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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11.사순 제1주간 금요일>
<마태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Y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343)/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형제와의 화해입니다.
화를 낸 상태에서 죄중에서 무엇을 바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흠이 없고 티없는 재물을 바라십니다.
사제들도 흠이 없고 티없는 상태로 하느님께 재물로 봉헌되는 몸이라,
신학교 입학 전에 신체검사와 심리검사 등 모든 검사들를 다 하고 이상이 있으면 신학교에서 받아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재물을 바친다는 것은 먼저 성사를 보고 마음으로 죄를 다 씻은 다음에,
깨끗한 마음과 정신과 육신으로 와서 재물을 바칠 때 그것이 온전히 아벨의 재물처럼 하느님께 들어올려진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한 십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삼습니다.
그런데 율법자체는 은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율법을 지킨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완성하러오신 구세주를 필요로 합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아! 내가 하느님께 가는데 있어서 부족한게 무엇인지 내면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것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처럼 내가 성당을 열심히 나오고 기도와 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내가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와 똑같이 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아야 하느냐?
고요히 머물러 내 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적인 정화가 필요합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7,14-15) 라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은 이미 예를 들으셨지요.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18,11-12)
이렇게 기도한 바리사이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은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18,13)
유대 사회의 전통과 관습에서 보면,
이방인과 접촉하는 세리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제가 어머니와 이태리 사람들과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간 적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아이가 한 3살과 5살로 보이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를 좋아하시는 어머니는 사랑스럽게 3살 정도 되는 아이에게 너무 예쁘다고 몸을 숙여 아이에게 다가 갔습니다. 이태리 사람들도 아이와 어머니의 그러한 사랑스러운 모습을보고 좋아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 아이와 눈인사를 하고 돌아서시는데 5살 쯤 먹은 여자 아이가 어머니 뒤에다 발길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태리 사람 모두 놀라며, “세상에! 아이들이 어쩌면 저럴 수가 있냐?” 하며 의아해 했습니다.
아직도 어린이한테도 이방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모습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세리가 직업적으로 이방인 만나기에 죄인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눈에는 종교적인 관습과 전틍이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과 맞지가 않을 때에는 과감하게 철폐하십니다.
할례와 짐승의 피를 그들은 먹지 않고, 목졸라 죽인 짐승을 먹지않는…등등은 유대교 전통과 관습인데 이러한 것을 그리스도인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규정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안식일이 토요일이라면 신약의 안식일은 그리스도인들은 토요일이 아닌 주일로 바뀌게 됩니다. 주일은 안식일 다음 날 아침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 즉 주님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기본인데 기거에서 오는 마음의 갈등들이 있지요.
예를 들면,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해서 이웃을 사랑하는데 정말로 미워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하냐 이겁니다.
겉으로만 하는 것은 바리사이적인 것이고,
겉으로도 지키되, 마음으로 오는 갈등은 주님께 세리처럼 “온전히 십계명을 마음으로 지키지 못하는 이 죄인을 용서해 달라고 청해야 하는 것” 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것은 에고에 뿌리를 둔 사랑받고 인정 받으려 하는 데서 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먼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즉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요, 죽고 싶다고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먼지에 불과한 순간순간만이 내 것인 것입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3,19)
그 모든 것을 주님이 우리의 에고를 다 뒤짚어 쓰시고 대신,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외침을 우리 대신 다 하시고,
당신의 육신 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다 바치십니다.
당신과 영 혼 육을 다 바치십니다.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십계명을 지키는데 우리 내면 안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것을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못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봉헌하면 됩니다.
잘 안되면,
세리의 기도처럼, “주님 십계명을 겉으로만 지키고 안으로는 갈등하고 욕을하고 힘들어하는 이 죄인을 용서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8,14) 라고 말씀하셨듯이 죄인으로 고백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선행을 하되, 안에 있는 마음도 주님께 죄인으로 고백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받아 주십니다.
그 방법은?
기도생활표 실천표를 통해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그리고 지구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합니다.
그리고 내면으로 오는 갈등은 주님께 순간순간 봉헌합니다.
1. 묵주기도(단/하루)
2. 성서 읽고 맛들이기(장/하루)
3. 희생(번/하루)
1)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생활다시보기 실천하고 기록하기
영성체 모시기
주모경 바치기
성체조배하기
침묵하면서 하느님 안에 머무르기(최소1분)
마음속으로 고요히 주님께 사랑 고백하기
성가1곡 듣기 또는 따라 부르기
성당 마당 성모님께 인사드리기
식사 후 기도하기
가족들에게 눈웃음 짓기
부모님께 안부 전화 드리기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배달원, 택배 아저씨께 수고하신다고 인사하기
교우들에게 안부 톡 보내기
나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운 이웃 돌보기
영성 서적 읽기
2) 지구 사랑
가까운 거리 걷기(대중교통 또는 자전거 이용하기)
낮은 층 계단 이용하기
개인 손수건 매일 세탁하여 들고 다니기(화장실 및 그외 장소 사용)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하기
플라스틱 빨대 쓰지 않기
텀블러 사용하기
분리수거는 꼼꼼하게 하기(재활용이 가능한 포장재 반납하기)
의약 폐기물은 반드시 분리수거
양치와 비누칠 할 때 물 잠그고, 설거지할 때 물을 받아서 하기
샴푸, 물비누 대신 샴푸바, 비누 사용하기
사용하지 않는 가전제품 플러그 빼기
빈 방에 불 끄고, 적정 실내 온도 지키기
4.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요일별 성서 말씀 매일 3번 외치기
월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화요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4)
수요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목요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금요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
토요일: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1,4)
일요일: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로마12,1)
5. ( )소망이 농은 홍유한 선생님의 전구로 이루어지길 청하며,
‘수덕생활을 위한 기도문’ 하기
<수덕생활을 위한 기도문>
지극히 자비로우신 주님
이 땅에 교회가 생기기전
천주실의에 쉼취하여
칠극이 제시하는 신앙을 살고자
홀로 28년간 입산하여
최초의 수계생활을 한 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 1726-1785) 선생을
저희에게 보내주심에 감사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정결한 생활의 모범이 된 농은 수덕자의 정신이
그 후손인 순교 성인들 안에 다시 부활했듯이
기도와 수련중에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회개와 믿음 소망 사랑으로 저희를 이끄시어
삼위일체적 친교와 일치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2009년 12월 31일
천주교 의정부교구 교구장 주교 이한택 요셉 인가.
6.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음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matthew5,20-26>
20 I tell you, unless your righteousness surpasses that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ou will not enter into the kingdom of heaven.
21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your ancestors, 'You shall not kill; and whoever kills will be liable to judgment.'
22 But I say to you, wh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ll be liable to judgment, and whoever says to his brother, 'Raqa,' will be answerable to the Sanhedrin, and whoever says, 'You fool,' will be liable to fiery Gehenna.
23 Therefore, if you bring your gift to the altar, and there recall that your brother has anything against you,
24 leave your gift there at the altar, go first and be reconciled with your brother, and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
25 Settle with your opponent quickly while on the way to court with him. Otherwise your opponent will hand you over to the judge, and the judge will hand you over to the guard, and you will be thrown into prison.
26 Amen, I say to you, you will not be released until you have paid the last pe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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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이 약들이 작용할 때 그 약의 독성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약들은 알코올과 유사하다. 알코올은 대부분 그 독성이 기분을 좋게 하면서 정신을 혼란스럽게 할 뿐 아니라 정신적 역기능을 전혀 치유해 주지 못한다. 더 많은 시사점을 주는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부분적으로 세로토닌 재흡수를 억제하는 효과를 보이는 코카인이나 암페타민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시그먼드 프로이드가 처음으로 코카인을 정신질환의 치유를 위한 기적의 약 그리고 만병통치약이라고 환영했다는 것이다. 얼마 후 그는 코카인이 신체적으로 파괴적이며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비유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자. 코카인이나 암페타민은 도파민이나 아드레날린 신경전달물질 체제에 또 다른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이러한 약물들이 기능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은 세로토닌 체계 그 자체가 두뇌 및 척수 전체로 퍼져나간다는 사실을 통해 더욱 확고해 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두뇌의 생화학적 불균형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불균형(커싱 증후군이나 그래이브스 병과 같은 몇 가지의 호르몬이 관련하는 것을 제외하고) 은 약물 그 자체에 의해 야기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인과관계를 밝히는데 있어 우스꽝스러운 오류를 반목하게 된다. 즉, 약을 중단함에 따라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반응은 이미 설정된 생물학적 문제 때문에 나타난다는 잘못된 순환적 방식의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다.
(경고: 정신과 치료가 당신의 정신건강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생활심리 시리즈 31, William Glasser, M.D. 저, 박재황 역, 도서출판 계림, 2015,p270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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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계명
도둑질을 하지 마라
440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와 사회에 참여할 의무가 있나요?
복음 정신으로 사랑과 진리와 정의 안에서 정치, 사회, 경제에 참여하는 일은 가톨릭 교회의 평신도들이 지닌 특별한 직무입니다. 이 점에 있어 가톨릭 사회(Y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343)/
교리는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2442]
당신께서는 땅을 찾아오셔서 물로 넘치게 하시어 더없이 풍요롭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개울은 물로 가득하고 당신께서는 곡식을 장만하십니다. 정녕 당신께서 이렇게 마련해 주십니다…..사막의 풀밭에도 방울져 흐르고 언덕들은 기쁨으로 띠 두릅니다. 목장들은 양 떼로 옷 입고 골짜기들은 곡식으로 뒤덮여 저들이 환성을 올리며 노래합니다.(시편65,10.13-14)
주교나 사제, 수도자의 직무는 정당이나 정치 활동과 결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를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Y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34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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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절 일곱째 계명
도둑질하지 못한다(출애20,15)(요한 바오로2세, 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 11항: AAS 74(1982), 92면)
도둑질하지 마라(마태19,18).
->2442 정치 구조나 사회 생활의 조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교회 사목자들이 할 일이 아니다. 이 임무는 동료 시민들과 더불어 주도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평신도들의 소명이다. 사회 활동에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사회 활동은 항상 복음의 메시지와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하며, 공동선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다운 열정으로 현세적인 일들을 활성(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865)/
화하고, 이를 위해 평화와 정의의 일꾼으로 행동하는 것”(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 47항: AAS 80(1988), 582면,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 42항: AAS 80(1988), 572-574면 참조) 은 평신도의 의무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