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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몰이는 안 돼”. “우리는 극우 아닙니다”. “왜? 또 극우라고 하시지요.”
정치권과 언론에서 계속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극우가 아닌 사람에게 극우’몰이’는 물론 나쁩니다. 그런데 극우 개념을 처음으로 학문적으로 정립한 학자 중의 하나인 정치학자 만프레드 풍케는 일찍이 이렇게 썼습니다.
"극단주의라는 단어에는 근본적으로 비난의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자신을 극단주의자로 지칭하는 극단주의자는 아무도 없다."(Funke, 197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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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모 중앙일간지 인터넷판에 메인으로 올라온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극우? 그건 아니죠"…대학생 그들이 태극기 든 까닭”.
그럼요, 태극기 집회 나오는 사람이 다 극우주의자나 극우적 주장에 동조하는 건 아닐 겁니다. 그래서 저도 그 ‘까닭’이 알고 싶어서 기사를 읽어 봤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에 지난 17일 서울대에서 열린 탄핵반대 집회 참석자들과의 인터뷰가 인용된 내용이 이랬습니다.
“과반 의석을 가진 야당은 예산 삭감과 줄탄핵 등으로 반대쪽 의견은 손발을 묶고 ‘자유민주주의’의 자유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계엄 말고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싶다”
“과거 계엄과 비교하면 소수 병력이고 국회가 요구하자 철회했다. 사상자도 없었다.”
“계엄을 하지 않았다면 반국가·공산주의 세력에 잠식됐을 것.”
“문재인 정부가 되니 안보의 경계를 낮추고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경제를 폭망하게 했다. ‘국민 갈라치기’ 식의 여론을 유도해 분열을 조장했고 심했다. 이것이 간첩이 들어올 틈새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극우가 아니면 무엇이 극우라는 말일까요? 이런 내용이 ‘극우가 아니다’는 근거로 제시되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설령 저런 발언이 인터뷰에 나왔더라도 기사가 설득력이 있으려면 ‘극우는 아니지만 탄핵에는 반대’인 내용을 선별해서 담았을 법도 한데 말입니다. 극우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불분명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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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터뷰도 여러 번 했지만 ‘극우’에 대한 학문적 정의를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모든 학문적 정의가 그렇듯이 극우의 정의 역시 완전한 합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많은 학자가 경험적 연구를 토대로 개념 정의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학계에서 극우의 정의는 주로 이데올로기 또는 세계관의 측면에 초점을 맞춰 왔습니다. 인종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반유대주의, 반이슬람주의, 자민족중심주의, 반공주의, 반의회주의, 군사주의, 반동성애 등 많은 요소가 언급됩니다. 파시즘, 포퓰리즘 연구로도 유명한 학자인 카스 무데는 다양한 극우의 정의들에서 반민주주의, 권위주의 국가관, 헤테로포비아, 인종주의 등 몇 가지 공통분모를 찾아냈고, 그중에서도 반민주주의가 가장 핵심이라고 했습니다(Mudde, 1995; 2000).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공격이 정치적인 측면이라면, 사회적인 측면에서 극우 세계관의 특성은 차별, 배제, 반평등입니다. “'극우'는 많은 경우 폭력의 위협이나 행사를 통해 민주적 기본권을 제한 또는 폐지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표준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소수자들을 배제, 추방, 혹은 절멸하며, 사회적 해방과 민주적 참여의 목적을 추구하는 세력들을 약화시키거나 제거하려는 행위, 인물, 조직들을 지칭한다.”(Butterwege, 1996: 27)
특히 독일에서는 민주적 헌법국가의 수호라는 관점에서 개념 정의가 발달됐습니다. 정치학자 에크하르트 예세는 극단주의의 본질이 "민주적 헌법국가의 민주적 혹은 헌법적 요소를 거부하거나 제한하려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요소는 "다원주의, 다당 경쟁, 정치적 반대의 권리, 권력분립, 보편적 기본권" 등입니다(Jesse, 2000; 2021). 이 정의는 독일 정보기관과 경찰이 감시, 수사 대상을 판단하고, 헌재가 극우단체 해산 여부를 결정할 때 결정적인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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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내가 미워하는 정당과 사회집단을 없애기 위해 민주주의를 중지시킬 수도 있다(계엄 불가피, 계몽령), 내가 위험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기관을 무력화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법원 공격은 저항권), 이 사회와 정부가 적에 의해 점령되어 있다(부정선거론, 중공배후론, 헌재빨갱이론), 이런 생각들은 전 세계의 극우 연구에서 널리 관찰되는 전형적인 세계관입니다.
이런 주장과 세력은 이미 많은 곳에 퍼져 있었지만 밝은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깊은 지하창고에 묻혀 있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윤석열은 계엄에 실패하자 자기 살자고 이 위험천만한 극우적 힘을 정치 무대에 주연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국민의힘도 자기 살자고 그 불장난에 동참해 극우정당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를 살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극우는 안 된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런데 극우를 비호하면서 ‘이것은 극우가 아니다’, ‘극우라고 부르지 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극우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싸잡아서 경멸하거나 증오해선 안 됩니다. 우리의 부모님, 친구, 형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타인의 존엄, 공존의 전제를 파괴하는 행위가 우리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10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가진 사이버렉카와 그 구독자들이 젊은 BJ여성을 ‘페미’라고 마구 공격하여 그 여성과 어머니가 자살하는 비극이 있었지만 그 유튜버는 사법처리도 받지 않았습니다. 지난 남태령 집회에서 자유발언한 중국인 여성이 그후 인터넷에서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공격을 당하고, 그 다음 집회에서 다시 무대에 올라 이 나라에서 자란 자신을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해 달라고 울며 절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고통을 외면하고, 그러한 폭력을 행한 자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공감이 앞서야겠습니까? 그건 위선입니다. 그들은 결코 악마가 아니지만 분명 악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다수가 그런 극우적 사고와 행동에 분명히 반대하고, 우리 공동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회’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