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풍악(遊楓嶽)
풍악산 유람
정사룡, 1491~1570)
만이천 봉 좋다는 곳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
흩날리는 단풍잎은 옷 위로 떨어지고
찬비 내리는 정양사 향불 사르는 밤
돌이커보니 오십 평생을 잘못 살았노라
萬二千峰嶺略歸(만이천봉영약귀)
紛紛黃葉打征衣(분분황엽타정의)
正陽寒雨燒香夜(정양한우소향야)
蘧瑗方知四十非(거원방지사십비)
정사룡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고위 관리였다. 풍류객과는 거리가 먼 분이다.
그러나 시와 문장이 뛰어나 명나라에까지 필명을 날렸다. 그의 시와 문장은
용의주도하게 다듬어져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냈으나 막상 감동은 적었다.
“正陽寒雨燒香夜(정양한우소향야)” ‘찬비 내리는 정양사 향불 사르는 밤’처럼
운치 있는 구절 뒤에 거원(蘧瑗)처럼 멋없이 딱딱한 말이 나오는 이 시도 그렇다.
거원은 중국 위나라 대부였다. ≪장자≫에 그의 말이 나온다. “行年五十面知
四十九年之非(행년오십면지사십구년지비) ‘50년을 살다보니 그중 49년이
잘못임을 알겠더라’는 뜻이다. 금강산의 절경을 보며 인간의 왜소함을 느끼고
불교의 진리 앞에 인생의 헛됨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다.
[작가소개]
정사룡[ 鄭士龍 ] : 자 운경(雲卿), 호 호음(湖陰)
시대 : 조선
출생 – 사망 : 1491년 ~ 1570년
성격 : 문신, 문인
성별 : 남
본관 : 동래(東萊)
<정의>
조선전기 대제학, 판중추부사,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문인.
<개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 아버지는 부사정광보(鄭光輔)이다. 영의정정광필(鄭光弼)의 조카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07년(중종 2)에 진사가 됐고, 1509년(중종 4)별시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했다.
1514년(중종 9)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1516년(중종 11)황해도도사로서 문과중시에 장원하였으며 사간을 거쳐 1523년(중종 17)부제학이 되었다. 1534년(중종 29)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2년(중종 37)예조판서로 승진이 되고, 1544년(중종 39)공조판서로 다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4년(명종 9)대제학이 됐으나 1558년(명종 13) 과거의 시험문제를 응시자 신사헌(愼思獻)에게 누설하여 파직됐다. 같은 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복직되고 이어 공조판서가 됐다가, 1562년(명종 17) 다시 판중추부사에 전임됐다.
이듬해에 사화를 일으켰던 이량(李樑)의 일당으로 지목돼 삭탈관직 당했다.
그는 일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동안 중국인과 주고받은 시가 많았다. 중국에 다녀와서 『조천록(朝天錄)』을 남겼다.
말을 치밀하게 다듬어 웅대하고 호방하며 기이한 문구 사용하는 한시를 장기로 삼았다. 특히, 칠언율시에 뛰어나 당시 문단에서 그와 신광한(申光漢)을 한시의 쌍벽으로 꼽았다.
관료적인 시인으로 시문·음률에 뛰어났고 글씨에도 능했으나 탐학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저서로는 『호음잡고(湖陰雜稿)』·『조천록』 등이 있고, 글씨로는 광주(廣州)에 있는 이둔촌집비(李遁村集碑)가 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충재집(冲齋集)』
『호음잡고(湖陰雜稿)』
『기언(記言)』
『시화총림(詩話叢林)』
『한국문학통사』2(조동일, 지식산업사, 1984)
『한국한문학사』(이가원, 민중서관, 1961)
[네이버 지식백과] 정사룡 [鄭士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