때武科에올라벼슬이訓練院判官에이르렀고自身과子孫三世에八人이登科하였으므로그가살고있던옛터에八科亭이있었다夏氏의先世에있어서는거의武勳으로門戶를빛내어왔으나英正以後에는學文과德行을닦아儒家로써의새로운機運을열었다雲瑞의五代孫悅菴時贊은禮學에밝아일찍이八禮節要를著述하였고晩年에獨茂巖棲란書齋를짓고더욱學文에精進하여文名이높았으며悅菴文集五卷이上梓되어序는梅山洪直弼이짓고跋은吏曹判書徐能輔가지었다그弟子徐隣淳등이스승의遺德을追慕하여獨茂齋를짓고景德祠를세워每年三月上丁에享禮를치르고있다이제大邱市의發展에따라夏氏故庄의周圍가鬧熱한都市로變貌되어滄桑의느낌이없지않았으므로夏氏의後孫은先祖의빛나는遺蹟이점차湮滅될까두려워하여峨峨遺墟碑를이곳嶺南第一關에세워由緖깊은一家의歷史를後世에길이傳하려한다써銘하여가로되達伐의土姓으로近千載흐른오늘지난歷史燦然토다出天한그孝行의旌閭閣이우뚝솟고높이쌓인그陰德은沙鹿精靈어렸도다武勳으로빛낸傳統선비行實새로닦아獨茂齋그글소리琅浪히들리는듯아늑한江亭東山瑤花芳草瀾漫하니이빗돌에글을새겨千秋에알리노라 檀紀四三二十年丁卯淸明節 文學博士眞城李家源謹撰,文學博士達城徐首生謹書,達城夏氏大宗中建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