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713
■ 3부 일통 천하 (36)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5장 개혁 (1)
- 힘 있는 자의 시대!
도의와 인륜이 땅에 떨어진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사상 유례없는 혼란의 도가니로 치닫고 있었다.
그 선두 주자가 삼진 중의 하나인 위(魏)나라였고, 이어 초(楚)나라가 오기의 개혁정책에 힘입어
'전국칠웅'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이에 질세라 한(韓)나라와 조(趙)나라도 신흥국답게
부국강병책을 실행하여 강국 반열에 올라섰다.반면 춘추시대 때부터의 오랜 전통국들인
제(齊), 진(秦), 정(鄭), 노(魯), 위(衛), 연(燕), 송(宋)나라 등은 맥을 못 추었다.
모두가 과거의 인습에 얽매여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한 탓이었다.
이 중 동방의 대국으로 한 때 중원을 호령한 바 있던 제(齊)나라는 전화(田和)의 군위 찬탈 사건으로
인해 한층 더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한마디로, 역성(易姓) 쿠데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강공(齊康公)을 내쫓고 스스로 제나라의 군위에 오른 전화, 즉 제태공(齊太公)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이에 그 아들 오(午)가 군위에 오르니 그가 제환공이다.
춘추시대 강씨 성의 제환공과는 다른 인물인 그는 역시 오래 군위에 머물지 못했다.
6년 만에 제환공이 죽고 그 아들 전인(田因)이 제나라 군주에 올랐다.
그가 바로 제위왕(齊威王)이다.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의 시호다. '공(公)'에서 '왕(王)'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그랬다.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러 여러 강대국들은 모두 왕호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 중 춘추시대부터 왕호를 사용한 초(楚)나라를 제외하고는
제(齊)나라와 위(魏)나라가 가장 먼저 왕호를 사용했다.제나라와 위나라가 공호를 버리고
왕호를 쓰기 시작한 것은 BC 334년인 제선왕(齊宣王)과 위양왕(魏襄王) 때이다.
이들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면서 그 아버지인 제위왕과 위혜왕에게도 왕호를 추존하였다.
그래서 제위왕(齊威王)과 위혜왕(魏惠王)은 살아 생전에 왕호를 쓰지 않았으면서도 후세 사람들에게
'왕'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여기서는 편의상 처음부터 제위왕으로 표기하겠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제위왕(齊威王)이 군위에 올랐을 때 제나라는 한마디로 중원국들의 '밥'이었다.
여러 나라들이 앞다투어 제(齊)나라 땅을 침범했다.심지어는 약소국인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의
공격을 받았다.당시의 정황을 <사기(史記)>에서 인용해보자.
제위왕 원년, 삼진(三晉) 연합군이 제나라 상사(喪事)를 틈타 제나라 영구를 침공했다.
제위왕 6년, 노(魯)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양관까지 쳐들어왔다.
제위왕 7년, 위(衛)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설릉을 차지하였다.
제위왕 9년, 조(趙)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견을 차지하였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그렇다면 어째서 유독 제위왕(齊威王) 대에 이르러 열국이 앞다투어
제(齊)나라를 노리고 공격했을까?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전씨(田氏)가 군위를 찬탈한 이래 국내가 어지럽기도 하였지만, 제위왕(齊威王)은 즉위 이후
9년 동안 정사(政事)를 전혀 돌보지 않고 주색잡기와 음악에만 빠져 있었던 것이다.
나라 꼴은 당연히 말이 아니었고, 장수들은 의욕을 잃었으며, 군대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싸우기만 하면 졌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태공망(太公望) 이래 오랫동안 강국으로
지내온 전통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이대로 가면 제(齊)나라는 멸망한다.'
이런 위기 의식이 제기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제나라 전통 귀족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시 아무런 실권도 문벌도 없는 신흥 문사(文士)들에 의해서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순우곤(淳于髡)과 추기(騶忌)였다.<사기>에 보면 <골계열전(滑稽列傳)>
이란 편이 나온다.골계(滑稽)란 말을 잘하고 유창하여 막힘이 없다라는 뜻이다.
오늘날의 유머, 혹은 해학(諧謔)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그 <골계열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순우곤(淳于髡)은 제(齊)나라 사람의 데릴사위였다.
그는 키가 7척도 못 되었으나 익살스럽고 변설(辯舌)에 능했다.
어느 나라 태생인지는 모르겠으나 제(齊)나라로 오기 전에 어디에선가 학문을 공부했던 모양이다.
순우곤(淳于髡)은 지식이 꽤 높았고, 언변 또한 매우 날카롭고 풍자적이었다.
관직에 있는 문사(文士)들과 어울리는 중에 그 또한 자주 궁중을 출입하며 제위왕의 연회 자리에
참석하곤 하였다.그런데 여기서 잠시 순우곤(淳于髡)의 신분에 대해 얘기해 보아야겠다.
앞서 그를 제나라 사람의 '데릴사위'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적자(嫡子)가 없어 사위를
아들 대신 삼는 그런 데릴사위와는 유가 달랐다.
원문에는 '췌서(贅壻)' 라고 되어 있는데 그 뜻을 보면, '췌(贅)' 란 '쓸모없다'는 말이요,
'서(壻)'는 사위다.즉 '군더더기 사위' 라는 뜻이다.주로 여비(女婢)의 남편을 그렇게 불렀다.
이로 볼 때 순우곤(淳于髡)은 한 여비의 남편으로 팔려왔을 가능성이 높다.
순우곤(淳于髡)이라는 이름만 보아도 그러하다.순우는 성(姓)이고 이름은 곤(髡)인데, '곤'은 바로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 을 말함이다. 당시는 노예들의 머리를 깎게 했는데,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순우곤(淳于髡)은 노예 신분이 아니었을까?어느 날이었다.
문사(文士)들이 모여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데 순우곤(淳于髡)이 끼여 들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왕께 간(諫)하지 않는 것이오?"문사들이 대답했다.
"왕께서는 자신에게 간(諫)하는 자가 있다면 참수형에 처하겠다고 엄명을 내리셨소.
그래서 뜻은 있으나 감히 아뢰지 못하는 것이오.""그렇다면 내가 가서 한 번 아뢰어 보겠소."
"행여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시오. 그대가 아무리 재치가 뛰어나다고 해도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달아나는 일이오. 공연히 객기(客氣) 부리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러나 순우곤(淳于髡)은 문사들과 어울려 궁을 출입하다가 마침내 제위왕(齊威王)을
알현할 기회를 잡았다.그는 술을 마시고 있는 제위왕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왕께서는 '은(隱)'을 좋아하십니까?"'은'이란 은어(隱語)로, 빗대는 말이나 수수께끼를 말함이었다.
"좋아하오.""그렇다면 신이 수수께끼를 하나 내보겠습니다. 왕께서는 맞추어 보십시오."
"말해 보오.""우리 나라에 큰 새가 한 마리 있는데, 뜰 안에 앉아 3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왕께서는 이것이 무슨 새인 줄 아십니까?"이에 제위왕(齊威王)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 새를 안다. 그 새는 3년 동안 날지 않았으나, 한 번 날면 하늘 높이 솟아 오를 것이며
한 번 울면 천하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맞았습니다."그것으로 끝이었다.
순우곤(淳于髡)은 절을 한 번 올리고 나서 제위왕 앞을 물러났다.
궁에서 나온 그는 문사들에게로 가 장담을 했다."이제 우리 왕께서는 정사(政事)를 펼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순우곤의 말을 믿지 않았다.
71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