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1/07/금/강서/흐림]
녹색실천단/새터민주거단지/김포공항노조/인드라망10주년후원의밤
= 일정 : 궁산 소악루(절명상)-양천향교-녹색실천단-재활용단지-방화동단지(*새터민 주거지역 방문)-김포공항(공항관리공단노조방문?)-(차량이동)-2:00 마곡역-마곡지구(논길따라걷기)-인드라망생명공동체 10주년 후원의 밤-안상수교수님댁(잠자리)
= 걸은거리 : 7km
= 글쓴이 : 백선희(강릉등불)
먼 것을 쫒는 사람들, 가까운 이웃 돌아보다
노동조합, “니들끼리는 말고 다른 건 뭐할래?”
오바마 당선, 먼곳의 이야기와 가까운 곳의 이야기
인자교회에서 목사님 부부께서 차려주신 아침식사를 하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아프리카 먼 곳에 있는 아이들은 동정으로 바라보고 도와주는데, 왜 가까이 있는 부모나 이웃들은 잘 바라보지 못하는가에 대해 묻는 시간이었습니다.
공부가 끝나고, 이동하는 차안에서 도법스님과 이성구님의 대화가 들렸습니다. 미국의 오바마 흑인대통령이 당선된 이야기였지요. 도법스님께서는 흑인대통령이 당선된 것이 국가체제 안에서 추상적인 틀로는 의미가 있는데 ‘실제 민중들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가 관건이라 하셨지요. 또한, 개개인의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삶의 방식을 가꾸어야 점차 나아가 국민의 성숙이 이루어진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루살이다 아무도 내 삶을 대신할 수는 없구나!” 이런 자각과 인식을 가져야 한다 하셨지요. 생명평화 운동진영이 생명평화를 자기 자신에게 절박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추상적으로 다루고 있다 합니다. 단순 소박한 삶과 민주화를 내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 그 길을 묻습니다.
교육차, 빈부차, 환경파괴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발산동 궁산근린공원에 도착하여 소나무 숲 속 푹신한 흙바닥에서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절명상을 하였습니다. 숲 속의 고요함과 푸근함을 만끽하고, 열린사회 강서양천시민회 변광님, 생태보전시민모임 박재선님과 함께 순례를 시작하였습니다. 윽한 솔향으로 맺힌 마음의 평안함은 순례자의 걸음을 가볍게 해주었습니다. 깨어있는 자기를 항상 망각하지 않고 걸었으면 좋겠다는 순례자의 한마디를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남았다는 향교에 들렀습니다. 태종12년(1412)에 세워진 전국의 234개 향교 가운데, 서울시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향교라 합니다. 동양의 성인으로 널리 알려진 공자를 비롯한 다섯 성인과 중국 송나라 성현3분과 조선의 선현 18명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하였지요. 그 옛날, 배움에 대한 열정은 이렇듯 제도적으로도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작은 하천을 지났을 때, 강서양천환경운동연합 김순철님을 만났습니다. 순례단을 만나러 일부러 나와 계셨다 합니다. 이 하천주변은 하루종말처리장과 빗물펌프장 건립계획을 가지고 있고, 인천공항으로 가는 지하철 길을 공사 중이었습니다. 하천에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고라니가 살고 야생 조류들이 많이 살았는데, 공사로 인해 지반이 흔들리면서 많이 떠났다 하지요. 생태공원화 한다며 정화를 시작하여 20만평의 땅 중에 10만평은 살아있다 하셨습니다.
강서양천환경운동연합 사무실로 들어서는 고불고불 길은 강서구 57만 명이 먹고 버린다는 음식물쓰레기처리장과 생활쓰레기장이 있었습니다. 점심식사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쓰레기 업체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새벽부터 지금까지 작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환경운동연합 사무실 앞에 펼쳐져 있는 서울시 소유의 10만평의 땅은 개발계획이 있어 투기업자들이 보상을 위해 비닐하우스를 설치하고 나무 등 이것저것을 심어놓고 방치해둔 상태였습니다.
한줌의 흙이 될 때까지 환경운동을 하겠다 하시던 김순철님이 계시는 강서양천환경운동연합은 93년 안양천 살리기부터 시작하여 15년째 많은 환경활동들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특히, 폐현수막을 재활용한 것을 5년째 해오고 있었지요. 폐현수막으로 폐기물 마대를 만들어 정비업체에 주는 일이 대표적이었습니다.
현수막 마대에 폐기물 기름걸레를 담으면 기름이 흡수되어 땅을 덜 오염시켜서 좋고, 현수막도 다시 이용되어 좋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주머니를 만들어서 지난 10월 친환경전시회에 200장 만들어 배포했는데, 더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고 하셨습니다. 생태보전 시민모임에서는 이 현수막으로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학교에 배포했더니 망가지지도 않고 좋더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옆 건물 강서구 불법광고물 정비작업장에서는 시청디자인과의 하청 직원들이 거둬들인 불법현수막들을 정리하고 계셨습니다. 서울 25개구에서 유일하게 이 작업을 계속 해오고 있다 합니다.
맞은편 펼쳐진 농장을 둘러보았습니다. 근처 초등학교에서도 농사실습을 하는 농장이 있었고, 환경운동연합이나 생태보전시민모임에서도 배추와 무를 심어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인분을 사랑하지 않으면 농부가 될 자격이 없다’는 김순철님의 철학이 농장에 빛을 발하는 듯 보였습니다. 길에 떨어진 낙엽들을 퇴비로 쓸려고 모아두셨고, 아이들과 흙을 만지면서 먹을거리 교육을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문득 순례자 장경훈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배추밭에서 널려져있던 배추잎들을 가져다가 토끼들에게 주었습니다. 어느새 이 순례자께서 평소의 말과는 다르게 겸허히 실천하는 모습들이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마곡레포츠센터, 배드민턴장을 지나 강서구 마곡동 91번지, 서남 물재생센터 앞에 섰습니다. 서부권 지역 분뇨를 처리한다는 이 곳 주변에는 아파트 단지가 있었는데, 저녁이 되면 똥냄새가 나서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 합니다. 건축폐기물 집하장, 음식물쓰레기처리장, 쓰레기집하장, 분뇨처리장 등 이쪽 지역에 혐오시설이 많았습니다. 서울의 서부끝, 혐오시설은 그렇게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이중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지요.
신방화사거리를 지나니 현대산업개발에서 서울지하철 903공구의 노면을 복구공사 중이었습니다. 2001년부터 많은 논란 속에 7년째 진행 중인 지하철 9호선공사는 올 12월까지 완공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일대 방화지역은 마곡지구 재개발지역과 방화뉴타운, 화곡뉴타운이 들어설 예정으로 강남의 땅 부자들이 이미 땅을 사놓고 개발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마곡에 있던 낮은 초가집과 연립주택들은 사라져가고 있다 하셨지요. 방화시장 골목에 들어섭니다.
새터민, 가까운 이웃으로
방화시장을 지나 점심 먹을 칼국수 집에 도착했습니다. 점심을 함께 먹으려고 탈북한 젊은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열린사회 강서양천시민회 변광영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지역은 서울지역에서 드물게 조선족들과 중국 한족이 많이 산다고 합니다. 주로 고시원에서 살고 근처 식당과 노래방에서 일하고 계신다 하셨지요. 이렇게 코리안 드림으로 넘어온 한족 ․ 조선족 여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분들의 일터에서도 인권유린에 관한 문제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하십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응하여 지역시민단체인 열린사회 강서양천시민회는 강서구 주민들에게 탈북자와 한족 ․ 조선족, 성매매여성 등 소외계층에 대한 인식과 인권침해에 대한 문제들을 새롭게 교육하고 있고, 기초생활수급자와 탈북자가 안정적으로 삶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돕는 일, 집수리사업 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현실과 그에 따른 노력과는 무관하게 재개발되어 삶터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 실정이라 하셨습니다. 일터는 이곳에 있고 김포 ․ 방화 외곽동네로 삶터를 옮기셔서 새벽 다섯시에 출근한다는 새터민들, 그들의 애환이 느껴졌습니다.
이 곳 한족과 조선족의 새터민들 이외에 탈북 하셔서 자리를 잡으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 곳 탈북자들은 방화 6~9단지에 20분 정도 살고 계신다 합니다. 서울에만 2천여명 가까이 된다 하는데, 노원구 ․ 강서구 ․ 양천구의 가양동, 방화동에 주로 살고 있다 합니다. 탈북하신 분들과 가까이 지내신다는 변광영님은 지금 오고 있는 그 친구하고도 6개월을 가까이 살았다 하지요. 탈북자들의 삶의 애환을 함께하려는 듯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새터민과 함께 숨 쉬며 부대끼며 울고 웃으며 지내고 계신 변광영님이 며칠전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순례자는 갑자기 스스로가 간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떤 한 상황으로 그 사람을 달리 볼 수 있다는 것, 참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정성스럽고 진심으로 느껴져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대화를 오래 나누는 동안 그 친구가 왔습니다. 변광영님은 이 김광훈이라는 친구와 형님 동생 하는 사이라 하지요. 함경남도 함흥에서 온지 3년쯤 되었다 합니다. 검정고시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시민회에 자원 활동을 하며 대학생 자원봉사양성교육에 기꺼이 와서 탈북한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라 하였습니다. 북쪽에 어머니와 누이를 두고 아버지와 동생은 시간의 격차를 두고 함께 내려왔다 합니다. 시베리아 벌판을 거쳐서 몽골을 거쳐서 중국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탈북한 청년, 복령을 귀신같이 잘캐고 잣을 잘 딴다는 청년의 모습 속에서 그 엄청난 삶의 고난이 느껴졌습니다.
무어라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요. 사람은 이렇게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동갑내기라서 친구하기로 하고 연락처를 주고받았습니다.
진보신당 강서구위원회의 점심탁발을 받고 길을 나섰습니다.
아시아나 노동조합, 진보의 길을 묻다
오후에 아시아나 항공노동조합을 방문하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차를 타고 이동하였습니다. 이기준 지부장 외 13분께서 순례단을 맞이해주셨습니다. 아니 맞이해 주셨다기 보다 순례단이 회의실 장으로 덜컥 방문해버린 모습이었습니다.
순례단의 소개를 하고, 이어서 노동조합에 대한 소개와 실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IMF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합니다. 내년에 창립 10주년이 되어 그동안 했던 내용들을 점검하고 어떻게 조합원을 늘려갈 것인가 점검하는 집행부 회의를 하고 계셨던 중이었지요. 2001년 파업을 거치면서 2700명~3000명 육박하는 조합원이 활동하다가 7년여 만에 1/10로 줄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조합 활동으로 인한 인사상의 불이익과 사회전반에 걸친 정규직의 보수화, 노조사업의 연이은 실패, 진보진영 전체의 분열이 원인이라 하셨지요.
노조가 쇠퇴국면에 접어들면서 내년 10주년을 기념하여 조직을 강화하여 현장중심으로 체계를 세워보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합니다. 당면과제는 남아있는 조합원 교육을 강화하여 일터 현장 속에서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지요. 전체 아시아나 항공 7천5백 노동자 중에 항공지부 노동조합의 구성원은 조종사 이외의 직업으로 정비관련, 발권관련, 승무원, 요리사 등등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조합원들은 거의 정규직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아시아나 항공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직접고용형태로 인턴제도와 아시아나 제3회사의 도급 ․ 분사 ․ 외주영역 형태의 직원들이라 하셨지요. 항공 조종사는 한국인만 천여명 가까이 되어 따로 노동조합을 두고 있었습니다.
도법스님께서 조합원 분들께 질문하셨습니다.
흑인대통령으로 바뀐 결정적 이유는 미국이 그동안 철저하게 뭉쳐서 가진 고립으로 인한 변화의 요구가 분출하여 오바마가 당선된 것이라 합니다. 이 논리가 꼭 강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약자에게도 적용된다 하셨지요. 강자들에게 대응하기 위해 딸딸 뭉치자는 논리는 그동안 투쟁과 패배로 이어져왔고, 끊임없는 싸움의 논리를 만들어 내왔다 합니다.
조직 강화 논리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국민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는 논리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현대사에서 이루어진 극단적인 좌우익문제, 진보와 보수의 문제, 너와 나의 분리된 논리를 넘어서서 이 한목숨 건강하고 편안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게 주체적으로 생명을 다루지 않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극단적인 경쟁체제가 구조화되고 있는 근본원인이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합니다. 어떤 권력이나 지식, 자본의 능력을 갖고 있더라도 이런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하시며, 늘 편 갈라서 센자, 약한자 하는 논리는 반복될 수밖에 없으니, 약자가 늘 고통 속에 휩싸이며 다시 투쟁하는 뺏고 빼앗기고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논리를 반복하지 말고 더불어 함께 평화적으로 살아가는 살림의 문명을 만들어가자고 강조하셨습니다. 노동조합, 우리의 활동과 노력이 잘 갈 수 있도록 새로운 국면으로 가야하지 않겠는가 하시며 이분법적이고 대립적인 방식, 한계와 모순을 넘어서는 길이 필요 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길의 첫 시작이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내 생명에 대한 이해와 인식부터 시작될 것이었지요.
이기준 위원장은 ‘니들끼리는 말고 다른 건 뭐 할래’ 이런 말로 들렸다고 하십니다. 진보진영의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서기 위해 훨씬 더 겸허하고 열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야기하셨습니다. 강자만이 아니라 약자 자신에게도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가기를 바라며 노동조합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더 겸손하게! 더 성실하게!
절명상하러 가는 차 안에서 도법스님께서 순례자들에게 더 겸손하게! 더 성실하게!를 주문하셨습니다.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만남들에 대한 순례자의 자세는 꼭 그들이 무언가를 해주어야만 하는 것처럼 거만한 자세가 될 수 있는 것을 경계하라는 뜻인 것 같았습니다.
순례자들은 반성의 마음과 돌아보는 마음으로, 공항 근처 도로 옆길에 있는 작은 잔디밭에서 절명상을 하였습니다. 반성의 마음과 돌아보는 마음은 순례자들의 반복된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행동으로 옮겨야할 깨어있는 자세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절명상 하는 자리, 이 지역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는 순례자 장경훈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도로 좌우로 아주 오래전부터 논이 넓게 펼쳐져있었다 합니다. 지금도 있긴 있지만, 저 멀리 아파트 단지가 빽빽이 들어서 있었고, 재개발 지구로 지정 된지 오래였습니다.
차가운 바람결을 맞으며 절명상을 마치고, 인드라망생명공동체 10주년 후원의 밤 행사참여를 위해 조계사로 이동하였습니다. 성산대교를 지나는데, 양화대교 철탑이 보였습니다. 철탑 중간에 보이는 비닐을 보니 아직도 단식농성을 아직도 하고 계시는 듯하였습니다. 추운 날씨에 걱정이 되어 마냥 기도를 하며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세상에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치열하고 처절한 삶의 목소리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조계사에 도착하여 쉬다가 저녁을 먹고 후원의 밤 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후원의 밤 행사가 끝나고, 생명평화로고를 만들어주시고 물심양면으로 늘 응원하시는 안상수 교수님 댁에서 하룻밤 묵었습니다. 평창동 가파른 언덕 위에서 30년을 사셨다는 안교수님 부부의 모습은 부자동네 평창동이라는 동네이름과 무색하게 단아하고 검소한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밤늦게 우리네 삶에 대한 이야기가 정겹게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