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577
5월2일 [성 아타냐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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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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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8q3tuc9K1o
[서울대교구 김학수 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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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된 신앙 여정이란 지속적인 깨달음의 길!>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 제자로 간택하신 필립보 사도,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그가 오늘은 정말이지 전혀 엉뚱한 말을 해서 예수님 속을 긁어놓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필립보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랫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공을 들여 제자들에게 특별 과외까지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필립보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나 상심은 무척이나 컸던가 봅니다. 필립보를 향한 예수님 책망의 강도가 아주 큽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우리네 인생이란, 그리고 우리 신앙 여정이란 지속적인 깨달음의 길입니다. 너무나 크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인간의 짧은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 때로 알쏭달쏭한 하느님, 인간의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하느님이시기에 납득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볼 수 있는 맑은 눈이 필요합니다. 깨어있기 위한 부단한 자기 단련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보다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참된 영적 예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평생 죽을 고생을 다했지만, 죽기 일보 직전까지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 인생처럼 불행한 인생도 다시 없을 것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인생은 참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삶은 동물적인 삶, 돌덩어리나 나무토막과도 같은 삶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획득해야 할 깨달음을 과연 어떤 깨달음입니까? 예수님께서 간단하게 그리고 명명백백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는 하나라는 것. 예수님은 곧 그리스도, 메시아,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 자체라는 것.”
더불어 우리가 획득해야 할 깨달음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죄와 비참으로 얼룩진 이 세상 한가운데, 고통받는 우리 동료들 안에 현존하신다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
죽음은 생의 끝맺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을 시작하기 위해 묶은 껍질을 벗어버리는 과정임을 깨달음, 마지막 날은 우리네 인생 곡선 안에서 가장 하한선을 긋는 절망의 순간이 아니라 절정의 순간임을 깨달음, 하느님은 똑똑하고 잘난 내가 아니라 부족하고 죄인인 나를 사랑하신다는 깨달음, 나란 존재의 부족함을 아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깨달음, 고통스러운 매일의 현실이 사실은 꽃봉오리처럼 소중한 것임을 깨달음, 부족해 보이는 이웃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운 대상임을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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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q50omlsRh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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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마리아께 먼저 동기화 하라>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
찬미 예수님.
성모님의 달 5월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을 왜 사랑하고 공경해야 하는지 묵상하려 합니다. 얼마 전 박진영 씨가 가톨릭을 비판하며 예수님께 직접 아뢰면 되지 성모님이나 성인들을 통하여 기도를 전달하느냐고 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육체로 살아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 지금은 하느님으로 계시는 데 그럴 필요 없이 바로 예수님께 아뢰면 된다는 것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첫 기적을 거부하시는 예수님께 성모님은 첫 표징을 얻어내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왜 안 될까요? 하늘나라에서 그분들 관계가 바뀐 것일까요? 이것은 동기화의 하나 됨의 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무언가와 동기화되어 삽니다. 동기화란 그것에 속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동기화를 이해하기 위해 ‘아바타’란 영화를 생각해봐도 좋겠습니다.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인간의 몸을 기계 안에 눕히고 나비족 아바타와 신경을 연결합니다. 핵심은 링크입니다. 그가 아바타와 연결되었을 때, 이전 자기 몸과는 끊어집니다. 아바타가 달리면 그는 자유를 느끼고, 아바타가 다치면 현실의 몸도 비명을 지릅니다. 연결된 대상의 감각이 자기 감각이 됩니다.(출처: 제임스 카메론 감독, 영화 '아바타'(2009))
우리도 그렇습니다. 자아라는 좁은 캡슐 안에만 갇혀 있으면 체면과 이익이 전부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동기화 되면 그분에 속하게 되고 그분 감정을 공유하게 됩니다. 제이크의 인간 몸은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세였지만, 자신이 동기화한 나비족은 사랑이고 하나이기에 그것에 영광을 돌리고 그 감정도 공유하기로 한 것입니다.
동기화 방법은 그것이 원하는 일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광을 드린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아에게 영광을 드립니다. 돈 벌어오라면 돈 벌고 쾌락을 즐기라면 그렇게 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라면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동기화를 통해 오는 감정은 순간적인 쾌락과 오랜 불만입니다. 내가 동기화한 자아는 기쁨을 모르는 불만족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누구와 동기화되셨습니까?그리스도와 동기화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성모님의 뜻이 되었고, 예수님의 고통이 성모님의 고통이 되었으며, 예수님의 기쁨이 성모님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세상 누구도 성모님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에 완전히 맞추어진 사람은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동기화의 방법은 먼저 그분의 ‘고통’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기쁨에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영광을 올린다는 말은 먼저 상대가 원하는 것, 그분의 고통을 완화해 드리는 일입니다. 아바타가 자기 인간들의 탐욕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나비족의 고통을 함께하고 탐욕자들과 맞서 싸우는 고통을 감내할 수 있어서 나비족과 완전히 동기화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와 동기화하면 될까요?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모 마리아와 동기화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성모님은 구세주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에 맞추어지도록 도와주시는 가장 안전하고 부드러운 어댑터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깊은 뜻을 한 번에 다 이해하지 못할 때, 어머니는 그 뜻을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풀어 줍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과학적 비유로 말하면 전압 어댑터와 같습니다. 작은 기계를 고압선에 직접 연결하면 기계가 타
버립니다. 전기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기계가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댑터가 필요합니다. 전류의 본질을 바꾸지 않고,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해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기화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십자가의 고통에 우리 심장이 찔림을 감내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고통은 그 고통보다는 우리가 접근하기 더 쉽습니다.
성녀 베르나데트는 성모님을 통해 십자가를 배웠습니다. 1858년, 성모님께서는 가난하고 병약한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 아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캐물었고, 어른들은 수군거렸고, 사람들은 구경거리처럼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날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샘으로 가서 마시고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맑은 샘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베르나데트는 손으로 흙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진흙탕 같은 물이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어린 소녀가 흙탕물을 마시고, 얼굴에 진흙을 바르는 모습은 세상 눈으로 볼 때 우스꽝스럽고 초라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행동을 죄인들을 위한 보속의 표징으로 삼으셨습니다.(출처: 르네 로랑탱, 『루르드의 베르나데트』; 루르드 성지 전승)
여기서 성모님의 교육이 드러납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한꺼번에 십자가 전체를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채찍질과 못 박힘을 그대로 체험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흙탕물, 조롱, 작은 보속, 순명이라는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방식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약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자녀가 도망가지 않을 만큼, 그러나 반드시 자라날 만큼 십자가를 나누어 줍니다.
베르나데트가 성모님과 동기화되었기에 그 초라한 일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바로 동기화되었다면 두려워 도망쳤을 것입니다. 성모님과 동기화되었기에 베르나데트는 조롱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동기화입니다. 하와는 뱀과 동기화되었고, 마리아는 말씀과 동기화되었습니다. 하와는 자아에게 영광을 돌렸고, 그 결과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반대로 마리아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고, 그 결과 하느님의 생명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와는 뱀의 말을 받아들여 죽음을 낳았고, 마리아는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새 하와이십니다. 뱀의 말에 흔들린 첫 하와의 길을, 말씀에 순명한 새 하와가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감정을 그리스도께 맞추셔서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저도 화장실에 대변 봉투를 빠뜨렸을 때 바로 아버지께 가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중개하시는 분이시고 하늘 나라에서도 이 관계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한 번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어머니입니다.
성경에 하느님 나라에서도 크고 작은 사람들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이들은 중개자를 통해 그리스도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보여주신 카나의 기적의 표징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께 달려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삼아야 합니다. 교부 성 암브로시오는 『루카 복음 해설』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마리아의 영혼이 여러분 각자 안에 있어 주님을 찬미하게 하십시오. 마리아의 정신이 여러분 각자 안에 있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게 하십시오.”(출처: 성 암브로시오, 『루카 복음 해설』 2,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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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의 일입니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다가 다투게 되었습니다. 덩치가 큰 친구는 제 목을 잡았고, 체구가 작았던 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았습니다. 서로 놓으라고 울면서 버티다가 결국 힘이 빠져 손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습니다. 어렸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 붙잡고 있으면 고통이 계속되고, 손을 놓으면 평화가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된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목을 붙잡고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이란을 공격했습니다. 이란의 핵 시설을 공격한다고 했습니다. 이란의 정권을 교체한다고 했습니다. 이란의 미사일 공격 능력을 없앤다고 했습니다. 작년과 달리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에 즉각적으로 반격했습니다. 미국이 이란의 군사시설을 공격하면, 이란은 미국의 군사 기지를 공격합니다. 미국이 이란의 에너지 시설을 공격하면, 이란은 주변국의 에너지 시설을 공격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 시설을 공격하면 이란은 이스라엘의 핵 시설을 공격합니다.
어린 시절 저와 친구는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금세 평화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이란은 어찌 그런 이치를 모르고 서로서로 파국으로 몰아가는 행위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단순히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이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의 에너지인 석유 공급이 무너지면 세계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역사의 시계를 돌려보면 지금의 갈등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란과 미국의 관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란은 미국과 매우 가까운 나라였습니다. 팔레비 왕조 시절, 이란의 산업과 정유 시설은 미국과 서방의 도움으로 발전했습니다. 또한 2015년에는 핵 협상이 이루어지면서 갈등을 넘어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도 열렸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와 불신이 쌓이면서 그 관계는 다시 긴장과 대립으로 돌아섰습니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란의 전신인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는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해 주었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키루스를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이’라고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에스더는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어 자기 민족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 냈습니다. 페르시아의 왕은 에스더의 청을 받아들여 유다인을 살리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처럼 성서 안에서 페르시아, 곧 오늘의 이란은 이스라엘을 살린 나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 이유를 인간의 마음 안에서 찾으십니다. 교황님은 사제들과 신앙인들이 빠질 수 있는 세 가지 유혹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영적 세속성’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을 추구하는 유혹입니다. 희생 없이 승리만을 원할 때 우리는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둘째는 ‘숫자에 의존하는 실용주의’입니다. 사람을 숫자로 환산하는 유혹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전체의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더 낫다”라는 가야파의 논리가 오늘도 반복됩니다. 셋째는 ‘기능주의’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 효율과 계획을 앞세우는 유혹입니다. 기도보다 전략이 앞서고, 믿음보다 계산이 앞설 때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놓치게 됩니다. 이 유혹에 대해 본회퍼 목사님도 깊이 경고했습니다. 목사님은 ‘값싼 은혜’를 이야기하며, 십자가 없는 은혜, 회개 없는 용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신앙은 참된 은혜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마저도 자기 편의대로 바꾸려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이 모든 유혹의 결과는 하나입니다.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들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혹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진리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에 갇혀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진리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안의 유혹 때문입니다. 이제 신앙 안에서 다시 배워야 합니다. 욕심을 놓고, 미움을 놓고, 자기 확신을 내려놓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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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투명 인간”이라는 영화를 보며 처음에는 투명 인간이 되면 재미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한다면? 아무도 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고 생각해 보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완전히 비우심으로써 하느님 아버지를 가장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셨고, 특히 십자가에서 당신을 온전히 내어놓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찬란하게 비추셨습니다. 고통스러우셨을 테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투명한 유리창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투명한 존재가 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는 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빛이 나를 통하여 세상에 비추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내세우려 할 때 하느님의 빛은 가려집니다. 그러나 내가 겸손히 나를 낮출 때, 하느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아타나시오 성인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는 오늘 복음의 진리를 온 생애로 증언하였습니다. 자신의 명예나 안위보다 진리를 선택하였고, 여러 차례 유배를 당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참된 신성을 지니셨다는 교리를 수호하였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투명한 증인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나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구하며, 나를 내세우기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투명한 존재가 되어 봅시다. 하느님의 빛이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비추어지도록 기꺼이 투명해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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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7-14: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일치를 드러내시는 장면이다.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며 불안해했고, 필립보는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8절)라고 청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단호히 대답하신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9절) 예수님은 단순한 하느님의 대리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완전한 모습이시다. 바오로 사도도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이라고 선포한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곧 아들을 보는 것이며, 아들을 본다는 것은 곧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드러내는 계시자이시다.”(Adversus Haereses IV,6,6) 즉,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수 없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10절).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시면서도 구별된 위격으로서, 사랑의 관계, 곧 성령 안에서 하나를 이루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삼위일체 신비를 묵상하며 이렇게 표현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사랑하시고, 그 사랑이 바로 성령이시다. 그 사랑 안에서 세 위격은 하나이시다.”(De Trinitate XV,17,27) 이 사랑의 일치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우리 구원 안에서 체험되는 신비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12절). 성 치릴로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온 세상을 복음화하고, 많은 이들을 새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In Ioannis Evangelium, lib. 10). 즉, 주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 이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일은 더 큰 차원에서 계속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3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이름으로”라는 조건이다. 예수님과 일치된 마음, 아버지의 뜻에 맞는 청원만이 이루어진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과 합치되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In Ioannem Hom. 76,2)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단순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삶을 따를 때, 우리는 이미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와 일치하는 삶 안에 들어간다. 주님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알고,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는 삶을 살아가자.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참된 영광을 드리는 우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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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청하는 것>
요한 14,7-14 (아버지께 가는 길)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청하는 것>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
믿음께
청하는 것은
청해야 하는 것은
청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믿음뿐입니다
희망께
청하는 것은
청해야 하는 것은
청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희망뿐입니다
사랑께
청하는 것은
청해야 하는 것은
청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랑뿐입니다
사귐께
청하는 것은
청해야 하는 것은
청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귐뿐입니다
품음께
청하는 것은
청해야 하는 것은
청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품음뿐입니다
스밈께
청하는 것은
청해야 하는 것은
청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스밈뿐입니다
나눔께
청하는 것은
청해야 하는 것은
청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눔뿐입니다
돌봄께
청하는 것은
청해야 하는 것은
청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돌봄뿐입니다
섬김께
청하는 것은
청해야 하는 것은
청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섬김뿐입니다
살림께
청하는 것은
청해야 하는 것은
청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살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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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라>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무엇을 청할 때는 ‘예수님의 이름’이 전제되어야 한다. 내 이름으로 내 바람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하여 청해야 한다. 그리하면 이기심을 채울 수 없고 남에게 해가 되는 무엇인가를 청할 수도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죽음까지 감당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구원을 청했듯이 우리도 이웃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게 간절히 청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불러야 한다.
하느님의 뜻에 부합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바람을 알아들어야 하고, 알아듣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침묵해야 한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침묵하는 사람이다.”(성녀 마더 데레사) 깊은 침묵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따라야 한다. 사실 눈과 입은 닫고 가슴과 귀를 열면 무엇인가를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은 책에서 하느님을 탐구하려 한다. 그러나 그분을 발견하는 것은 기도 안에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들어야 한다.
피아노를 치면서 피아노를 배우듯 기도하면 할수록 기도를 배우게 되고 더 잘하게 된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를 잘하려면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혹 구해도 얻지 못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했는지 살펴보자. 분명 주님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말씀이 우리의 기쁨이며 희망이길 바란다. ‘인간 아무개의 이름으로 청하면’ 인간적인 것을, 받게 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청하면,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의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하느님께 비는 걸인”(프란치스코교황)이기 때문이다.
“ 주 하느님, 주님께서 다른 이를 위해 쪼개진 빵이 되신 것처럼, 저희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멈추고,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처럼, 곧 다른 이를 위하여 살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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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4세기 이집트 사막의 한 원로 수도자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수도자는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임종 순간, 그의 머리맡에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이 울음소리에 깨셨는지 지그시 눈을 뜨십니다. 그리고 세 번 웃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임종을 앞둔 스승님께 그 이유를 물었고 그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먼저 나는 그대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웃었소. 두 번째는 그대들 가운데 아무도 준비된 사람이 없어서 웃었소.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의 노고를 모두 벗어던지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기에 기뻐 웃었소.”
이 말을 마치고 원로 수도자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일화가 크게 다가옵니다. 우선 우리 역시 죽음의 순간에 이렇게 유쾌할 수 있을까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은 하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지금을 잘 준비하는 사람의 몫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에, 또 하느님께 대한 부족한 믿음으로 인해서 지금을 잘 살지 못합니다. 후회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하느님 나라를 가고자 하지만, 지금 당장은 가지 않으려는 우리가 아닐까요? 왜냐하면 준비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라고 청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세나 엘리야의 경험처럼,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광이 눈앞에 나타나는 장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늘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압도적인 증거를 통해서만 믿겠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구름 속이나 번개 가운데 숨어 계신 분이 아니라, 목수 출신의 초라한 모습으로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 완벽하게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셨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곧 ‘눈에 보이는 하느님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철저하게 지금을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기적이나 확고한 증거만을 요구하게 되면, 주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세상 안에서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주님을 이용하려고만 할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죽음의 순간에서 유쾌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준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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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7-14)
1)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콜로 1,15-16ㄱ)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2ㄴ-3)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2.16ㄴㄷ)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가운데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말과 같고, 예수님을 보는 것은 곧 하느님을 뵙는 것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 말들은 결국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다.”가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뵙고 싶으면 예수님을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초상화나 사진 같은 것을 보고 하느님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과 말씀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외모는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말씀이 중요합니다.>
2) “하느님이신 분이 왜 사람이 되셨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6-18)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데리고 가려고 인간들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서, ‘사랑이란, 내려가 주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3)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는, “내가 승천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너희가 일해야 한다. 너희는 내가 갔던 곳보다 더 먼 곳까지 가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입니다. 여기서 ‘더 큰 일’이라는 말은, ‘더 위대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더 먼 곳까지 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약속입니다. 또는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하시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기도 하고, ‘예수님께’ 기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에(요한 10,30),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과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같은 일’입니다. 또 아버지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과 예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도 ‘같은 일’입니다. 기도문의 내용에 따라 아버지와 예수님을 구분할 때가 있긴 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는, “앞으로 너희가 하게 될 일은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어 주겠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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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서동원 다미아노 신부님]
<나를 믿는 사람은>
어느 수도원의 원장님이 많은 제자 가운데 특별히 한 제자만 사랑했습니다. 그는 제자들 가운데 가장 못생기고 머리도 가장 나빴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원장님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편애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이런 불만이 점점 불거질 무렵, 원장님은 제자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새를 한 마리씩 나눠 주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이 새를 죽여 다시 이 자리로 모여라.”고 했습니다.
모두 모였을 때 다른 제자들은 모두 새를 죽여 가지고 왔지만 사랑받는 그 제자만은 새를 산 채로 안고 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말귀도 알아듣지 못한다면서 그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원장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왜 새를 죽이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 제자는 대답했습니다.
“원장님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조용하고 으슥한 곳을 찾아도 하느님은 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차마 새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원장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이 제자를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많은 사람은 세속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는 ‘주님은 어떤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실까?’ 하는 물음을 던지며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구약의 성조들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해 달라는 것인데, 예수님은 당신을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마치 수도원 원장님의 마음을 깨달은 그 제자처럼 인간적 나약함과 부족함에도 스승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한 주간을 마무리하는 부활 4주간 토요일입니다. 그동안 ‘내 이름으로’ 행했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새겨두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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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성호 요한보스코 신부님]
<부지불식간>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으며, 귀로 들을 수 없는 분. 그분은 바로 야훼 하느님이십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대한 체험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부지불식간에 우리 곁을 다녀가시기 때문에 아마도 그들의 그러한 바람은 이미 이뤄져 있을 것입니다.
신학교 3학년 때, 저는 청년성서 연수를 통해 젊은이들 안에 살아 숨쉬고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들 처음에는 세상의 모든 짐을 자기 혼자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기도도 하지 않던 젊은이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눈에 띌 정도로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쁨에 가득 찬 찬양과 서로 앞 다투어 하던 떼제 기도, 능동적이고 즐겁게 연수에 임하는 자세 등 그 모든 시간들 안에서 하느님이 분명 이들과 함께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지요.
진정 처음에는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자신들은 늘 어둡고 깜깜한 곳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하느님께 당신이 어디 계시냐며 대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러한 그들을 인도해 주셨고 그 크신 사랑을 깨닫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랍고 신비로운 기적이었고, 하느님께서 분명히 살아 계신 분이라는 것에 대한 뚜렷한 확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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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아보기>
언젠가 이태리를 다녀온 옛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이태리에서 시작된 새로운 유아교육방법(유치원)에 대한 체험을 그 친구가 이야기 해주었다.
그곳 아이들은 그냥 어떤 물건을 보고 그림을 그리지 않고, 음악을 듣고나서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냄새를 맡아보고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맛을 보고 그 맛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등 어린아이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무수한 가능성에 열려있는 자세가 충격적이더란 이야기였다.
우리는 무엇을 볼 때 늘 우리의 경험안에 고정된 시각으로 만사를 바라보기 때문에 정작 그 안에 숨어있는 깊이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알았으면 그게 바로 하느님을 아는 것이고 나를 보았으면 그게 바로 하느님을 본 것이다>고 하신다.
우리는 자꾸만 예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말을 잘 하는지 못하는지, 감동적인지 별로인지, 거기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정작 그분이 보여 주시려고 하는 하느님을 못보게 되고 정작 그분이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그 하느님을 몰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미사를 봉헌하면서도 그 안에서 우리와 함께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를 봉헌하시는 예수님을 보지는 못하고 사제가 미사를 잘 드리는지, 제대에 꽃이 잘 어울리는지, 독서하는 사람은 잘 하는지, 해설자는 또박또박 잘 하는지, 사제는 강론을 잘 하는지, 마이크 상태는 좋은지... 이런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못보고 정작 깨달아야 할 것을 못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립보처럼 하느님께서 <짠!> 하고 당신 자신을 직접 보여주시기를 바라면서 정작 형제자매들 안에서 일하시는 그분을 바라볼 줄 모른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뵈올 수 없을 것이고 하느님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가 꽃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 꽃의 아름다움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색깔이 이쁘니, 모양이 이쁘니, 향기가 좋으니만 생각한다면 나는 정작 보아야 할 것, 깨달아야 할 것을 잡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 꽃을 통해 하느님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그리고 우리 자신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바라보고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뵈올 수 없고 하느님을 알 수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영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렇게 내가 보고 있는 것을 고정된 시각이 아니라 열려있는 시각, 즉 어린이들의 상상치도 못한 사고와 생각으로 거듭나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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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멀리서
찾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우리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순간만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자리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보이는 사람의 얼굴로
드러난 사건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하느님을
설명하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현존으로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사랑 안에서
하나로 일치된
관계적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삶 전체로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 모든 순간이
하느님을 보여주는
순간이 됩니다.
이렇듯 진리는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통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한 존재를 온전히 보면
전체를 본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사랑으로
살아지는 우리들 안에
사랑의 일치로
드러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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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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