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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1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은총을 많이 받는 유일한 방법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줍니다.
바로 은총은 계약을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하멜른이라는 마을에 쥐가 들끓었습니다.
이때 얼룩무늬 옷을 입은 신비한 남자가 찾아옵니다.
그는 쥐잡이 꾼이라 말하며 일정 비용을 내면 마을에서 쥐를 없애주겠다고 말합니다.
시장은 별생각 없이 피리 부는 사나이의 조건에 동의합니다.
그는 피리를 불어 쥐들을 마을 밖 강물에 빠트려서 죽입니다.
쥐 떼를 성공적으로 제거한 후 그는 보상받기 위해
돌아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쥐가 사라진 것을 본 시장과 마을 사람들은 약속을 어깁니다.
그들은 전액 지불을 거부하고 단지 미미한 액수만을 제안했습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는 이번에는 다른 곡을 연주합니다.
하멜린의 모든 아이는 음악에 매료되어 그를 따릅니다.
그는 그들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고 그들은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은총과 진리는 결국 하나입니다.
은총은 주는 이가 나에게 해로운 일을 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은총을 받는 이가 말하는 진리에 순종하는 게 제일 안전합니다.
은총은 요구하면서 순종하지 않으면 은총을 주는 이를 자기보다 낮게 여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순종은 감사의 열매입니다.
내가 감사하는 이에게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이 고쳐진 사람은 주님의 함구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병이 다시 도졌다는 말은 없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방해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만진 사람이고 그러면 다른 고을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는 인간 안에 은총을 받고 싶은 욕망과
그 은총을 주는 이 위에 서고 싶은 욕망이 동시에 존재함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맥베스와 그의 친구 뱅코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다가 마녀들을 만납니다.
마녀들은 맥베스가 코더의 영주가 되어 결국 스코틀랜드의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들은 또한 뺑코에게도 예언해줍니다.
자신이 왕이 될 수는 없지만 그의 후손이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맥베스는 실제로 임금이 새로운 영지의 영주로 자신을 임명했음을 알게 됩니다.
마녀들의 예언을 들은 부인은 맥베스보고 던컨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하자고 합니다.
아내의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았던 맥베스는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합니다.
또한 마녀의 예언을 기억하고 뱅코와 그의 아들을 살해하게 시킵니다.
뱅코는 살해되지만, 아들은 탈출합니다.
어쨌든 맥세스에게 이제 은인은 던컨 왕이나 뱅코가 아니라 마녀들과 자기 욕망을 자극하는
아내가 되었습니다.
맥베스는 확신을 얻기 위해 마녀들을 다시 방문합니다.
그들은 그의 동료이자 친구인 맥더프를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또 여성에게서 태어난 누구에게도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왕궁 앞 숲이 왕궁까지 올라오게 되기 전까지는 안전하겠다고 말해줍니다.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맥베스는 예언을 과신하고 자기 친구 맥더프의 가족을 학살하라고 명령합니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맥베스 부인은 광기에 빠져 결국 죽습니다.
맥더프와 던컨의 아들 말콤이 이끄는 군대가 버남 숲의 나뭇가지로 위장하여 맥베스의 성으로 진격하여 마녀의 예언 일부를 성취합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맥베스는 맥더프와 대결하게 됩니다.
맥베스는 자신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에 의해 살해될 수 없다고 자랑하지만, 맥더프는 자신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제왕절개로 태어났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여자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에 힘이 빠진 맥베스는 맥더프의 칼에 죽습니다.
맥베스가 예언을 듣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예언한 이를 은인으로 여기는 것은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성주가 되고 왕이 된 것이 그들 덕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고맙고 그들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이 고쳐진 이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당이 쓰는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대학에 붙는다든지 하는 일이 잘 되게 될 것이란 말을 던져 그대로 되면 사람들은 무당을 은인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 그에게 감사하게 되고 시키는 것은 무엇이나 하게 됩니다.
어차피 50%는 맞을 것이기 때문에 그 50%가 나중엔 주요 고객으로 돈을 뜯기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녀에게 주던 은총을 계속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은총은 좋아지라고 주는 것인데 그러면 은총이 독이 됩니다.
은총은 바보가 되면서까지 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항상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순종하기 위해 감사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악으로 이끄는 이에게 감사하고 순종하게 되어 참 은총이 끊기고 멸망으로 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1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마르 1,40-45
나병 환자의 적극성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남도 쪽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 중에 ‘짠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딱하다, 불쌍하다, 안쓰럽다, 같은 말과 동의어입니다.
얼마 전 자주 다니는 한적한 길목에 누군가가 유기를 한 반려견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영문도 모른체 버려진 강아지는 언젠가 주인이 데리러 오겠지, 하는 생각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친구의 얼굴을 보니 제 마음이 얼마나 짠해졌는지 모릅니다.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것 저것 주렁주렁 팔에 달고 있는 한 아이 얼굴을 보았습니다.
정황을 보니 어린 암환자였습니다.
아이를 케어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젊은 엄마까지....제 마음이 얼마나 짠해지던지요.
오늘 고생하고 방황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도 똑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계속 봉독되는 마르코 복음서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다양한 병고와 한계를 지닌
우리 인간을 향한 짠한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짠한 마음은 곧 연민의 마음이요 측은지심일 것입니다.
영어로 적합한 단어는 compassion일텐데, 이는 라틴어 ‘파티’(pati)와 ‘쿰’(cum)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두 단어를 합치면 ‘함께 괴로워 하다’ ‘함께 고통 당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compassion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한 가련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고 천대받던 대표 인물이었던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의 나병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져, 사람들이 다들 고개를 저으며 피해갈 정도였습니다.
가족들은 물론 인간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거부당하고 소외당하며 살아왔던 그는 이번이 자신의 일생일대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며 마치 들짐승처럼 울부짖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즉시 짠한 마음, 가엾은 마음으로 가득해집니다.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손이 썩어 문드러진 나병 환자의 환부에 가 닿습니다.
그리고 외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께서 인간의 가련함과 나약함으로 인해 느끼신 연민의 마음은 피상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감정도 아니었습니다.
존재의 가장 근원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셨다는 것은 모든 삶의 근원이 떨리고, 모든 사랑의 근거가 활짝 열리며,
거대한 사랑의 물줄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은 부족한 인간의 머리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당신 존재 전체로, 혼신의 마음을 다해 우리 각자를 향해 연민의 마음을 보내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그저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지옥과도 같은 삶을 마지못해 살아가던 나병 환자였습니다.
치유, 회복, 귀향 같은 긍정적인 측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일상이었는데, 비참하고 어두운 그의 삶에 한 줄기 강렬한 빛이 찾아온 것입니다.
은혜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우리도 기억해야겠습니다.
나병 환자의 적극성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꼭 치유되어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그에게 구원을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꼭 자신을 치유시켜주실 능력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확신이 그를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한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연중 제1주간 목요일 강론>
(2024. 1. 11. 목)(마르 1,40-45)
<믿음과 순종>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0-45).”
만일에 이 이야기가, “예수님을 믿어서 치유의 은총을 받은 어떤 병자의 이야기”일 뿐이라면, 해설하기도 쉽고 강론하기도 쉬울 텐데, 이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말에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그 병자의 믿음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어떤 병이든지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긴 하는데,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실지, 어떨지에 대한 믿음은 없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믿고 있지만,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부족한 상태입니다.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합해져야 ‘올바른 믿음’이 됩니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 대해서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은, 그의 처지가 너무 딱했기 때문인데, 그의 믿음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도 가엾게 여기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라는 말은, “자비는 모든 장벽과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입니다.
병자가 청하지 않아도, 또는 병자가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가엾게 여기시고, 예수님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시고, 예수님께서 먼저 구원을 주십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부터가 당신이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신 일도, 사람들을 고쳐 주신 일들도,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인간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도 모두
당신이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끈질기게 간청하고 또 간청해야만 마지못해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간청하기도 전에 나의 사정을 먼저 알고 계시고, 내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는 의사’ 라고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몸의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생각하는 것을 막으려고, 즉 영혼의 구원은 바라지 않고 몸의 치유만 바라면서 몰려드는 것을 막으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릇된 방향으로 빗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단단히 이르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권고나 당부가 아니라, 어기면 안 되는 명령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 병자는 예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잊어버렸을까? 아니면 무시했을까?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너무 기뻐서’, 그리고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그는 “이 큰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왜 막으실까? 이해가 안 된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의 불순종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믿음이란, 순종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순종하는 믿음’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으니까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납득이 되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순종하지 않는 것은 안 믿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으니까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라는 말은, 그 병자가 예수님의 활동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어버렸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그가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불순종 때문에 그는 본의 아니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라는 말에는, 사람들이 몸의 치유만을 바라면서 모여들어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 병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함께 원하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자기가 원하는 것만 얻으려고 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자격을 잃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