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나타의 첫 마디를 듣고도 작곡자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면 그는 분별력을 가진 전문가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불협화음으로 시작하여 불협화음을 거쳐 또다시 불협화음으로 ... 오직 쇼팽만이 이렇게 시작하며 이렇게 끝낼 수 있다. ”- 로베르트 슈만
엄청난 에너지를 함유하고 있는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은 쇼팽의 창작력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음악적 축복을 담뿍 받고 탄생한 피아노 레퍼토리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1839년 여름 조르주 상드의 별장이 있는 노앙에서 작곡된 이 작품은 비관습적인 스케일을 차용해 대작을 작곡하려 한 쇼팽의 천재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드라마틱한 스타일로 시작되며 뒤이어 짧은 동기들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칠고 난폭한 표정들을 요약해버린다. 쉼 없이 다채로운 분위기가 흐르는 동시에 감상자들의 시선을 여기저기로 분산시킨다는 점에서 이 소나타는 다른 쇼팽 작품들과는 다른 변별성을 띄고 있다. 그리고 이따금씩 강렬한 충동적인 욕구가 등장하면서도 그 드라마틱한 열기가 끝나고 다시 시작할 때까지 휴식을 취하거나, 충분히 반영을 할 시간을 허락하는 모습은 일종의 병적인 흥분-이완 상태를 묘사하는 듯하다.
비록 쇼팽은 작품에 고정된 프로그램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했지만(출판업자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빗방울 전주곡’ 혹은 ‘혁명 연습곡’과 같은 부제가 붙기도 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시적 상상력을 통해 스토리를 환기시키고 있음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예를 들어 스케르초 같은 작품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 흥분적이며 자기반성적인 요소를 망각케 한다. 폴로네이즈는 영웅적인 이미지를 가진 캐릭터의 삶과 고뇌의 과정을 생각게 하고, 전주곡은 시적 화자의 머릿 속에 반영된 이미지들에 대한 인상주의적 환영을 상징한다. 19세기 이후의 많은 피아니스트들(특히 알프레드 코르토)은 이러한 자연과 개인의 심상으로부터 기인한 ‘이미지’를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쇼팽의 음악에 각인해 왔다.
쇼팽에게 실연의 아픔을 안겨준 마리아 보진스카야. <출처: wikipedia>
쇼팽은 1839년 8월 경 자신의 친구인 줄리앙 폰타나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나는 여기서 Bb단조의 소나타를 작곡하고 있다네. 자네도 알고 있는 ‘장송 행진곡’이 이 안에 포함될 것일세. 먼저 알레그로 악장이 있고 다음으로 Eb단조의 스케르초, 이어서 ‘장송 행진곡’과 세 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피날레로 이루어져 있지. 장송 행진곡 다음에 등장하는 짧은 악장에서는 왼손과 오른손이 긴 유니즌으로 수다스럽게 떠들어댈 것일세.” 여기서 “자네도 알고 있는 장송 행진곡”이라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쇼팽은 1837년경에 이 작품을 이미 작곡해놓은 상태였다. 당시 쇼팽은 16세 연하의 제자인 마리아 보진스카와 헤어지면서 받은 마음의 상처에서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1835년 여름 쇼팽은 파리에 있는 동향의 친구인 안토니 보진스카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여동생인 마리아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이듬해 1836년 그들이 머물고 있는 마리엔바트 온천지를 방문했을 무렵 이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본인들끼리 약혼까지 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둘의 관계는 깨지게 되었다.
그 이후 쇼팽은 마리아와 주고 받았던 편지들을 묶어 ‘나의 비애’라는 제목까지 붙여 보관했다고 한다. 이 소나타가 쇼팽에게 있어서 상처에 살이 차오른 뒤 떨어져나간 딱지인지 아니면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추억의 편린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어찌 되었든 쇼팽의 진솔한 감정들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명곡임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비장한 장례행렬, 묘지를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
감정적인 층위 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도 이 [피아노 소나타 2번]은 대단히 혁신적이다. 낭만적인 열정과 비극적인 우울함으로 가득 찬 1악장 Grave-Doppiomovimento가 그 대표적인 예다. 쇼팽은 전통적인 소나타 양식을 벗어나 반복을 하지 않는 대신 두 개의 주제가 양립하는 새로운 부분을 대치했다. 게다가 대범한 전조와 과감한 도약들이 음악을 더욱 낯설면서도 카리스마 넘치게 만드는 모습 또한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자유로운 발상이다. 비틀린 감정과 전통에 대한 거부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새로운 내용을 담은 양식을 창조해낸, 진정한 쇼팽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불가사의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악장인 것이다.
장송행진곡의 비통한 멜로디는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출처: NGD>
2악장은 Scherzo로서 앞선 악장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음울하고도 거친 분위기를 견지하고 있는 동시에 스케르초(aba)-트리오(cdc)-스케르초(aba)-코다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전통적인 스케르초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3박자의 옥타브 연타로 액센트를 찍어내는 프레이징은 빠르기와 힘에 있어서 피아니스트에게 어려움을 안겨주는 대목이다. 이 스케르초 주제 선율과 Piulento로 지정된 느린 트리오 부분의 구조적 균형과 감정적 긴장감을 이루는 것이 이 악장의 묘미이기도 하다. 이렇듯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은 이질적인 에피소드들의 부침, 불안정한 분위기의 연속으로 인해 전통적인 소나타 양식과는 다른 관점에서의 균형감과 통일성을 강조한다.
이 소나타의 중심을 이루는 3악장 Lento, MarcheFunébre, 즉 장송 행진곡은 통렬한 주제 선율을 중심으로 이를 더욱 비장하게 장식하는 장례 행렬이 뒤따른다. A-B-A로 구성된 단순한 구조는 단순한 만큼 그 비통한 멜로디를 강조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 선율은 당시 유럽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혔고, 일상적으로 장례식 대부분에서 이 음악을 사용하게 되었다(1907년 스웨덴을 배경으로 한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화니와 알렉산더]의 장례식 장면에도 이 음악이 등장한다).
대중적으로 널리 유행한 만큼 쇼팽의 장송 행진곡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편곡(에드워드 엘가의 편곡이 가장 유명하다)을 비롯하여 다양한 악기를 위한 대중적인 버전도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이그나시 얀 파데레프스키와 같은 몇몇 19세기 낭만주의 피아니스트들은 이 악장에서 특별한 효과를 내기 위해 마지막 주제가 재현되는 부분에서 육중한 왼손 옥타브를 한 옥타브 더 내려 연주하여 비장함을 더하기도 했다.
마지막 악장 Finale는 소나타의 마지막 악장으로서는 너무나 짧은 길이를 가지고 있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대목이다. 긴 유니즌으로 이루어진 프레스토로서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달려나가기만 하는 만큼 그 방향성과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더군다나 쇼팽은 첫 마디에 sottovoce e legato(낮은 소리의 레가토)라고 적힌 것과 마지막 코드의 포르티시모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표현기호도 기입하지 않았기에 이 악장의 메시지에 대한 궁금증은 증폭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장송 행진곡 뒤에 위치했다는 이유 때문에 리스트의 제자인 칼 타우지히는 “죽은 자들의 떠도는 영혼”이라고, 러시아의 대 피아니스트인 안톤 루빈스타인은 “교회 묘지를 휩쓸고 지나가는 밤 바람의 윙윙대는 소리”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특히 파데레프스키 판본에는 “이러한 기보는 의도적인 것으로서 수수께끼, 폐허의 황량함, 무한한 공허, 꿰뚫을 수 없는 격리된 슬픔, 그밖에 음표 그 자체로서 전달되는 모든 감정들을 상징한다”라고 기술해 놓았다. 이렇듯 3악장까지의 모질고 허망한 고뇌를 한낱 일장춘몽으로 끝내려는 일종의 비극적이면서도 단호한 역설에 가깝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슈만이 이에 대해 “비웃는 듯한 미소를 머금은 스핑크스와 같다”라고 평한 것이 이 짧은 악장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추천음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CBS 스튜디오에서 남긴 스테레오 레코딩(SONY)이 이 작품의 악마적인 요소들과 드라마틱한 흐름의 조화를 개성적인 필치로 살려낸 명연으로 손꼽을 수 있고, 현존하는 피아니스트들 가운데에서는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이지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2008년 신녹음(DG)과 예술적 심미안이 번뜩이는 미하일 플레트네프의 연주(Virgin) 또한 주저함 없이 추천하기에 적합하다. 기인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설득력 높은 전율적인 연주(Naive) 또한 주목할 만하다.
첫댓글 쇼팽의 곡을 듣고 마음의 평정을 찾아 아침을 엽니다.
감사하게 감상 잘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