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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大丘, 大邱)를 관향(貫鄕) 삼은 성씨(姓氏)-2
4. 대구국씨(大邱鞠氏)
우리나라에는 지금 286개의 성(姓-2000년 통계)이 있으며, 본관(本貫)을 필수 요소로 하는바, 1985년 인구조사에서 그 본관의 숫자는 3.349개, 200년에 4,179개였다.
우리의 성씨는 삼국 시대 이후 중국의 성씨 제도를 따른 것이 많고, 고려 시대부터 족보를 만들고 귀족 계급의 성씨 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우리 성씨는 대부분 한 음절로 되어 있으나, 남궁(南宮), 독고(獨孤), 사공(司空), 서문(西門), 제갈(諸葛), 황보(皇甫) 등 두 음절로 된 복성(複姓)도 있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성씨가 10만이 넘는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에서는 성씨의 종류가 많지 않고, 김(金)씨, 이(李)씨, 박(朴)씨인 사람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여 특정 성씨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매우 높은 것이 큰 특징이라 하였다. 그러나 2015년 인구 조사에서는 동남아 기타 지역에서 혼인으로 입국한 여성들로 많은 성씨가 불어남으로써 종래와 달리 한자(漢字)로 쓸 수 없는 기타의 성씨가 엄청나게 불어나 지금 우리나라 성씨의 총계는 5,582개인데 한자 성씨가 1,507개, 그 외 성씨가 4,075개이며 본관의 총수는 36,744개나 된다고 하였다.
그 중 국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였는데, 근원(根源)은 희성(姬姓)으로 후직(后稷)의 손자다. 태어날 때 손에 잡힌 무늬가 국자(鞠字)와 같다하여 국(鞠)이라고 했다고 한다. 후손인 국무(鞠武)는 연태자 단(燕太子丹)의 사부9師傅)였다고 한다. 후직은 중국 전설의 농경신이며 주(周)왕조의 시조로 전해진다. 후직의 손자로 태어날 때 국자문양(鞠字紋樣)을 띤 사람은 사기(史記)에도 나온다. 뒤에 후손들이 국도(鞠陶)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국씨 성의 창시조이자 주무왕(周武王) 희발(姬發)의 13대조이다. 연나라 태자 단은 자객 형가(荊軻)를 시켜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토록 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국(鞠)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담양(潭陽)을 비롯하여 영광(靈光), 복성(福城), 진주(晉州), 대구(大邱), 부령(富寧) 등 6본이 기록되어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전국의 국씨는 20,547명으로 한국 성씨 인구 순위 93위였다. 그 중 대구국씨는 1985년에 총 4가구 22명, 2000년에는 59가구 194명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여태껏 대구국씨는 그 본원(本原)이나 유래(由來)가 전혀 전하지 아니한다. 다만 전국의 국씨 중에서 유일하게 본관 내력이 전하는 담양국씨 중 일부가 대구로 이거(移居)하여 살다가 선대와 종중의 연계가 끊어져 거주지 대구를 관향으로 일컬은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담양국씨의 시조 국주(鞠周)는 중국 절강성 항주(杭州) 출신이다. 중국 송(宋)나라의 공경대부(公卿大夫)였는데, 금(金)나라가 송나라의 황제였던 흠종(欽宗)을 납치해 간 정란(政亂)이 발생하자 이 난을 피해 1128년(고려 인종 6년) 고려에 입국하여 귀화하였다. 국주는 고려에 입국하자마자 인종(仁宗)을 배알하고 군신의 예를 취하였는데, 인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감정관(監正官)을 제수(除授)하여 고려 조정에 출사(出仕)시켰다. 그리고 당시 중원(中原)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던 금나라에서 송나라를 제압하고 고려에게 군신의 관계로 대할 것과 많은 공물(貢物)을 요구하였는데, 인종은 국주를 금국봉사(金國奉使)로 임명하여 금나라의 요구에 외교적으로 대처하게 하였다. 국주는 왕명을 받고 여러 번 금나라에 왕래하면서 군신 관계의 부당성을 주장하여 외교적으로 평등 관계를 맺고 귀국하였다. 이에 인종은 국주에게 삼중대광(三重大匡) 추성군(秋城君:추성은 전라남도 담양군의 옛 지명)에 봉하고 담양(潭陽)을 본관으로 정해 주었다고 한다.
후손인 고려 후기의 충신 국유(鞠襦)는 고려 공민왕 때 최영 장군의 탐라 정벌을 돕고, 곡주 지역의 반란군을 평정하는 등의 공으로 호부상서(戶部尙書) 관직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여 여러 차례 불러냈으나 두문동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결국 태조가 살던 집에 불을 질렀는데도 두문불출하고 집과 함께 불타 죽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죽음으로 절개(節槪)를 세웠으며, 꺾이지 않는 의리(義理)도 세웠다. 이러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은 「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에 수록되었으며,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에 포함되었다.
이후 태조 이성계가 충절을 기려 자손을 담양 관리에 임명토록 하였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로는 조선 문종 1년(1451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을 지낸 국경례(鞠經禮), 조선 현종 4년(1663년)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낸 국민(鞠旻)이 있다.
현대 인물로는 대한극장 설립자이자, 세기상사회장, 4대 민의원을 지낸 국쾌남(鞠快男), 국회의원 국종남, 국창근, 아나운서 국혜정 등이 알려져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담양국씨는 1,090가구의 90%가 전라북도 전주·고창·익산, 전라남도 담양·곡성·장성 등에 분포되어 있었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 결과에 따르면, 가구수 5,182호와 인구수 1만 6,697명으로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98위였다.
5. 대구김씨(大邱金氏)
고래로 대구를 본관으로 삼은 김씨가 있었는데, 대구김씨는 선안동김씨(先安東金氏)로부터 분관(分貫)한 성씨라 한다.
주지하듯이 본관 삼은 대구는 현재 대구광역시 일원의 옛 지명으로 별호로 삼한시대에는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 불렀다. 6세기 경에는 신라에 귀속되었다. 군현제가 정비되면서 초기에 위화군(喟火郡: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일대)과 달구화현(達丘火縣: 達句伐)으로 나뉘어 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위화군은 대구현(大丘縣)으로, 다사지현은 하빈현(河濱縣), 설화현은 화원현(花園縣), 추량화현은 현효현(玄驍縣), 치성화현은 해안현(海安縣)으로 각각 바뀌었다. 그리고 하빈현·화원현은 수창군(壽昌郡), 해안현은 장산군(獐山郡: 慶山), 현효현은 화왕군(昌寧)에 속하게 되었다. 현효현은 544년(진흥왕 5)에 삼량화정이 설치된 군사적 중심지이다. 940년(태조 23) 수창군은 수성군(壽城郡)으로 개칭하고 1018년(현종 9)에 경주의 관할이었다가 1390년(공양왕 2) 감무를 두면서 독립했다. 대구현은 1018년(현종 9) 경산부(京山府: 星州)의 속현이 되었으나 1143년(인종 21) 현령을 둠으로써 승격하기 시작했다. 1394년(태조 3)에 대구현은 수성현과 해안현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1419년(세종 1)에 군으로, 1466년(세조 12)에 도호부로 승격했다. 1601년(선조 34) 경상도 관찰사영이 설치되면서 경상도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현종 때에는 풍각현(豊角縣)을, 숙종 때에는 화원현을 다시 합병하여 면적을 확대함은 물론 교통의 요지를 확보했다. 영조 때에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변경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대구군이 되었다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대구부의 시가지 부분인 대구면이 대구부로 독립하고 옛 대구부의 일부와 현풍군의 일부가 통폐합되어 달성군이 되었다. 1938년 달성군의 일부가 대구부로 편입되었고, 1949년에는 대구시로 개편되었다. 1981년에 대구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88년에 달서구가 신설되었다. 1995년 대구광역시로 개편하면서 달성군을 통합하였다.
대구김씨 시조 김달(金達)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열)의 둘째아들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는 구안동김씨로 중시조 김방경(金方慶)의 넷째 아들 김론(金惀)의 증손자였다. 김달은 병조참의를 지내고 경북 대구 도화촌(桃花村)에 살았으나 조사의(趙思義)의 난에 적극 대처하지 않았다고 태종 3년에 함경도 길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장남 김려연(金麗淵)의 가족이 대구에서 길주(吉州)로 이주하여 살면서 고향인 대구를 본관으로 하였다.
그 후 시조 김달의 작은 아들 김부형(金富亨)의 손자들이 80년 뒤 연산군 때 대구에서 북으로 이주하여 함경도 명천과 평안도 용천, 의주 등에 분포하여 살았다. 그 중 함경도에 분포하여 살았던 1대 시조 김달의 계열을 함경도계(吉州派)라 하고, 평안도에 살던 계통은 3대 김호견(金浩堅)을 중시조(1세)로 삼아 평안도계(龍彎派)로 하였고, 3대 김호연의 8대손 김대성(11대)을 중시조(1세)로 삼아 함경도 지역에 정주(定住)한 계열을 함경도계 서포파(西浦派)하는 등 3계파가 있었다.
대구김씨로 조선조 과거급제자는 방목(榜目)에 의거 문과가 2인인데 김필선[金必宣, 1762 壬午生 : 정조13년(1789) 식년시 병과(丙科)], 김대현[金大鉉, 1815乙亥生) : 헌종 9년(1843) 식년시 병과(丙科)]였으며, 기타 무과 5인, 생진시(生進試) 6명 등 13인이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대구김씨는 1985년에 총 548가구 2,355명, 2000년에는 총 1,030가구 2,986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참고 : 달성 가창면 우록김씨(사성 김해김씨) 노년층 어느분의 전언에 따르면 일제시 후손 일부가 전북 진안 등 지역에 이주하여 살았는데, 그들 또한 대구김씨로 일컬었다 하였지만 지금 확인할 길은 없다.]
6. 대구배씨(大邱裵氏)
우리나라 배씨는 모두 신라 건국 초 인물 지타(祗沱)의 후손이다. 지타공은 신라 6부 촌장 중 한 사람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으로,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하고 총재태사(冢宰太師)에 올랐다. 32년(유리왕 9)에 금산가리촌을 한지부(漢祗部)로 고치고 배씨로 사성(賜姓)되었다.
배씨 중 경주, 성주(-星山), 분성(盆城-金海), 흥해(興海), 달성(-大邱), 곤산(昆山-昆陽), 협계(俠溪-黃海道 新溪) 등 본관은 모두 신라 6부 촌장 지타공을 한 뿌리로 하는 관성(貫姓)이라 믿는다. 1923년(일제 대정 13년) 전고대방(典攷大方)에는 대구배씨(大丘裵氏)로 기록되었다..
경주배씨는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을 시조로 받든다. 분성배씨는 그 5세손 배사혁(裵斯革)의 장자 배원룡(裵元龍), 성주(성산)배씨는 차자 배천룡(裵天龍),. 달성(대구)배씨는 3자 배운룡(裵雲龍), 흥해배씨는 4자 배오룡(裵五龍)을 각각 시조로 계대(計代)하고 곤산배씨와 협계배씨는 흥해배씨와 달성배씨에서 분적한 것으로 일컫는다.
그 가운데 대구배씨(大邱裵氏) 혹은 달성배씨(達成裵氏)는 대구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대구(大邱)는 신라시대에 달구화현(達句火縣)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 불렸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대구현(大丘縣)으로 개칭하여 양주(良州)의 영현이 되었다. 대구현은 1018년 경산부(京山府)의 속현이 되었으나 1143년(인종 21) 현령을 둠으로써 승격하였다. 조선시대인 1394년(태조 3)에 대구현은 수성현과 해안현(海安縣)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1419년(세종 1)에 군으로, 1466년에 도호부로 승격했다.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경상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780년(정조 4)에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변경하였으며, 1895년에 대구군이 되었다. 1914년 대구면이 대구부로 승격하고 나머지는 달성군이 되었다. 1949년에는 대구시로 개편되었고, 1981년에 대구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95년 대구광역시로 개편하면서 달성군을 통합하였다.
근자 전국의 배씨는 59개의 본관에 인구는 2000년 현재 372,064명이라 하는데 이 가운데 성주(성산)배씨가 90,239명으로 가장 많다. 그 다음 분성(김해)배씨 71,268명, 달성배씨 61,104명, 성산배씨 36,164명, 흥해배씨 29,210명, 경주배씨 22,069명 순위를 보인다.
대구배씨(大邱裵氏)는 고려 창업의 주역으로 개국공신에 책록된 배현경(裵玄慶)의 6세손 배운용(裵雲龍)을 일세조로 받들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시조의 아들 배숙(裵淑) 과 역시 평장사를 지낸 증손 배문진(裵問晉)이 있다.
배운용이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배사혁(裵斯革)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고려 중엽에 벼슬을 지내고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까닭에 후손들이 달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배운룡의 현손 배손적(裵孫迪)은 고려 충렬왕 때 공을 세워 대호군에 추증되었고 증손 밀직부사 배정지(裵廷芝)는 1318년 (충숙왕)5년) 탐라에서 김성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존무사가 되어 이를 평정하고 돌아와 상호군에 올랐다. 이들 대구배씨(大邱裵氏) 후손은 고려조에 대구(大邱)의 향리(鄕吏)를 역임하였다고 한다.
배손적(裵孫迪)의 아들은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에 추증된 배인검(裵仁儉)이고, 손자는 민부전서(民部典書)를 지낸 배영(裵瑩)이다. 배영(裵瑩)의 아들 배정지(裵廷芝)의 초명은 배공윤(裵公允)이며, 자는 서한(瑞漢), 호는 금헌(琴軒)이다. 고려 원종조에 도지(都知)가 되었고, 1270년(원종 11) 개경(開京)으로 환도할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대정(隊正)이 되었다. 1291년(충렬왕 17)에 별장(別將)으로 만호(萬戶) 인후(印侯)를 따라 원의 반란군 합단적(哈丹賊)을 무찌른 공으로 중랑장(中郎將)에 특진되었다. 충선왕(忠宣王) 때 호군(護軍)이 되었으며, 1318년(충숙왕 5)에 대호군으로서 탐라존무사(耽羅存撫使)가 되어, 탐라(耽羅)의 반란을 토벌한 후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낭장 정승백(鄭承伯)의 딸과 혼인하여 3남 2녀를 두었는데 전라남도 나주의 초동사(草洞祠)에 제향되었다. 배정지의 둘째 아들 배천경(裵天慶)이 1354년(공민왕 3)에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지고, 1358년에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에 올랐으며 뒤에 동경윤(東京尹)을 지냈다.
배정지의 아들들인 배성경(裵成慶), 배천경(裵天慶), 배함경(裵咸慶) 등 3형제가 뛰어났다. 둘째 아들 배천경은 공민왕 때 공신이 되어 달성군에 봉해졌으며, 검교장군에 오른 배함경과 함께 가문의 명성을 날렸다.
전라도 나주 땅에 복거한 배두유(裵斗有)는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환(成歡)찰방을 지냈다. 단종 재위 때 수양대군의 세력이 커지자 정변이 일어날 것을 예견했다. 결국 가족들을 데리고 능주(綾州)의 대곡에 은거했다.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두문불출하고 일생을 마쳤다. 훗날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두유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배효명(裵孝明)은 1453년(단종1) 문과에 급제하고 호조좌랑을 역임했다. 단종이 손위하자 벼슬을 사퇴하고 은거했다. 세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나아기자 않았다. 통정대부, 예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배맹달(裵孟達)은 1467년(세조13) 이시애의 난 때 충청절도사 김국광, 양성지 등과 함께 이를 진압했다. 그 뒤 정헌대부, 병조판서에 특진되었으며 곤산군(昆山君)에 봉해졌다. 그러므로 배맹달은 달성배씨에서 분적한 곤산(昆陽)배씨의 시조인 것으로 일컬어진다. 배사유(배사유)도 배맹달과 함께 이시애의 난에 출전하여 공을 세운 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한 배승무(裵承武)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 김원일, 고종후 등과 함께 진양에서 왜구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현대의 인물로는 배명인(裵命仁)이 제33대 법무부 장관), 배명국(裵命國)이 제11·12·14대 국회의원으로 이름났었다.
달성배씨 집성촌으로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경북 칠곡군 지천면 영오리, 전남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 전남 무안군 청계면 태봉리, 전남 영암군 시종면 구산리, 전남 함평군 신광면 유천리, 전북 고창군 해리면 광승리, 전북 순창군 류등면 외이리 등이 알려져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1985년에 대구배씨 1,330가구, 5,319명, 달성배씨 9,777가구, 41,268명으로 합계 46,587명이었고, 2000년 조사에서 대구 배씨가 2,171가구, 7,169명이요, 달성 배씨가 18,831가구, 61,104명으로 도합 68,273명이었으며, 2015년에 대구배씨 38,589명, 달성 배씨 39,353명, 도합 77,942명이었다.
7. 대구서씨(大邱徐氏)
대구서씨(大丘徐氏)와 달성서씨(達城徐氏)는 모두 서씨(徐氏)의 시원(始原)인 이천서씨(利川徐氏)에서 분관(分貫)된 성씨이다. 이천서씨 문헌에는 통일 신라말 인물인 서신일(徐神逸)의 손자가 거란군을 물리친 서희(徐熙) 장군이고, 그 서희 장군의 아들 4형제 중 서유(주)행(徐惟(周)行)이 달성으로 이거(移居)하였다는 것이다.
1923년 일제(日帝) 대정(大正) 연간에 간행된 전고대방(典攷大方)에서는 “大邱-達城” 서씨를 합쳐서 대구서씨(大邱徐氏)라 하고 각주(脚註)에서 “역칭달성(亦稱達城)”이라 하여 그 두 관성(貫姓)을 한결로 다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上代)로 거스르면 하나이라는 대구서씨와 달성서씨가 보첩상(譜牒上) 시조(始祖)를 서로 다르게 하여 둘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곧 대구서씨는 고려 때 조봉대부(朝奉大夫) 군기소윤(軍器少尹) 서한(徐閈)을 시조로 받들고, 달성서씨는 고려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달성군(達城君)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있는데 사실상 그 두 시조 사이의 계대(計代)와 계촌(計寸)이 불가능한 형편이라고 한다.
대구서씨는 시조 서한 이후 2∼6세의 세계가 실전되었는데, 판전객사(判典客事)를 지낸 7세 서익진(徐益進)을 중시조(中始祖)로 계대하고 있다. 8세가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낸 서의(徐義)이고, 9세 서미성(徐彌性)이 조선에 출사하여 안주목사(安州牧使)를 지냈다.
실상 대구서씨와 달성서씨는 서로들 그 근원이 같다고 추측은 하지만 분파된 시기와 계대를 확실히 고증하기 어렵다고 한다. 1931년 <만성대동보>에 대구서씨의 도시조 서한의 증손(曾孫)이 달성의 도시조 서진이라는 내용이 있다고 하여 1980년대부터는 대구서씨를 소윤공파로, 달성서씨를 판도공파로 일컬어 같은 집안이면서 서로 계파만 각각 다른 것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도 보였다.
또 이들은 본래 각각 달성서씨의 경파(京派)와 향파(鄕派)였는데, 조선 숙종(肅宗) 28년(1702)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하여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으나, 의견 충돌로 영조 이후 경파가 대구서씨로 분관하게 되어 결국 단독 족보를 만들어 갈라서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한 뿌리이지만, 계대(計代)가 실전되어 다른 본관을 쓰게 된 대구서씨와 달성서씨를 대개는 하나인 달성서씨로 묶어 광산김씨, 연안이씨와 함께 조선 3대 명문가 중 하나로 손꼽았다. 이천서씨가 해주최씨, 남양홍씨 등과 함께 고려의 명문가로 이름이 높았다면, 대구·달성서씨는 조선시대를 주름잡은 명문거족이었던 셈이다. 그 중 한양(漢陽)에 거주하던 달성서씨의 경파, 즉 대구서씨에서 더욱 수많은 큰 인물이 배출된 것으로 이름났다. 조선초의 대문호인 서거정(徐居正)과 약봉(藥峯) 서성(徐渻) 이후 가문이 크게 일어나 상신(相臣) 9명, 대제학9大提學) 6명, 왕비 1명을 배출하는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였다. 분파로는 만사공파, 전첨공파, 첨추공파, 도위공파, 봉사공파, 사가공파, 서흥파, 춘헌공파, 승사랑공파, 장원공파, 훈련봉사공파, 배산파 등 12개 파가 있다.
이들대구서씨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조선의 대문호로 알려진 서거정(徐居正)이다. 호가 사가정(四佳亭)이며,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성종 때까지 6왕 45년간 6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조선의 대문호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했으며, 또 왕명을 받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번역했다.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 지리, 의약 등에 정통했다. 문집에는 ‘사가집(四佳集)’, 저서에 ‘동문선(東文選)’ ‘필원잡기(筆苑雜記)’ 등이 있으며 글씨에는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가 있다. 대구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이 서거정의 종현손(형의 현손)으로 대구서씨의 가문을 크게 일으킨 사람이 약봉 서성이다.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서고(徐固)이고, 아버지는 서해(徐嶰)이다. 어머니는 좌의정 이고(李股)의 딸이다. 그는 선조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의 검열, 홍문관의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도승지·황해감사·평안감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경연에서 성혼·정철을 헐뜯는 정인홍 일파를 배척하다 왕의 미움을 샀다. 형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으나, 계축옥사(광해군 5년)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단양 등지에 유배되었다. 인조반정으로 다시 복귀하여 대사헌 등을 역임하다 이괄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도로 호종하여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하였다. 학문을 즐기고 시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약봉집(藥峯集)’이 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서성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서경우(徐景雨)는 인조 때 우의정을 지냈고, 넷째 아들 서경주(徐景 雨아래 周를 쓴 자)는 선조의 딸 정신옹주(貞愼翁主)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며, 서경우의 아들 서원리(徐元履)는 현종 때 병조참판을 지내고 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그의 아들 서문중(徐文重)은 숙종 때 영의정을 하였다. 약봉의 둘째 아들 서경수(徐景需)의 증손 서종제(徐宗悌)의 딸은 영조의 왕비인 정성왕후이다. 이렇듯 그의 자손 중에서 3대 정승, 3대 대제학이 계속 배출되면서 300여 년에 걸쳐 가장 번성한 명문가문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서종태(徐宗泰)는 숙종 때 영의정을 했고, 그의 둘째 아들 서명균(徐命均)은 영조 8년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으며, 서명균의 아들 서지수(徐志修)는 영조 42년에 영의정을 지내 서경주의 집안에서 3대에 걸쳐 정승이 나왔고, 또 서지수의 아들 서유신(徐有臣)이 순조 때 대제학, 그의 아들 서영보(徐榮輔)가 대제학, 손자 서기순(徐箕淳)도 대제학을 하여 3대에 걸쳐 대제학이 배출됐다. 삼대 정승을 배출한 집안은 대구서씨 외에 청송심씨(沈德符·沈溫·沈澮), 동래정씨(鄭惟吉·鄭昌衍·鄭太和), 청풍김씨(金構·金在魯·金致仁)가 있다. 삼대 대제학을 지낸 집안으로는 대구서씨(徐有臣·徐榮輔·徐箕順) 외에 광산김씨 사계집(金萬基·金鎭圭·金陽澤), 연안이씨(李廷龜·李明漢·李一相), 그리고 전주이씨 백강(白江) 집안(李敏敍·李觀命·李徽之)이다. 그런데 삼대 정승과 대제학을 지낸 집안은 대구서씨가 유일하다. 오죽하면 야사에는 만조백관이 거의 서씨 일문(一門)이어서 왕이 농담하기를 “어미 쥐가 새끼 쥐를 거느리고 나다니는 듯 하구나”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약봉가(藥峯家)’는 선조에서 고종에 이르는 약 300년 간 조선 정계에서 주요 역할을 하였다. 또 구한말에는 개화파로 유명한 서광범(徐光範)과 서재필(徐載弼) 등을 배출하였다. 서광범의 증조부는 영의정 서용보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서상익(徐相翊)이다. 박규수(朴珪壽), 오경석(吳慶錫) 등의 영향을 받아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과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 망명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김홍집 내각에서 법무대신에 임용되었으며, 내무대신 박영효와 갑오개혁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아관파천으로 김홍집내각이 무너지자 공사직에서 해임되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폐병으로 죽었다. 서재필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충남 논산에서 자라다 서울로 왔다. 갑신정변 때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으나,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냉대하자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국내 가족들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와 형, 아내가 음독자살하고 동생 서재창(徐載昌)은 참형되었으며, 아들은 굶어 죽었다. 주경야독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교 의과대학(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에 들어갔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획득하고 이듬해 미국 철도우편사업 창설자의 딸인 뮤리얼 암스트롱과 결혼하였다. 갑오경장 후 박영효의 권유로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1896년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하였으며 독립문을 세웠다. 하지만 수구파 정부와 러시아, 일본 측의 추방운동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3·1운동 후 미국에서 한국 선전활동을 전개하고, 이승만과 함께 ‘제1차 한인연합회’를 개최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의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하였다. 광복을 맞은 후 미군정의 고문 역할을 하는 동안 대통령 추대를 받았으나, 국내 정치계와의 불화와 시국 혼란을 개탄하여 미국으로 돌아가 숨을 거두었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대구서씨의 인구는 총 7,645가구에 2만 27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대구서씨의 조선조 문과급제자 수는 142명이며,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가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이며 서종제는 대구서씨 서재필의 8대조가 된다.
8. 대구전씨(大邱全氏)
증보문헌비고나 전고대방(典攷大方) 등에 전혀 나타나지 아니한 관성(貫姓)으로 대구전씨(大邱全氏)가 있었다. 198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39가구 175명, 2000년에도 216가구 641명이 나타난다. 필자는 전혀 그 대구전씨의 형성이나 존재에 관한 구두(口頭) 혹은 인쇄 자료를 접한 적이 없었다. 후일의 상고(詳考)가 가능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