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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라킨 "나에게 야구는 도전이었다"
2004년 4월 6일 새벽 4시. 자정부터 찾아온 떨림은 그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다가오면 올수록 떨림은 더욱 커졌다. 나의 첫 야구중계방송까지 남아있는 시간 단 10분.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 파크에서 열리는 신시내티 레즈와 시카고 컵스의 내셔널리그 개막전. 이 날의 떨림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2004년 메이져리그의 진정한 개막은 바로 오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2004년 메이져리그 내셔널리그 개막전 신시내티 레즈와 시카고 컵스의 경기를 지금부터 함께하시겠습니다."
일주일전 이 중계방송을 맡게 됐다는 이야기를 처음 접하고 무려 일주일을 준비해온 오프닝 리드멘트였다. 이 멘트를 던지기 전까지 나의 뱃속은 수백마리의 나비들이 들락날락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주일의 준비기간동안 나는 2003시즌 두 팀의 테입을 빌려서 수십 번을 돌려보며 Play-by-play 콜을 연습했고 선수들마다 각각 그들을 소개할 간략한 멘트들을 준비했다. 그중 이런 멘트를 써둔 선수가 있다. ‘신시내티의 상징, 1995년 MVP, 올스타, 1996년 유격수 최초 30-30클럽, 현재 AL 3대유격수 등장이전 최고의 유격수' 그는 배리 라킨이었다.
라킨은 90년대 신시내티의 상징과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 gettyimages/멀티비츠 |
2011년 2월 15일, 오후 6시. 나는 다시 떨고 있었다. 조금 후면 바로 그 선수. 배리 라킨을 직접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허구연 야구발전실행위원장이 주최한 한국의 스포츠방송 중계진들과의 만남에서 나는 신시내티의 상징 배리 라킨을 만났다. 은퇴한지 벌써 6년이 지났지만 그는 세월의 흐름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멋진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 복싱을 하고 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위에 서술한 나의 야구중계방송 경력의 시작은 그와의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깰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됐다. 그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되물었다.
"그날 내 성적은 어땠나?"
"그날 당신은 4타수 무안타였고 볼넷으로 타점 하나를 올렸다."
"오? 그런가? 그런 기억은 빨리 잊어주길 바란다."라며 웃으면서 답했다.
그는 처음 방문한 한국에 대해서 궁금해 했다. 당일 오전과 오후 만나고 온 경찰청 야구팀과 휘문 중학교 야구팀에 대해서도 간단한 느낌을 전했다.
"사실 아침에 만났던 경찰청 야구팀과는 너무 추워서 간략한 실내 연습으로 그쳤다.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눈 정도다. 이후 휘문 중학교로 가서는 적잖이 놀랐다. 나와 조(동행한 전 몬트리올 투수 조 로건) 앞에서 모든 선수들이 손을 뒤로 깍지를 끼고 서있는 것이다.(열중쉬어자세를 의미) 어린 선수들이 너무 딱딱한 분위기였다."
나는 "그건 당신의 경력을 듣고 어린 선수들이 언 것 아닐까?"라 물었다.
"야구선수는 그래선 안된다. 내가 라킨이면 그들도 또 누군가여야만 한다. 자부심이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그런 딱딱한 분위기가 너무 어색해서 우리는 이 선수들을 위해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자리에 앉은 이후부터는 조금씩 서로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이후 간단한 연습을 가졌다. 야구는 개인스포츠이기도 하지만 팀 스포츠다. 그렇기 때문에 딱딱한 분위기보다는 활발한 분위기가 도움이 되고 결국 이것이 강한 팀을 만든다."
그가 현재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는 자선활동이었다.
"나는 2년 전부터 자선활동을 위해서 나의 이름을 건 와인브랜드를 열었고 수익금을 전액기부하고 있다. 그리고 체육관을 지었다. 이것은 내가 그동안 받아온 것을 다시 베푸는 당연한 과정이다."
어린 선수들을 위한 야구교육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경험적인 측면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두 딸과 아들이 있다. 그런데 아들이 7살 때(아들 쉐인 라킨은 현재 풋볼선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우리 아들은 배트로 어떻게 공을 맞추는지를 켄 그리피에게 배웠다. 그런데 체육관에서 야구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농구코치가 아들의 스윙을 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스윙을 전부 뜯어고쳐놓은 것이다. 바뀐 아들의 스윙을 보니 그런 방법으로는 전혀 공을 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 코치는 그 스윙이 옳다면서 켄 그리피에게 배운 스윙을 부정했다. 문제는 미국에서는 유소년야구에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야구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어린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친다. 심지어 그런 사람이 방송해설까지 하는 것을 봤다. 이럴 경우 야구는 어린이들과 대중들에게 잘못 전달된다. 큰 문제다."
그렇다면 그는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을까?
"야구를 가르치는데 대한 커리큘럼의 확립이 가장 중요하리라고 본다. 물론 모두의 투구폼이나 타격폼은 조금씩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치고 던지고 받기)은 변하지 않는다. 어린 선수들에게 이런 기본을 정확하게 전달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커리큘럼의 확립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강조하는 바이다."
라킨과의 즐거웠던 식사 시간 (가운데 라킨 우측 조 로건) 사진 : 정우영 |
이렇게 기본을 강조하는 라킨은 어떻게 야구를 접했을까?
"미국스포츠 교육의 특징은 어린 시절 다양한 종목을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여러 스포츠를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풋볼(미식축구), 농구, 야구를 했는데 가장 많이 시간을 할애한 스포츠는 풋볼이었다. 대학도 풋볼로 미시간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입학당시에는 다른 여러대학에서도 제안을 받았다. 풋볼선수를 할 때 포지션은 디펜시브 백이었는데 대학에 들어가니까 고교생 때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일단 선수들의 덩치가 너무 컸고 운동능력이 엄청난 선수들이 많았다. 보다시피 나는 작다. 나의 덩치로는 풋볼 수비라인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결국 풋볼은 내가 갈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때부터 야구에만 전념하게 됐다."
스포츠에서 다양한 종목을 접하는 것은 물론 긍정적일 수 있지만 야구라는 종목에 있어서는 상당한 부정적인 영향도 있다고 라킨은 설명했다.
"야구는 모두 경쟁이다. 그리고 가장 힘든 점은 기량이 잘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늘기는 는다. 그러나 긴 시간을 투자를 해도 금방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며 정말 천천히 거의 아무도 느낄 수 없게끔 기량이 향상된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것이 많은 선수들이 야구를 포기하고 다른 종목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고 있다."
이 대답에 나는 최근 미국에 일고 있는 싸커맘 열풍도 어느 정도 이런 현상과 연관되어있는 것이 아닌지를 물었다.
"정확한 지적이다. 유소년 층에서 야구를 외면하는 이유는 야구가 실력이 늘기 너무나 어렵고 경쟁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유소년 클럽에서 축구와 농구의 경우는 아이들이 오랜시간 운동을 하고난 이후 서로 성취감을 느끼면서 승자가 된다. 이긴 팀, 진 팀이 없이 모두가 승자가 되고 모든 팀원들이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야구의 경우는 그것이 힘들다. 경기를 치르면 승리팀과 패하는 팀이 생긴다. 패하는 팀의 소년들은 야구에 대한 아픈 기억이 생긴다. 이것은 야구에 대한 포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베이스볼맘은 줄어들고 싸커맘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런 점은 변해야한다. 특히 어린 선수들에게 승부를 강요하는 야구는 바뀌어야 한다."
이후 라킨은 유소년 선수들의 혹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12살짜리 선수를 만났는데 토미 존 수술을 받는다고 하더라. 놀라운 것은 그 어린 선수가 직구, 커브, 슬라이더를 그 나이에 모두 던졌다고 했다. 옳지 않다. 심지어 우리 동료의 아들이 리틀리그 월드시리즈에 출전했는데 그 아이가 한 경기에서 무려 120개가 넘는 공을 던졌다. 내 동료의 아들이 말이다. 말이 안된다. 이런 어린 선수들의 혹사는 반드시 고쳐야하고 특히 승부의 결과보다 과정을 즐길 줄 아는 유소년 야구문화로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 진짜 '라킨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과연 그에게 야구는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
"야구란 매 순간이 도전이다. 그 도전은 야구를 하는 어느 시점이건 계속된다. 만일 나에게 약점이 하나 있다고 가정하자. 이것은 당장 올 시즌부터 한국인 ML 선수인 추신수가 겪게 될 일일지 모른다. 투수들은 정말 똑똑하다. 그들은 상대의 약점을 금방 잡아낸다. 만일 한 가지 약점이 노출될 경우 소문은 순식간에 퍼진다. 나 같은 경우는 사실 몸쪽 낮은 볼을 굉장히 싫어했다. 하지만 그것이 알려지면 안됐다. 말했듯이 투수들은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쪽 낮은 공이 오면 나는 의식적으로 더 큰 스윙을 했다. 큼지막한 파울이 될 때도 있고 스윙을 하더라도 자신있는 스윙을 하면 투수들은 몸쪽 낮은 공에 대해서 약점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나에게는 약점을 극복해가는 이런 과정 도 도전이었다."
도전을 즐긴 그에게 큰 영예를 안겨준 신시내티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신시내티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그리고 19년의 프로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며 지금까지 나와 내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미시간으로 대학을 다닐 때를 제외하면 신시내티를 떠나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신시내티는 더욱 특별하다."
그 특별한 도시 신시내티에서 보낸 19년간의 선수생활 중 그가 생각하는 가장 특별한 순간이 궁금했다.
1990년 월드리시즈 우승의 주역 라킨 ⓒ gettyimages/멀티비츠 |
"가장 소중한 순간은 1990년 우승의 순간이다. 그 순간은 단순히 믿을 수 없다는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 상대팀은 오클랜드였고 정말 대단한 팀이었다. 당시 오클랜드에는 호세 칸세코, 마크 맥과이어, 리키 헨더슨, 데이브 스튜어트, 밥 웰치 등 수많은 수퍼스타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 팀을 꺾었다! 마지막 경기는 더욱 극적이었다. 우리는 7회까지 0:1로 뒤져있었다. 8회 초에 내가 선두타자 안타를 때린 후 두 점을 내면서 역전했다. 마지막 수비에 나가는데 정말 떨리더라. 원아웃이 됐는데 칸세코가 대타로 나왔다. 몸이 좋지 않던 칸세코는 땅볼로 아웃됐다. 이어서 타자가 랜스포드였는데 공이 1루 쪽으로 떴다. 파울지역이었다. 잡아. 잡아. 잡아. 속으로 몇 번을 외치는데 1루수가 오락가락 따라가면서 잡았고 그렇게 우리는 월드 챔피언이 됐다. 수퍼스타 팀이었던 오클랜드를 상대로 한 점차로 역전승을 거뒀다는 것과 4:0으로 월드챔피언이 됐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돌아봐도 어떤 단어하나로만 표현하기에는 모자라다. 그 순간은 단연 나의 야구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다."
그에게는 수많은 업적과 기록적인 성취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인 성취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나는 12번 올스타전에 나섰고 1995년에는 리그 MVP를 수상했다. 그리고 MVP 이듬해에는 30홈런 30도루 이상을 기록했다. 그런데 MVP를 탔던 1995년에는 NLCS에서 애틀랜타에게 졌다. 그것도 0:4로. 또 30-30을 기록했던 1996년에는 플레이오프 무대를 아예 밟지 못했다. 즉, 내가 어떤 기록을 세우건 팀 성적과 연결이 되지 않으면 그 의미는 크지 않다."
라킨이 오랜시간 꾸준하게 기록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야구는 도전이다. 나에게는 특히 더 그랬다. 나는 30-30을 기록했지만 장타자도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홈런타자들은 공을 치는 순간 홈런인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타구가 크게 날아간다. 하지만 나의 타구는 그렇지 않았다. 맞는 순간에는 라인드라이브처럼 낮게 가다가 공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올라가며 날아갔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뛰어난 운동능력을 소유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수비를 할 때도 도전해야했다."
결국 이런 야구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 배리 라킨을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마치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유격수 수비를 보여준 배리 라킨에게 수비 또한 도전이었다는 이야기는 의외였다. 그가 수비에는 어떻게 도전했는지 듣고 싶었다.
"수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다리의 위치와 몸의 중심이다. 그리고 타구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것보다 능동적인 자세가 중요하다. 공이 날아오기 전에 먼저 생각하고 날아올 위치를 예측하고 공이 왔을 때 대처할 수 있는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라킨에게 야구는 끊임없는 도전이었다 ⓒ gettyimages/멀티비츠 |
공격과 수비. 야구의 모든 것을 도전이라고 말한 그에게 가장 힘을 준 사람들은 누구일까?
"가족이다. 나는 신시내티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모든 가족이 신시내티에 살고 있다. 아버지는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나의 홈경기를 챙겼다.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기를 치른다는 것은 엄청난 행복이다. 1996년 도루는 이미 30개를 넘겼고 홈런이 29개였던 시점이었는데 홈경기를 치르게 됐다. 타석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좌석을 쳐다봤는데 안계셨다! 속으로 이럴 때 홈런을 치면 어떻게 하나 생각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휘두른 타구가 아주 큼지막하게 펜스를 향해 날아갔다. 아버지에게는 천만다행으로 담장 바로 앞에서 잡혔다. 그리고 그 다음 타석이었는데 아버지의 자리를 보니 계셨다. 마음놓고 휘두른 공은 펜스를 넘겼고 아버지를 포함한 나의 가족은 나의 30-30 달성의 순간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혹시 가족이 있는 타이밍에 홈런을 치기위해 투구를 고른 것이 아니냐고 물었고 라킨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내가 공을 골랐다기보다 홈런이 나를 고른 것이 아닐까?"
라킨과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가 됐다. 이 글을 읽고 '아. 라킨이라는 선수는 평범했지만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구나.'라 생각한다면 그의 겸손한 모습에 잘못판단한 것이다. 그는 고교졸업 후 1982년 메이저리그 신인드래프트에서 신시내티에 2라운드로 지명됐다. 이 지명에 본인은 만족하지 못했겠지만 메이저리그에서 2R는 충분한 상위라운드 지명이다. 분명 어린시절 야구적인 재능도 충분히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1982년 2라운드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름인 배리 본즈와 데이빗 웰스의 이름도 보인다.) 그는 고교 졸업반 시절 풋볼로 미시간대학과 노틀담대학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고 결국 미시간대학에 풋볼장학금으로 입학했다. 이 역시 뛰어난 운동능력에 대한 인정이다.
이후에는 인터뷰에서 밝혔듯 입학 후 풋볼선수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전문 야구선수로 전향 을 했는데 한가지 다행이었던 점은 미시간대학이 라킨에게 야구장학금도 제안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지 않고 또 선수로서의 경력에 공백도 없이 수월하게 야구로 종목전환을 할 수 있었다.
한가지 더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모습은 야구로의 종목전향 후 모습이다. 라킨은 야구로 마음을 굳히고 전념한지 불과 2년 만에 1984년 LA올림픽(당시 야구는 시범종목이었다.) 야구대표팀에 승선했다.
이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선수가 그 자신을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언제나 도전하는 자세로 야구에 임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식사를 마친후 (좌측 배리 라킨, 우측 존 로건) 사진 : 정우영 |
지금까지 라킨의 야구인생과 그가 생각하는 야구라는 스포츠에 대해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이야기를 접한다고 해도 이 선수가 어떤 선수인지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쉽고 편할 듯하다. 내가 라킨을 만나러 가기 전 들뜨는 마음에 여기저기 자랑을 했는데 '배리 라킨이 누군데?'라며 되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에게 짧게 답했다.
"양신 플러스 종범신."
글을 다 쓰고 난 후인 지금도 전설적인 선수 배리 라킨과 만나 눈을 마주치며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에 가슴이 떨려온다. 마치 그와 처음 특별한 만남을 가졌던 7년 전의 그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