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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處容舞. 처용무보존회 안무,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가 12월 19일 저녁 7시 30분,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문화재청 주최,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주관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기념 공연〈위대한 유산, 세계를 만나다〉이 있었다.
처용무(處容舞.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란? 처용가면을 쓰고 추는 춤을 말한다. 궁중무용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으로, ‘오방처용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헌강왕(재위 875 ∼ 886) 때 살던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疫神: 전염병을 옮기는 신) 앞에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서 귀신을 물리쳤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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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주) 밝은 달 아래 / 밤 깊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 다리가 넷이로다./
둘은 내 것인데 /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마는 / 뺏어간들 어찌하리.
처용무는 5명이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향(五方向)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추는데 동은 파란색(東-靑), 서는 흰색(西-白), 남은 붉은색(南-紅), 북은 검은색(北-黑), 중앙은 노란색(中-黃)이다. 춤의 내용은 음양오행설의 기본정신을 기초로 하여 악운을 쫓는 의미가 담겨 있다. 춤사위는 화려하고 현란하며, 당당하고 활기찬 움직임 속에서 씩씩하고 호탕한 모습을 엿볼 수 있고, 가면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후기까지는 한 사람이 춤을 추었으나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다섯 사람으로 구성되었고, 성종(재위 1469∼1494) 때에는 더욱 발전하여 궁중의식에 사용하게 되었다. 그 후 조선 후기까지 노래의 가사나 음악을 바꾸어가면서 전승되어 왔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면서 중단되었던 것을 1920년대 말 이왕직 아악부가 창덕궁에서 공연하기 위해 재현한 것을 계기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처용무는 가면(假面)과 의상·음악·춤이 어우러진 수준 높은 무용예술로, 우리 조상들의 덕망 있는 모습을 바탕으로 하며, 춤사위나 반주음악 또는 노래에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처용무는 2009년 9월 30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제4차 무형문화유산 보호 정부간위원회에서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됐다.
- 처용무보존회: 처용무보존회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의 에능ㅇ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이를 그대로 실현할 수 잇는 단체다. 1971년 1월 8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와 관리를 받고 있다. 처용무 예능보유자의 전수교육조교, 이수자로 구성된 처용무보존회는 처용무의 전승과 보급을 위한 기예능 전수교육과 발표회 및 각종 문헌연구와 자료 취합 그리고 편찬사업을 병행하고 있다.
- 처용무: 이진호, 인남순, 한수문, 송경남, 최병재
- 반주: 집박 김종식, 해금 황애자, 대금 김싱준, 피리 김철, 한재연, 장구 박거현, 좌고 안성일, 창사 홍창남
처용(處容, 處容郎): 삼국유사 2궐의 설화(說話)에 나오는 기인으로 동해 용왕(龍王)의 아들이다.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산)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었다.(879년)
이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 길을 잃었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신하들에게 까닭을 물으니, 일관(日官)이 “이는 동해 용의 조화이오니 좋은 일을 행해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지으라고 명령을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그래서 이곳을 ‘개운포’라 하였다. 동해의 용이 기뻐해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해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왕의 정사를 도왔다. 그리고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왕이 그에게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하여 머물러 있도록 하고, 급간(級干: 級湌)의 관등을 주었다. 아내가 대단히 아름다워 역신(疫神)이 흠모한 나머지 사람으로 변해 밤에 몰래 그 집에 가서 동침하였다.
이 때 밖에서 돌아온 처용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에 역신은 본래의 모양을 나타내어 처용 앞에 꿇어앉아 “내가 당신의 아내를 사모해 잘못을 저질렀으나 당신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긴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당신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해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린 부적을 문에 붙여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 들였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처용이 지어 부른 노래를 처용가(處容歌)라 하고, 춘 춤을 처용무(處容舞)라 하여 후대까지 전해 내려왔다. 한편, 처용을 당시 울산지방에 있었던 호족(豪族)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혹은 당시 신라에 내왕하던 아라비아 상인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또는 경문왕가와 화랑의 친연성을 고려하여 화랑집단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처용이 등장한 헌강왕(憲康王)대는 사치스런 왕경(王京)의 번영과 호국신(護國神)들의 잦은 출현, 가무(歌舞)의 성행 등으로 상징된다. 더욱이 이러한 번영의 모습이 정강왕(定康王)에 이은 진성여왕(眞聖女王) 시기의 혼란과 분열의 모습과 이어져 있어 신라 멸망의 원인을 헌강왕대 사회에서 찾기도 한다.
처용설화 역시 이러한 헌강왕대 정치 사회적 정황의 한 표상인 것이다. 용신신앙, 호국신신앙, 벽사진경(辟邪進慶) 등의 사상은 헌강왕이 속한 신라 하대 신앙의 일단면과 아울러 그 배경이 되는 하대의 사회·정치상을 보여준다.
(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글과 사진, 영상: 이영일 채널A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 채널A 뉴스와이드 오늘의 영상 休: 처용무(2014년 1월 3일 방영)
http://news.ichannela.com/tv/News10/3/all/20140103/59945324/1
* 2015년 문화유산채널 사진작가 3회차 공모 입상: 1점
▒ 이영일/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