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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1,25-27
주님께서는 기쁨에 겨워 아버지를 찬미하십니다.
그 찬미의 까닭이 뜻밖입니다.
하느님의 신비가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지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똑똑함의 크기로 만나는 분이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마음에 스스로를 열어 보이시는 분입니다.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신학자’라 불릴 만큼
삼위일체의 신비를 깊이 묵상한 교부입니다.
그러나 그는 늘 일깨웠습니다.
하느님을 논하는 일은
머리의 영리함이 아니라
마음의 정화와 기도에서 시작된다고.
‘아버지 외에는 아드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처럼,
하느님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으로 들어가 ‘아는’ 친교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리는 성 보나벤투라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프란치스코회의 위대한 학자였던 그는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여정〉에서,
앎의 사다리 맨 끝에서는
지성을 내려놓고 ‘사랑’으로 건너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어느 책에서 가장 많이 배웠느냐 묻자,
그는 십자가를 들어 보이며
“제가 가장 많이 배운 책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가장 깊은 학자가
가장 ‘철부지’ 같은 사랑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일치의 관점에서 보면
성부와 성자의 그 ‘서로 아심’은
곧 서로를 향한 온전한 사랑입니다.
교회의 일치도
논쟁에서 이기는 데서가 아니라,
그 사랑의 친교 안으로 함께 들어가는 데서 자랍니다.
서로를 ‘이기려는’ 똑똑함을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한 아버지께 안길 때,
우리는 비로소 형제가 됩니다.
아낌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 다 알고 다 짊어지려는 마음은
우리를 소진시킵니다.
그러나 철부지처럼 아버지께 맡기는 마음은
우리를 쉬게 하고 회복시킵니다.
자신을 아끼는 가장 깊은 길은
아버지의 사랑 안에 어린아이로 머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머리’로만 만나려 하지 않는가?
나는 어린아이처럼 아버지께 자신을 여는가?
나는 이기려는 똑똑함을 내려놓고 사랑으로 다가가는가?
나는 삼위일체의 사랑 안에 머물러 쉬는가?
아버지,
철부지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영리함으로 당신을 붙들려 하지 않게 하시고,
어린아이처럼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형제들과 한 친교를 이루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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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일에는 미사가 네 번 있습니다. 토요일 오후 5시 미사, 주일 오전 10시 미사, 주일 낮 12시 미사, 그리고 오후 3시 미사가 있습니다. 저는 주로 주일 오전 10시 교중미사와 오후 3시 미사를 담당하고, 부주임 신부님은 토요일 오후 5시 청년 미사와 주일 낮 12시 영어 미사를 담당합니다. 토요일 5시 미사는 청년들이 전례를 담당하기 때문에 활기찬 면이 있습니다. 주일 낮 12시 미사는 영어 미사라서 제게는 조금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할 때도 있지만, 주일학교 학생들과 미국 분들을 만나는 신선함이 있습니다. 주일 오전 10시 미사는 마치 홈그라운드에서 경기하는 것처럼 편하고 친숙합니다. 매주 만나는 교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일 오후 3시 미사는 마음이 조금 홀가분합니다. 한 주간의 주일 사목이 마무리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여름 행사로 자리를 비우거나 휴가를 가면 제가 청년 미사와 주일학교 미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사목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혼자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면 지치고 힘들지만, 함께 짐을 나누어지면 기쁨이 됩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 부주임 신부님과 함께 지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도 휴가를 편하게 다녀올 수 있고, 본당의 여러 사목도 함께 나누어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서로 돕고, 서로 믿고, 서로 부족함을 채워 주며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신학생 때 본당 청년들과 함께 천마산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의 의견이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비가 곧 그칠 테니 그냥 저녁을 먹고 텐트를 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산에서는 폭우가 위험할 수 있으니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서로 의견이 분분할 때 모두가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신학생이니까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나 봅니다. 순간 저는 당황했습니다. 비가 조금 내릴 거로 생각하고 그냥 머물자고 하면 짐을 옮기지 않아도 되고, 밥을 계속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폭우로 변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안전한 곳으로 짐을 옮기자고 하면 안전하기는 하지만, 비가 금방 그치면 괜히 사람들을 번거롭게 한 선택이 됩니다. 그때 저는 선택이란 단순히 머리로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책임을 지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제가 되고 나서도 많은 선택과 결정을 하였습니다. 어떤 선택은 참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선택은 아쉬움과 후회가 남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대부분의 신자분이 부족한 저의 선택을 존중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하신 결정이니 믿고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늘 최선의 선택, 최상의 결정을 한 것은 아닙니다. 더러 부족했고, 미흡했고,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이 믿고 따라주었기에 사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택의 순간마다 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안다는 교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청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 혼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듣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걸어가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큰 사명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라는 사명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처음부터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주변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런 큰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능력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말솜씨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이 모세에게 주어진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모세가 위대한 사람이어서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에 모세는 위대한 사명의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능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모로, 봉사자로, 사목자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도 우리의 힘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부족해도, 때로는 우리가 두려워해도, 때로는 우리가 말주변이 없어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길이 열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을 찾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 계산이 빠른 사람, 자기주장이 분명한 사람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조금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하느님께 의지할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과 함께 걸어갈 줄 아는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철부지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참된 지혜는 많이 아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데 있습니다. 참된 선택은 나에게 유리한 길을 고르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길을 걷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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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요, <뒤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오늘은 두 개의 절로 된 <앞 장면>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 장면>의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마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니 기도가 수난의 길을 앞두고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 26,42)라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로서 당신의 뜻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동시에, “감추시고”와 “드러내 보이시고” 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은 결코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 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드리십니다.”
그리고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음을 찬미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았기에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이 이루어졌음을 찬미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일하셨음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눈에 감추어 있더라도 드러나 있더라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일을 이루시는 당신을 찬미하며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당신께서는 그 선하신 뜻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십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습니다.
하오니, 주님!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시고,
이 모든 것 안에서 저의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의 선하신 뜻”(마태 11,26)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매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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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리처드 세넷은 『장인』에서 ‘암묵적 지식’을 이야기하며, 장인이 세상을 떠나면 그가 작업에서 결합해 둔 온갖 실마리와 통찰력을 되살리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장인의 비밀은 그와 함께 죽는다.’는 가혹한 숙명이 드러납니다.
이제 그 작업장에는 스승의 기술을 어느 정도 이어받은 제자가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그가 다시 장인의 반열에 들려면 스승이 남겨 놓은 은밀한 표준과 암묵적 지식을 처음부터 다시 익혀서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신앙을 전하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앙의 유산을 온전히 물려받는 일은 결코 녹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진리는 손을 뻗기만 하면 얻을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만(마태 11,25 참조), 그것을 삶에 녹여 내는 일은 아주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이어받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11,27).
우리가 여전히 신앙의 깊은 경지에 이르기 어려운 까닭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작업장’을 기웃거리고만 있을 뿐 그 안으로 과감하게 들어가려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분의 사랑을 제대로 느껴 보지도 않은 채 너무 쉽게 포기하고,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만 해결하려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직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공간 속으로 직접 뛰어들 때만 발견할 수 있는 신비입니다.
오늘은 그 작업장으로 함께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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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진복팔단: 제2주간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2026년 7월 14일 화요일
리처드 로어는 예수님의 이 은유를 '눈'과 '마음'을 연결하여 조명합니다:
이 진복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올바를 때 보는 것도 올바르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마음과 눈을 하나로 묶으십니다. 우리도 흔히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데, 하느님도 그러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렌즈를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정결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이 차갑다면 시선은 왜곡됩니다. 냉담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말이나 행동으로 폭력을 행하려는 욕망, 사랑의 시선을 거두어 타인에게 거절감을 주는 태도는 우리를 눈멀게 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정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의 깨끗함(정결)"을 권고하시며, 그 약속으로 올바른 시선이 뒤따를 것이라 하십니다. [1]
저술가이자 영적 지도자인 칼 맥콜먼(Carl McColman)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의 깨끗함"의 의미를 묵상하며, 그것을 "모든 불안한 마음이 향하는 궁극의 목표—곧 하느님을 뵈옵는 것—을 가리키는 참된 복(진복)"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정결"(purity)이라는 개념은 종교적·정치적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때로는 쇼아(Shoah-'재앙' 혹은 '파멸'을 뜻하는 히브리어로 홀로코스트-대학살의 의미를 지님)와 같은 인종 대학살을 정당화하거나, 인간의 성적 행동을 억압하는 암호처럼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그리스어 카타로이(katharoi)는 전혀 다른 뜻을 지닙니다. 이 단어는 카타르시스(catharsis)—곧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여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첫 단계—의 어근입니다. 여기서 정결은 단순히 오염을 일으키는 요소들로부터의 자유를 뜻할 뿐 아니라, "깨끗함"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행복선언은 이렇게 새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자유롭고 깨끗한 사람은 복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
"하느님을 뵈옵는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강제로 당신의 현존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원하지 않는 이에게 억지로 다가오지도 않으십니다. 우리 대부분은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하느님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원하지 않는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뒤섞 있습니다. 참된 안식은 오직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여러 가지 다른 즐거움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무해하지만, 어떤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진복선언이 단순한 비난이나 부끄럽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도전이자 초대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은 누구도 완전히 깨끗한(정결한) 마음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기꺼이 너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느냐? 너는 기꺼이 수고할 수 있느냐? 너는 네 안의 혼란을 정리할 수 있느냐?"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길 위에 서게 됩니다…. 바로 그곳에서 정화가 시작됩니다. 불필요한 냉소, 오래 품어온 원한, 마음을 꺾는 쓴뿌리, 에너지를 앗아가고 아무 것도 돌려주지 않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내적 정화(catharsis)의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정화는 이미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게 합니다. [2]
Story From Our Community
브라이언 맥라렌, 우리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함께 구원의 여정에 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지체이지만, 모두 하나의 희망과 사랑, 믿음과 구원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몇몇만을 편애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David S.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Jesus’ Alternative Plan: The Sermon on the Mount (Franciscan Media, 2022), 147–148.
[2] Carl McColman, Eternal Heart: The Mystical Path to a Joyful Life (Broadleaf Books, 2021), 27–2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alek Larif, untitled (detail), 2019,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저 나뭇잎 위에 맺힌 빗방울처럼, 진복팔단은 세상의 문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 나라(kin-dom of God-하느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왕국)를 창조해 가는 처방을 내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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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5. 십자가 두 갈망이 하나되는 자리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5. 십자가 두 갈망이 하나되는 자리
세상은 십자가를 실패의 표지라고 말합니다. 힘을 잃은 사람의 마지막 자리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의 상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칸들은 십자가를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사랑이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자리였으며,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가장 충만하게 피어난 자리였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하느님을 거부한 마지막 지점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끝내 포기하지 않으신 첫 번째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간의 죄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영원한 표지가 되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라 베르나 산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하나의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길은 높은 사상이나 깊은 지식이나 신비로운 체험을 통하여 열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들어갈 때 열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이해보다 갈망을 찾으라고 하였고, 빛보다 불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앞에서는 설명보다 사랑이 먼저이고, 논리보다 불타는 마음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시며, 사랑은 언제나 자신을 내어주는 자리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갈망이 가장 깊이 드러난 자리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지만 하느님은 인간에게서 멀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등을 돌렸지만 하느님은 얼굴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문을 닫았지만 하느님은 그 닫힌 문 앞에서 오래도록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외아드님 안에서 그 문을 두드리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문이 되셨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이 인간에게로 건너오기 위하여 놓은 다리이며, 하느님께서 인간의 가장 깊은 절망 속까지 내려오신 사랑의 계단입니다.
보나벤투라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입맞추시려고 고개를 숙이셨고, 안아주시려고 두 팔을 벌리셨으며, 우리를 풍요롭게 하시려고 두 손을 펴셨고, 우리를 당신 안으로 받아들이시려고 옆구리를 열어 놓으셨다고. 이 얼마나 놀라운 시선입니까. 우리는 오랫동안 십자가를 고통의 상징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보나벤투라는 그 상처 안에서 사랑의 몸짓을 보았습니다. 못 박힌 손은 심판의 손이 아니라 포옹의 손이었고, 찢긴 옆구리는 죽음의 상처가 아니라 생명이 흘러나오는 샘이었습니다. 숙여진 머리는 절망이 아니라 입맞춤을 기다리는 사랑의 몸짓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마지막까지 펼치신 사랑의 언어였습니다.
성녀 글라라도 같은 신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에게 편지를 보내며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포옹하십시오."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가난한 생활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끝까지 비우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필리피서가 말하는 케노시스, 곧 자신을 비우시는 그리스도의 길은 프란치스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사랑은 채우는 능력이 아니라 비우는 능력이며, 붙잡는 힘이 아니라 내어주는 용기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영원부터 서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이셨듯이, 육화하신 말씀도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내어주심으로 성부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순히 예수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장소가 아니라, 사랑의 본질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으려 하지만 십자가는 사랑은 먼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하려 하지만 십자가는 사랑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상대를 바꾸려 하지만 십자가는 사랑은 상대를 기다려 주는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문을 열어 두고 기다립니다. 끝까지 믿어 줍니다. 끝까지 희망합니다. 이것이 바오로가 말한 사랑이며,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평생 배우고 살고자 했던 복음의 사랑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십자가를 사랑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보다 더 큰 사랑을 보았고, 자신의 나약함보다 더 깊은 자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두려움의 상징이 아니라 자유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다.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믿음은 사람을 방어하지 않아도 되게 합니다. 더 이상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되고, 비교하지 않아도 되며, 경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도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바꾸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처벌이 무서워 선하게 사는 사람은 처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다시 자기 욕망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달라집니다. 우리가 바뀌어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먼저 사랑받기 때문에 우리는 변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혁명적인 진실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의인이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사랑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모든 갈망은 마침내 하나가 됩니다. 사랑받고 싶었던 갈망은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용서받고 싶었던 갈망은 이미 용서가 먼저 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하느님을 만나고 싶었던 갈망은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만나기 위하여 십자가까지 내려오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만남은 두 개의 길이 서로 교차하는 순간입니다. 인간의 갈망이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과 하느님의 사랑이 땅으로 내려오는 길이 십자가에서 하나가 됩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거리도 없고 두려움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며, 상실이 아니라 가장 깊은 충만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오래 머문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그는 더 이상 고통만 보지 않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보며, 상처만 보지 않고 그 상처를 통하여 흘러나오는 은총을 보며, 눈물만 보지 않고 그 눈물이 적시는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사랑은 오늘도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얼굴에서, 병든 이들의 신음 속에서,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끝내 품으려는 마음 안에서, 자신의 이익보다 형제의 생명을 먼저 선택하는 작은 결단 안에서, 십자가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의 갈망은 언제나 십자가를 지나갑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는 갈망은 아직 자기 자신을 향한 욕망일 수 있지만, 십자가를 지난 갈망은 반드시 사랑이 됩니다. 그 사랑은 자신을 비우면서도 더욱 충만해지고, 자신을 내어주면서도 더욱 풍요로워지며, 자신을 낮추면서도 더욱 하느님을 닮아 갑니다. 마침내 그 사람의 삶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계신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 인간의 갈망은 하느님의 갈망 안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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