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연휴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세요~~
오고가는길
안전운전
하시구요
온가족
건강하시고🌷
하시는일도
다 잘 되시길
빕니다 ~~⚘
2024.9.15
윤광호배상
🌿🌸🌿
https://youtu.be/hhRfmkx_lxA?si=JLMRBZK7E_6Ushto
<라면 이야기>
🌺오늘이 라면 생일입니다🌺
라면은 1963년 9월15일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만 61세가 됐군요.
어떻게 해서 태어났는지 알아볼까요?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아
한국 사람들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던
1961년 어느 날,
전중윤 당시 삼양식품 사장(1919-2014)은
남대문시장을 지나가다가
배고픈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선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전 명예회장은
"저 사람들에게 싸고 배부른 음식을
먹게 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 끝에
일본에서 라면을 제조하는기술을 들여옵니다.
하지만 외화가 없고,
국교가 단절됐던 터이라
라면을제조하는 시설을 들여오기는
'하늘에 별따기'였지요.
정부가 가진 달러를 민간이 원화로 사던 시절,
한 라인에
6만 달러인 라면 제조시설을 수입하기엔
전 회장은 돈이 부족했고,
가난한 정부도 옹색하긴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요.
전 회장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JP) 씨를 찾아갑니다.
“국민들 배 고프게 하지 말자”는 전 사장의 호소에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세력을 가진 JP는
마침 농림부가 가지고 있던
10만 달러 중 5만 달러를 전 회장이 사도록 도와줍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우정은 이후 오랜 세월 이어졌다지요.
그런데
신용장을 열고 전 회장이 일본으로 갔지만
일본의 반응은 냉담했다고 합니다.
일본도 어렵던 시절,
라면제조시설을 국교도 없는 한국에
선뜻 팔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러 곳을 수소문하다
전 회장은 묘조(明星)식품의 오쿠이(奧井) 사장을 만나
한국의 식량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다음 날
대답을 들으러 다시 찾은 전 회장에게
오쿠이 사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이야기를 듣고 많이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
가본 일이 없고 아직 국교 정상화도 안 됐지만,
한국전쟁이 일본경제를 재건해 준 셈이다.
당신들은 불행했지만
우리는 한국전쟁 덕분에 잘 살아가고 있다.
내가 민간 베이스로 기술을무상으로 제공하고
시설도 싼 가격으로 제공하겠다!“
오쿠이 사장은
한 라인에 6만 달러라던 라면 제조시설을 두 라인에
2만5천 달러로 즉석에서 발주해줬다고합니다.
면과 수프의 배합에 관한 일화도 있습니다.
전 회장은 일본 현지에서 라면 제작의
전 공정을배우지만 일본인 기술자들은
끝내 면과 수프의 배합 비율은 가르쳐주지 않더랍니다.
전 회장이 끝내 비율을 못 배우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
오쿠이 사장은 비서실장을 시켜
공항에서 봉투 하나를 전 회장에게 전해줍니다.
비행기에서 뜯어보라는 그 봉투 안에는
기술자들이 펄펄 뛰며 비밀로 했던 면과 수프의
배합 비율이 적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렸던 국민들의 배를 채워줬던 라면은
이렇게 눈물겨운 사연을 안고
1963년 9월15일
삼양 ‘치킨라면’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고 해요.
당시 가격이 10원,
식당에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30원이었고,
커피 한 잔 가격이 35원이던 시절이니
저렴한 가격이었음이 분명합니다.
💕
정주영,박태준
전중윤 회장같은
애국자가 있었기에
경제발전도 이룩하고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고 사료됩니다
🙏
2024.09.15
#좋은글❤
#9월15일[일요일]
🌸 사람의 관계 🌸
사람의 관계는
우연은 1% 노력은 99%입니다.
아무리 좋은 인연도
서로의 노력 없이는 오래갈 수 없고
아무리 나쁜 인연도
서로가 노력하면 좋은 인연이 됩니다.
모든 인연이 좋은 인연이 될 수 있게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합니다.
타인보다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고마운 사람이 되어주세요.
진실한 사람이 되어주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주세요.
착한 이별을 하고
그리운 사람으로 남아
오래도록 기억되는 사람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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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좋은글
♧ 효성 깊은 며느리의 추석이야기 ♧
옛날 충남 공주 땅 팔봉산 자락에 효심이 지극한 청상과부가 병든 시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본래 밭고랑 하나 없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다 그나마 시집온 지 삼 년 만에 들일을 나갔던 서방이 벼락을 맞아 죽는 바람에 졸지에 죽고 기력 없는 시아버지만 떠안고 말았다.
말 잘하기 좋아하는 동네 사람들이 과연 몇 해나 버틸 거냐고 허구한 날 수군거렸지만 청상과부의 효성은 벌써 일곱 해를 하루같이 변할 줄 몰랐다.
시아버지의 병구완은 변함없이 지극 정성이었으며 봄이면 날품팔이, 여름이면 산나물과 약초를 캐다 팔아 힘든 생계를 이어갔다.
"아가야, 이제 그만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그만큼 고생했으면 됐다.
이제 좋은 상처 자리라도 만나 배나 곯지 않고 살아야 하지 않겠니? 세상천지에 널 탓하고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병든 시아비는 틈만 나면 며느리의 손을 잡고 통사정을 하며 울었다.
"아버님, 제 집이 여기인데 왜 저를 자꾸만 내치시려 하십니까? 저는 아무 데도 안 갑니다. 살아도 이 집 며느리요, 죽어도 이 집 귀신인 제가 가기는 어딜 간단 말입니까? 제발 그런 말씀 마시고 어서 몸이나 쾌차하십시오. 아버님!”
몹시 흉년이 든 어느 해 가을, 추석 명절이 돌아왔다. 그나마 받은 품삯을 시아버지 약값으로 다 쓰고
보니 정작 차례를 지낼 일이 걱정이 되었다.
이틀 후면 한가위인데 아무리 궁리를 해 보아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빈상에 냉수만 올리고 제사를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돌아가신 분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병든 시아버지의 낙심을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며느리는 방문 앞에서 시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버님, 저 읍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며느리가 쪽마루를 내려서는데 시아버지는 그날따라 안간힘을 써가며 문구멍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사립문을 나서는 며느리의 가련한 모습을 보면서 시아비는 피를 토하며 울고 있었다.
며느리는 정처 없이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두 다리는 돌덩이를 매단 듯 천근만근으로 무겁기만 했다.
걷다 힘이 부치면 냇가 미루나무 아래서 쉬고
추수가 끝난 들녘에서 벼이삭을 주우며 걸었다.
하늘을 쳐다보니 더없이 야속하기만 한 서방의 얼굴이 어른거려 쉴 새 없이 눈물만 쏟아졌다.
걷고 또 걷고, 얼마나 걸었는지 어느새 해는 한나절이 지나고 서쪽 하늘이 봉선화 꽃잎을
흩뿌린 것처럼 군데군데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큰 재를 넘으니 마침내 오매불망 그리던 친정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버지, 어머니...”
딸은 실로 몇 해만에 보았을 친정을 내려다보며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날이 어둡기만을 기다
리며 그토록 서럽게 울었다. 얼마 후 딸은 친정 집 광속에서 제법 묵직한 자루하나를 들고 나와 미친 듯이 재를 넘고 있었다.
"되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딸은 뒤도 돌아볼 새 없이 정신없이 오던 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뭄이 들었다지만 요행히도 친정 집은 아직까지 보릿가루며 보리기울이 넉넉한지라 이고 갈 만큼은
퍼 담았다.
그녀가 그렇게 곡식 자루를 이고 뒷동산을 넘고
있을 때 말없이 툇마루에 서서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친정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딸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뒷동산을 바라보며 울고 또 울었다.
"아이고 불쌍한 것, 어찌 이다지도 박복하더란 말이냐, 오죽이나 살기가 힘들었으면 이 한가위에 친정 울타리를 다 넘었겠느냐, 아이고 불쌍한 내 딸아!”
며느리는 새벽녘이 다 돼서야 온 몸이 땀에 절어 돌아왔다. 그 머나먼 곳을 다녀왔지만 그녀는 집을 나설 때와는 달리 하나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한가윗날 아침에 산나물 반찬에 밀가루 전을 부쳐 흰쌀밥을 올리고 조상은 물론이요, 시어머니와 서방님께 제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하니 고단
함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한없이 마음이 설레었다.
그리고 추석이 지나 며칠이 되면서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사립문 밖에서 소란한 기척이 들려 밖을 나가보니 서너 말이
됨직한 좁쌀 자루가 놓여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이 흉년에 누가 이 귀한 낱알을 두고 갔을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짐작이 갈만한 구석이 없었다.
아무리 궁색한 살림살이지만 남의 곡식을 덥석
축낼 수가 없어 며칠을 새벽잠을 설치며 전전 긍긍하는데, 어느 날 또다시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몇 날 며칠을 기다렸던 터라 며느리는
죽을 힘을 다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사이, 등에 지게를 걸머진 남자가 번개같이 담을 돌아 논둑길을 내려서고 있었다.
"보셔요, 잠시만 저를 보셔요"
어느새 남자의 등 뒤까지 따라간 며느리는 그만 낚아채던 남자의 팔을 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버지!"
멋쩍은 듯 웃으며 돌아선 이는 다름 아닌 친정아버지였다.
"이것아 집에 왔으면 어미나 보고 갈 일이지. 고구마다, 허기질 땐 꽤나 양식이 되고..
정 힘들면 대낮에 다녀가거라.
네 어미에게는 아직 말을 안 했다!”
"아버지, 절 보셨으면 왜 한 번 불러주지 않으셨어요!"
딸은 서럽게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들어가거라, 어서. 동네사람 볼까 무섭다. 어서!"
돌아서는 아버지의 볼에서도 어느새
하염없는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옮겨 온 글 입니다.
구월 둘째 주 휴일이자 추석연휴 이틀째, 연일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네요.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고 맞이하는 가을, 그 시작을 알리는 한가위가 가까이 찾아왔습니다.
이번 추석엔 모처럼 함께 한 부모형제 일가 친척
들과 여유로움과 풍요로움이 가득한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요.
귀성길에 오르시는 분들은
쉬엄쉬엄 안전한
고향길 되시고 이동없이 자택에 계시는 분들은
넉넉한 마음의 휴식을 즐기시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