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 싸움이 되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한 원칙은 주어를 1인칭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야 '정중함'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가 시끄러운 음악을 계속 틀어놓고 있다. 볼륨을 줄였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기사님, 음악 좀 줄이세요."라고 말한다면 정중한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제가 머리가 아파서요, 음악 소리가 크면 너무 힘듭니다." 이러면 정중한 표현이다. '나는 이렇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싸움이 나지 않는다.
주어가 1인칭으로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게 정확한 팩트이기 때문이다. "조국 교수는 위선자쟎아."라고 말하면 그건 아무리 밥상머리 토론이라 해도 잘못 시작하는 것이다. 정 그 얘기를 하고 싶다면, "나는 조국 교수가 위선자라 생각한다. 너의 생각은 어떠냐?"라고 하는 게 좋다. 조국 교수가 위선자인지 아닌지는 수많은 팩트들을 수집해서 오랫동안 고민해야만 판정할 수 있는 문제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정도의 정보 수집을 하지 못한다. 그저 자기 나름의 생각의 틀을 갖고 개인적인 판단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판단이 완전히 옳기는 아주 어렵다.
"삼성전자 주식은 앞으로 계속 내릴 꺼야" 이 말은 팩트일까?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니, 팩트일 리가 없다. 굉장히 위험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삼전 주식 값이 하락할 꺼라고 생각해"라고 표현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다. 주어는 2,3인칭보다, 1인칭을 쓰는 것이 언제나 더 낫다.
트럼프 행정부가 EU를 완전히 무시한 채 관세 정책과 안보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데 대해 유럽의 반발이 상당히 크다. 이 때문에 EU 정상들이 긴급 회의를 파리에서 열었다. 마크롱 대통령과 대변인은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트럼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행정을 얘기하면서 "미국의 논리를 이해 못하겠다"라고 말한다. 이 회의에서 "트럼프는 행정을 잘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없었다.
토론이 싸움이 되지 않을 두 번째 원칙은 상대의 논리를 비판하려면, 상대의 논리 속에서 모순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이 모르는 아주 중요한 것을 알고 있어서, 그것으로 그의 논리를 허물겠다는 생각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베버의 성층론 논리를 갖고 마르크스의 계급론을 비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마르크스를 비판하고 싶다면, 마르크스의 자체 논리 내에서 모순을 찾아 지적해야 상대방도 부분적으로나마 설득될 것이다.
여당 지지자들이 "늘 부정선거가 아주 심각해. 그러니 비상계엄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 라고 말했다고 치자. 이에 대해 "부정선거 음모론은 다 뻥이야. 증거도 없어." 라고 대꾸해 봤자 저렇게 믿는 사람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 말은 몇 가지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권성동 원내대표가 부정선거는 없었다고 이미 밝혔는데, 그럼 당신은 여당 (국민의 힘)을 지지하지 않는 것인가?" 라고 하면 어떨까? 또는, "중앙 선관위가 그렇게 부정선거를 자행한다면, 다음 선거를 당신은 보이코트하고 투표를 포기할 것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상대방이 선거를 할 생각이라고 대답한다면, "부정한 선거에 왜 당신이 참여하려 하는가?"라고 되물을 수 있게 된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어야 그의 논리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정중함'이 필수이고 또 여러 방법론들을 고민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선 토론의 이런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어디에서도 교육시키지 않는 것같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 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건 토론이 아니라 싸움이 되기 십상이다. 한국 교육은 어릴 때부터 정답 고르기만 시키다 보니 이렇게 합의도 대화도 토론도 불가능해진 세상이 되고 있는 것같다. 나는 토론에 대해 아주 많은 교육과 훈련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전쟁을 징하게 치러 온, 서구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습관을 들이는 항목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