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상인(示禪上人)
선 스님께
보우(普雨, 1509~1565)
얽히고설킨 인간 세상 너무도 어지러워
다시금 옛 선원으로 돌아가려 하오
차라리 굶어 죽거 얼어 죽을 지언정
내 다시는 세상일 꿈에도 싫으오
人間多澒洞(인간다홍동)
還向舊禪庭(환향구선정)
饑凍寧投死(기동영투사)
不曾夢世情(불증몽세정)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주었으면 하는 일
도 있다. 그러나 하필 그때 그 자리에 내가 있었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 일어
났다면 그냥 피해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몸소 겪었던 보우 스님이
처음부터 속세를 등진 채 참선(參禪)먼울 구도의 길을 가는 어느 스님에게 하소
연한 시다. “나도 당신처럼 용맹 정진할 수도 있었소, 속세의 잡것들과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일은 이제 그만두겠소” 그러나 보우 스님은 쓴 잔을 남에게 넘
기지 않았다. 보우 스님은 억압받던 불교의 중흥을 위해 큰 업적을 남겼으나 유
학자의 시기를 한 몸에 받아 제주도로 귀양 간 뒤 그곳에서 매 맞아 죽었다.
[작가소개]
보우[ 普雨 ]
<요약>
조선의 승려. 조선 중기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고 나라의 공인(公認) 정찰(淨刹)을 지정하게 하며 과거에 승과(僧科)를 두게 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억불정책(抑佛政策)에 맞서 불교를 부흥시켜 전성기를 누리게 하였으나 그의 죽음 직후 종전으로 돌아갔다.
출생-사망: 1509 ~ 1565
호 : 허응당·나암
활동분야 : 종교
주요저서 : 《허응당집》 《선게잡저》
호 허응당(虛應堂)·나암(懶菴)이다. 1530년(중종 25)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에 들어가 참선(參禪)과 경전(經典) 연구에 전심하고, 6년 만에 하산하였으나, 관(官)의 횡포로 사찰이 파괴되고 주지(住持)가 투옥되는 사태에 직면, 다시 입산하였다. 1548년(명종 3)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신임을 얻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어 당시 질식상태에 있던 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550년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고 1551년 선종 판사(禪宗判事)가 되어 권신 윤원형(尹元衡)·상진(尙震) 등의 도움으로 300여 개의 사찰을 나라의 공인(公認) 정찰(淨刹)로 만들었으며, 도첩제(度牒制)에 따라 2년 동안 승려 4,000여 명을 선발하여 자격을 인정하는 한편, 과거에 승과(僧科)를 두게 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한때 춘천 청평사(淸平寺)로 옮겼다가 1559년 다시 봉은사로 돌아왔는데, 뒤에 도대선사(都大禪師)에 올랐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조야의 배불상소(排佛上疏)와 유림(儒林)의 성화에 밀려 승직이 박탈되고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참형(斬刑)되었다. 보우가 죽은 뒤 불교는 종전의 억불정책(抑佛政策)시대로 되돌아가 양종제도(兩宗制度)와 승과제도가 폐지되는 등 심한 억압을 받게 되었다.
저서에 《허응당집(虛應堂集)》 《선게잡저(禪偈雜著)》 《불사문답(佛事問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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