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푸어 300만명 시대][4] 소득이 최저생계비 넘으면 지원 끊겨… "일 하나마나"
'일해서 자립(自立)' 꿈을 꺾는 기초생활수급제(制)
기초생활수급 대상 벗어나면 임대아파트 보증금도 껑충
일정기간은 도움 계속 줘야 '일해서 빈곤 탈출' 가능해져
경남 김해시에 사는 13년 경력의 미용사 김모(48)씨는 몇 년간 별러온 '자립(自立)'의 꿈을 올 초에 포기했다.김씨는 고2·중2 자매를 혼자 키우는 '싱글 맘'이다. 하루 10시간 이상 독한 파마약을 만져도 소득(월 100만원)이 최저생계비(3인 가족 108만1186원)를 밑돌아 기초생활수급 혜택을 받아 왔다. 언젠가 홀로 서기에 성공하는 게 꿈이었다. 올 3월 기회가 왔다. 미용실 주인이 "가게를 싼값에 인수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김씨는 저소득층 대출 프로그램을 신청해 서류 심사를 통과했다.
그러나 구청은 "미용실을 인수하면 수급 대상에서 빼겠다"고 했다. 가게 매출이 '소득'으로 계산돼 생계보조금·주거보조비·자녀 급식비 등 연 473만원이 넘는 지원이 끊긴다는 얘기였다. 대출금 상환까지 감안하자 '자립하겠다'는 의욕이 사라졌다. 김씨는 대출 신청을 취소하고 수급 대상자로 남는 편을 택했다.
- ▲ 17일 오후 서울 강북의 한 저소득층 임대아파트 사회복지관에서 기초생활수급자들이 장기를 두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들이 일을 해서 소득이 늘 경우 수급 대상 자격이 없어지게 되고, 임대아파트 보증금까지 치솟는다. 사실상 집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근로 의욕이 있어도 일을 못하는 것이다./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열심히 일해서 소득이 오르면 국가가 곧바로 복지 혜택을 삭감하는 것이 문제다. 일하지 않고 혜택에 의존하나 일해서 자립하나 소득은 최저생계비를 간신히 웃도는 수준으로 엇비슷한 것이다.
서울 노원구의 임대아파트에 사는 이모(58)씨는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월 50만~60만원을 버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다. 궁리 끝에 이씨의 부인이 3년 전 미싱공장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1년 반 동안 월 30만~40만원씩 벌어 왔다. 이씨는 "그나마 그 돈 덕분에 딸들이 학용품 산다고 할 때 1000원씩이라도 쥐여줄 수 있었다"며 "둘이 벌면 살림이 좀 나아질 거라는 희망도 있었다"고 했다.
여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실태조사 나온 공무원이 "부인이 계속 일을 하면 수급이 끊어진다"고 한 까닭이다. 일용직 벌이와 임대아파트 입주 혜택 등을 합산하면 서류상으로 월 90만원을 버는 셈인데, 부인 벌이를 더하면 4인 가족 최저생계비(당시 월 126만원)를 넘어선다는 이유였다. 임대아파트 보증금도 220만원에서 370만원으로 올려줘야 한다고 했다. 이씨의 부인은 결국 일을 그만뒀다. 이씨는 "일 하겠다는 사람을 나라에서 격려는 못 해줄망정 '주는 돈으로 대충 살라'고 하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했다.
임대아파트주거복지시민운동연합 윤범진(52) 회장은 "수급 대상에서 제외되면 임대아파트 보증금이 껑충 뛰는 탓에 일자리가 나도 일을 못 하는 사람이 열에 아홉쯤 된다"고 했다. 윤 회장은 "남들은 '정부에서 돈 타니 좋겠다'고 하지만 수급자 마음은 그렇지 않다"며 "다들 자립하고 싶어하는데 나라에서 제대로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천 계양구에 사는 한상춘(43)·강민정(39)씨 부부는 몇 년 전 아들(14)의 백혈병 치료비로 전세 보증금 3000만원을 몽땅 털어넣고 빚까지 졌다.
수급 대상자가 된 부부는 현재 인천의 한 자활공동체에서 둘이 합쳐 월 152만원을 번다. 1년 수입은 자활근로임금에 급식비·난방비 지원 등을 합쳐 2023만2000원이다. 병원비 무료에, 앞으로 4남매가 차례로 고등학교에 가도 등록금이 전액 면제된다.
부인 강씨는 "마음 같아선 새벽 2~3시까지 일해서라도 한시바삐 자립하고 싶다"고 했다. 문제는 제도다. 남편 한씨는 자활근로 틈틈이 도배 자격증을 땄다. 부인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준비 중이다. 부부가 도배와 요양보호로 각각 월 90만원 안팎을 벌면, 월급과 자산을 합친 가구 소득이 최저생계비(6인 가족 월 181만7454원)를 웃돌아 수급을 못 받게 된다. 1년 수입은 수급 받을 때보다 불과 176만8000원 많고, 등록금과 병원비는 고스란히 본인 부담이 된다.
강씨는 "평생 수급자로 산다고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며 "언젠가 반드시 수급자에서 벗어나 남들처럼 잘살고 싶다"고 했다.
"언제까지나 기대겠다는 게 아니에요. 우리 집 살림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때까지만 도와주면 좋겠어요. 시간이 더 흐르면 이대로 주저앉을 것 같아요. 그게 제일 무서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