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23. 큐티
마태복음 11:1 ~ 6
세례 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
관찰 및 가르침 :
1) 열두 제자를 가르치신 예수님
- 1절a.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 주님은 열 두 제자를 세우시고, 열 두 제자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가르치시기를 일단락하셨습니다.
- 주님은 무리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가르침과 핵심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르치심을 구분해서 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략이었습니다. 일반 무리들에게 할 말이 있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자면서 동행하는 이들에게 가르치시는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해의 정도가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메시지는 결국 제자들을 통해서 가르쳐지게 하심이 목적이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머무는 시간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주님이 취하신 필연적인 방법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이 증거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2)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는 주님
- 11절b.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 주님의 사역은 또한 제자들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무리들, 민중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사역을 동시에 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 주님의 복음의 비밀은 소수에게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열려져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깨닫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3) 세례 요한의 질문
- 2절.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 옥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 3절.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 세례 요한의 질문은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를 알고 있었던 것을 볼 때, 세례 요한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대단했던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당시 유대와 갈릴리 지역뿐만이 아닌 디아스포라 유대 공동체에도 회개의 세례가 선포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례 요한마저도 구약에 대해 잘못된 해석과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오시면 제국의 역사를 멸하고 불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메시야로 인식한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을 하시는데 로마가 끝짱 나지도 않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지도 않고, 마지막 심판의 징조가 없음에 대한 답답함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 사실 세례 요한의 이 질문은 의외의 질문이다. 자신이 세례를 주면서 가졌던 확신은 어디로 갔고, 하늘에서 하신 말씀에 대한 기억은 어디로 갔고, 하늘이 열려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강림한 체험은 어디로 갔는지? 왜 이렇게 세례 요한마저도 헷갈리는 것일까요? 이것이 구약에 대한 너무나 큰 오해이고 잘못된 해석이 빚어낸 문제였습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으로 예수님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구약을 존재 증명을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구약을 연구함으로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메시야에 대해 얼마나 잘못된 해석이 내려왔는지 모릅니다. 이천 년 전의 사해문서에서 메시야가 둘이 나옵니다. ‘메시야 벤 다비드’ 즉 다윗의 아들 메시야가 있고, 또 ‘메시야 벤 요세프’ 즉, 요셉의 아들 메시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요셉의 아들 메시야가 큰 전쟁에 나와서 싸우다가 죽습니다. 그가 죽은 다음에 메시야 벤 다비드가 나와서 적을 물리쳐 버리고 그를 다시 일으켜서 살립니다. 이것이 당대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사상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유대교 안에서 확장되어 내려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여전히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이러한 사상을 지금도 견지합니다.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은 시오니즘을 이끈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 의하면 시오니즘에 의해서 국가를 광복하는 것이 곧 메시야적인 표현이요 메시야의 현현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상이 현재의 예루살렘 회복운동을 하는 이들의 주요한 사상으로 자리 잡은 상황입니다. 세례 요한이 헷갈릴 정도였다면 당시에 ‘삐딱하게 볼 것’으로 작정을 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더욱 그러했던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답변
- 4절 ~ 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예수님은 “그렇다. 내가 메시야다”라고 말씀 하시지 않고 세례 요한이 보지 못했던 다른 성경의 본문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시고 있습니다.
- 맹인이 보는 것 / 못 걷는 사람이 걷는 것 /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는 것 / 못 듣는 자가 듣는 것 /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 =>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응하고 있음으로 설명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감옥에 있는 요한에게 전했고, 세례 요한은 그 말씀을 가슴에 품고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예수님을 참으로 증명했고, 예수님만이 그 말씀을 성취하심으로 자신에 대한 존재증명을 말이 아닌 능력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 참 메시야를 내가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성경의 해석만이 참된 해석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증명하는 프로세스를 배우고, 그것을 통해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의 전통을 우리가 따르는 것입니다. 구약에 대해 유대인들이 예수님 없이 해석하고 신학적인 접근을 한 것들을 참조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성경해석의 기본 관점이 되어버리면 어긋나는 접근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시오니즘의 영향권 아래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들도 오죽하면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 6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이런 말씀도 주님 외에 누가 감히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이 메시야이시기에, 구약에서 누누이 말씀하신 그분이시기에 주님은 이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늘 그렇지만 주님이 하시는 말씀 속에서는 언제나 어마어마한 능력과 에너지가 담겨있습니다. 우주를 지으신 분이시기에 자신감이 당연히 내재된 것입니다. 주님은 진짜로 책임지실 수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주님에게만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에게만 복이 있습니다.
적용 :
1) 예수님을 정말 잘 묵상하고 연구해야 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참 부족합니다. 이를 어째야 합니까? 말씀을 보고, 예수님에 대해 보다 초점을 맞추어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피상적인 것을 넘어서서 피와 살이 도는 느낌과 감각으로 예수님을 알고, 체험하고, 내 삶을 통해서 드러나도록 예수님을 알아야 하는데, 왜 나는 이리도 예수님을 머리로만 알려고 하는지요?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고, 게으른 육신의 연약함을 뛰어넘어 주님으로 만족하는 가난한 심령을 언제나 소유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성령의 충만이 필요하듯이, 예수 충만이 필요합니다. 지금 제 상태는 영육 간에 많이 정상 밑으로 떨어져 있는 상황입니다. 쉼이 필요합니다. 회복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을 통한 목표는 예수 충만, 성령 충만으로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지금의 이 시간을 지나 성령으로 충만하고, 예수로 충만한 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