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창으로 바라본 세상사 / 정명숙 수필집 ＜무인도＞의 수필세계

[김혜식]

심연의 창으로 바라본 세상사

-정명숙 수필집『무인도』의 수필 세계-

수필은 독자를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그 감동은 순수와 진실을 바탕으로 하기에 타 문학 장르와 다르다. 문장의 세련미와 숨겨진 이야기의 신비성이 결합되어 표출되는 수필 문학은 그래서 독자의 마음을 일거에 사로잡는 힘을 갖는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새록새록 터져 나오는 비밀스런 얘기와 그것을 해부하는 능력, 그리고 사상과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는 실리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니, 수필집을 가까이 함은 교양을 키우는 첩경이 된다.

▱정명숙의 수필집『무인도』에 대한 개략적 총평

평범한 일상의 사건들이건만 작가의 원고지에 담긴 이야기는 무게가 있고, 재미가 있고, 정이 묻어나 수필집을 손에서 놓기가 싫어진다. 이것이 수필가 정명숙의 작가적 역량이다. 누에가 파란 뽕잎을 먹고 흰 실을 토해내듯, 정명숙의 손을 거치면 슬픔도 기쁨으로, 우울함도 즐거움으로 변한다. 이렇듯 정명숙은 예술이 추구하고자 하는 미적탐구에 한발 다가서 있다.

문학이 추구하는 최대공약수는 미적 공감이다.

▱ 인간적 냄새를 맡다

경험과 지식과 사색과 철학을 바탕으로, 제한된 이야기를 고도의 예술문장으로 빚어내는 것이 수필이기에, 수필을 인생 최고의 문학이라고 감히 정의한다. 그래서 수필은 비교적 풍부한 삶의 경험을 가진 무게 있고, 세련된 중견을 독자로 하고 있다. 때문에 일상에 그친 소재를 그저 일기처럼 써 놓은 수필은 읽혀지지 않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이나 철학은 결코 높은 학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인간적 순수성과 미적추구라는 예술가적 가치와 그 에너지를 일컬음이다.

문학적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따뜻한 가슴과 그리고 겸양과 염치다.

수필가 정명숙의 글에는 교양, 겸손, 희망, 사랑, 정이 담뿍 담겨 있다. 그래서 글을 읽고 나면 명치가 뻐근하도록 깊은 울림을 받는다.

수필집『무인도』에 수록된<등 뒤의 사랑>등 작품 전부가 그렇다.

-‘이런 밤이면 동네 개까지 야단들이다. 서로의 의견을 앞세우다 싸움까지 벌어지면 어김없이 경찰차가 온다. 본의 아니게 가려졌던 타인들의 삶의 이면을 창문 너머로 구경하며 여름밤을 그렇게 보냈다.

술에 취한 여인은 말 없는 사내 앞에서 울고 있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잊어. 차라리 못되게 굴지. 그러면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사연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등 돌리는 사람에 대한 절박함은 사랑을 지키는 것보다 단념해야 할 때가 더욱 힘들고 아프다는 것을 그녀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안타깝다. 가슴에 선혈이 맺히도록 뜨거워지다가 석류처럼 갈라지는, 박하 잎을 입에 문 듯 화사하고 구름다리를 걷고 있는 것처럼 울렁거리던 사랑의 끝에는 항상 무심하고 차가운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저 여인은 몰랐단 말인가.‘- <「등 뒤의 사랑」중에서>

 그렇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나팔꽃보다 짧은 생명을 지닌 게 사랑이기도 하다. 그런 사랑의 속성 탓에 이별 앞에 가슴 저미는 슬픔을 감내해야 하는 일은 때론 죽음보다 더 처절하리라. 작가가 살고 있는 동네의 어느 술집 앞에서 이별을 고하는 남녀의 모습을 훔쳐보며, 별리의 슬픔을 함께 가슴 아파 하는 애타심, 이것이 『정명숙 수필집』에 담겨 있는 공통적 주제이다. 한번쯤은 목숨 건 사랑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 있으랴. 가슴 벅차도록 절절했던 사랑도 이별 앞엔 속절없이 무너져 버리는 게 사랑의 속성인지 모르겠다.

‘나는 어둠 속에서 차마 발길 돌리지 못하는 그녀에게 이별은 사랑의 끝이 아니라 사랑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등 뒤의 사랑」 중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어둠 속에 남기고,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여인의 애절한 슬픔이, 평자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듯 아프다.

요즘은 미혼모가 증가 추세란다. 후기 산업사회가 남긴 피해다. 서양의 성 개방 물결이 물밀 듯 밀려오더니 급기야 젊은이들의 혼전 순결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순수한 사랑보다 본능을 앞세우기에 몸 간수가 소홀해졌으리라. 그래서 ‘나사니엘 호손’작 『주홍 글씨』의 원죄는 아담과 이브의 출현 이래로 지속적인 애정사로 존재하나보다.

-‘결혼도 하지 않은 친구가 아이를 낳았다. 유월 초 뻐꾸기 소리가 유난히도 청아하게 들리던 날이었다. 가난했던 남자를 본인의 인생은 접어두고 대학 4년과 군 생활을 마칠 때까지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했었다. 남자는 직장이 생기자 임신 중인 애인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다. 소설과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내 곁에서 일어났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사건이다. 절망 속에서도 혹여나 다시 돌아올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뱃속의 아이를 키워가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안타까웠다.- <「뻐꾸기」 중에서>

순애보 버금가는 사랑 이야기이다. 일회성 사랑이 허다한 현실이기에 더욱 관심 가는 이야기 거리가 되는 것인가.

‘가난했던 남자를 본인의 인생을 접어두고 대학 4년과 군 생활을 마칠 때까지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했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여인의 남자를 향한 사랑의 진정성과 자기희생의 충분한 상황묘사가 되었다. 그토록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매정하게 등을 돌린 남자에 대한 야속함이 독자의 가슴까지 전이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남다른 필력에 힘입어서다.

-‘집안 망신이라며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부모 형제들 때문에 갈 곳이 없던 친구를 집으로 데려왔다. 어머니는 측은지심으로 말없이 거둬 분만과 산후조리까지 도와 주셨다.’- <「뻐꾸기」 중에서>

육체적 순결을 여성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던 50,60대에서 볼 수 있는 부모님들의 완고한 이성관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딸을 둔 가정의 밥상머리 교육이던 순결성 강요가 진부한 타령으로 치부되는 현실이고 보면 더 이상 정조관념이 도덕경일 수 없는 세태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입맛이 씁쓸하다.

미혼모가 된 딸을 집안에 둔다는 사실 자체를 상상하지 못했던 구세대의 윤리관, 그래서 이들의 눈에는 오늘의 젊은이들이 버릇없는 세대로 비칠 만 하다.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돌보는 어머니의 산교육을 받으며 자란 작가 정명숙의 애타심은 작품을 통하여 전파되기에 많은 사람의 귀감으로 빛난다.

-‘넘어야 할 고달픈 현실이 있는 것을 모르고 결혼에 대한 환상만 갖고 새 삶을 시작한 며느리는 아이가 첫돌을 지나자 시부모의 만류에도 아이도 외면한 채 자신의 진로를 과감히 바꿔버렸다.’- <「상전을 모시고」중에서>

어미 없는 손자를 키우는 모습이 안쓰럽다. 두 이성 간의 사랑의 결합이 결혼이라고 하지만, 결혼의 조건엔 가정에 대한 무한 책임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결혼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이 장거리 경주임을 알아야 한다. 인생의 여정은 길기에 험난하고, 험난하기에 역경과 고통이 따르기도 한다. 망망한 대해에서 배의 기관이 멈추면 배가 정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배가 가라앉고 만다는 사실이다. 인생 역경을 해쳐나가려면 둘의 힘이 하나의 힘보다 강한 법이다. 남남으로 만났기에 남남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닌지 모른다. 그러나 남남이 된 이후의 인생은 통계학이 말하듯이 더 비참함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상전을 모시고」는 신혼부부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을 작품이다.

-‘금쪽같은 손자 손녀라서만은 아닌 것 같다. 며느리가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혹여 비위라도 거슬리지 않을까 전전긍긍이다. 고부 갈등은 아예 접어두어야 한다고 한다. 며느리가 늦잠이라도 자는 것 같으면 아이는 등에 업고 가만가만 걸으며 아침밥을 지어야 하고 아들까지 며느리를 위해 받드니 눈꼴이 시어도 따라줄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한다.’- <「상전을 모시고」 중에서>

 우리의 민요「시집살이요」에 ‘고초 당초보다 맵다’는 시집살이 노래가 있다. 보릿고개가 어디에 있는 고개냐고 물어오듯, 시집살이가 무슨 살이냐고 질문을 받을 날도 멀지 않을 듯하다. 며느리 눈치 보며 살얼음판을 걷듯 산다는 시어머니들이 살얼음판 녹이는 전기장판 사러 시장을 찾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아무튼 확실하게 바뀐 것은 여권신장이다. 사회,경제,정치,문화면에서 절대 우위이던 남성 세계에서 여성의 지위가 추월선에 닿는 듯하더니 바야흐로 여성 대통령까지 탄생시키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이제 여성들도 내 앞만 보고 사는 정저지와(井底之蛙)의 소아적 사고에서 벗어나 광야를 품는 대의를 갖자는 뜻에서 해본 말이다.

창작을 할 때면 우리의 문자가 대단히 우수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곤 한다. 모든 작품은 명칭에 따라서 그 의미가 혹은 주제가 달라지기도 한다.

「야한 년」, 제목치곤 너무 야하다. 야하기에 성공한 제목이다.

‘야하다’의 자전적 의미는 ‘천하게 요염하다.’, ‘깊숙하지 못하고 되바라지다.’, 또는 ‘품위가 없어 상스럽다.’이다. 전자는 ‘불릴 야’의 ‘冶하다’이고, 후자는 ‘들 야’의 ‘野하다’이다. ‘冶하다’를 깊은 맛이 없이 해바라지고 천하게 아리땁다. 로 풀이하면 ‘야하게 생긴 얼굴’ 이라 작문할 수 있다. ‘野하다’는 품격이 없이 천하고 상스럽다. 뜻이라 ‘빛깔이 야한 옷을 입었다.’ 로 작문이 된다.

제목「야한 년」은「野한 년」아닌「冶한 년」으로 정해진 것 같다.

‘冶하다’를 더 구체적으로 (여자의 차림이 조화와 균형이 잡히지 않으면서도 보는 이의)성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힘이 있다. (태도나 모양이)무질서 하고 거칠고 조잡하나 감각을 자극하는 힘이 있다. 로 이해하면 된다.

이렇듯 우리 언어는 다양한 활용성을 갖고 있기에 산문(散文) 읽기가 지루하지 않고, 운문(韻文)의 리듬에 매료되곤 한다.

여하튼 ‘야한 년’ 이라는 제목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력 만점인 마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문학행사 때였다. 사회를 마치고 내려오는 내게 선배가 눈을 흘기며 하는 말이 “어휴! 야한 년.”이란다. 느닷없는 욕을 듣고 겉으로는 웃고 있었으나 마음속은 불편하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름대로 품위 있게 살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야한 년’이라니 혼란스럽고 선배가 야속하기만 했었다. 헌데 속이 타는 나와는 달리 그는 얄밉게도 별일 아니란 듯이 웃기만 했다.’- <「야한 년」중에서>

문학행사의 장에서 사회를 볼 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선배가 농담 삼아 건넨 말이련만 작가 특유의 예민한 감성이고 보면 얼굴이 달아올랐으리라. 그때 들은 ‘야한 년’이란 선배의 농을 마음의 거울에 비춰볼 수 있는 묘사적 장면은 수필문학에서나 가능한 일이며 역량 있는 작가만이 해낼 수 있는 표현이다.

-‘야개화’를 일명 ‘야한 연’이라 한단다. 다른 연꽃이나 수련은 아침에 피어나 고운 자태를 마음껏 뽐낸 후, 저녁이면 꽃잎을 여미고 잠을 자지만, 야한 연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꺾고 싶은 충동을 잠재우려 함인지 모두 잠든 후 홀로 피어 조용히 밤을 지새우고, 고우면서도 투명한 꽃잎을 아침이면 다소곳이 여민다. 꽃잎이 큰 연꽃이 남성적이라면 잠을 자는 연꽃이라는 뜻을 지닌 수련은 꽃이 작아 여성적이며 섬세하면서도 색이 곱다. 한 송이의 꽃에 주어진 나흘의 삶이 끝나면 꽃대와 꽃을 물속으로 주저앉혀 조용히 생을 마감시킨다. 삶과 죽음이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다.- <「야한 년」 중에서>

진흙탕 속에서도 때 묻지 않은 꽃을 피우는 연꽃을 ‘야개화’라 부르고, 더하여 ‘야한 연’이라고 하듯이, 천하고 요염한 여인의 자태를 두고 ‘야한 년’이란 수식어를 붙여 순수하고 깨끗한 ‘야개화’로 격상 시킨 표현은 참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나흘간의 시한으로 태어난 연꽃의 생명이건만 ‘삶과 죽음이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다.’ 라는 시적 표현에서 우리는 수련의 순결함과 고고함을 손으로 만져 보는듯한 느낌을 갖는다. 언어경지를 잘 아는 절제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야개화가 어떠한 꽃인지를 몰랐을 때, 선배가 좋은 뜻으로 내게 ‘야한연’이라 불러줬지만 나는 욕으로 알아듣고 내심 불쾌했었다. 그렇게 속 좁은 여인네지만 진정 닮고 싶다. 야한 연의 아름다움과 겸손함을, 그리고 절대적인 고독과 추하지 않은 죽음의 과정까지도.‘-<「야한 년」 중에서>

흙탕물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이지만 그 고결함이란 탁류에 뿌리내린 꽃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순결하다.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도 가슴에 튼튼한 고갱이가 놓여있으면 결코 흔들림이 없다. 고독은 때론 자기정화의 시간을 안겨준다. 시류에 휘둘리지 않는 소신 있는 삶, 그리고 강직한 선비 정신, 어쩌면 정명숙은 그것들을 삶의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야한 연의 아름다움과 겸손함을, 그리고 절대적인 고독과 추하지 않은 죽음의 과정까지도.’ 이것이 작가 정명숙의 사상이고 철학이다.

-‘옆집 할머니가 젊은 아낙에게 새벽부터 어딜 다녀오느냐고 묻는 소리가 들린다.

“남편한테 맞아서 병원에 갔다 와요” 한다.

마치 남편과 즐거운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행복한 아내의 목소리처럼 맑게 통 통 튄다. 내가 늦잠자면서 잘못들은 건가 싶기도 하고 호기심도 생

겨 창문에 기대서서 내려다봤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일상을 얘기하듯 한다. 부부로 살면서 싸우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사소한 일로 배우자에게 욕을 한마디 들어도 그 때문에 받은 마음의 상처가 가라앉았다가 새록새록 생각이 나서 울화가 치미는 것이 보통여자들인데 맞고 살아도 행복한 것처럼 말하는 그녀의 남편이 궁금해진다.’ <「서글픈 덩어리」중에서>

가정폭력은 부부의 사랑에 더하여 가족을 파괴 시킨다. 남성 위주의 봉건사회가 빚은 비뚤어진 폐습이 언제나 가실까. ‘북어와 여자는 사흘이 멀다고 두들겨 패야 한다.’ 는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 지금도 가정에서 남편의 폭력이 행해지고 있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다.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고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매 맞아 입은 상처를 치료하고 돌아오는 길이건만 미소로 이웃을 맞는 그녀, 도대체 그녀의 남편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인사인지 궁금해진다는 상황묘사가 너무나 생생하여 가슴이 찡해온다.

-‘삶의 정점을 코앞에 두고 보니 원수가 따로 없더란다. 술 마시고 주사를 부리는 것은 예사이고, 제 식구들 보다는 남을 더욱 살뜰하게 보살피면서도 돈 벌어다 주는 유세 하나로 집안 호랑이로 군림하는 남편은 부지기수였고 아예 생활비도 주지 않는 남편 때문에 자식들과 말로 다하지 못할 고생을 한 사람도 있었다. 젊었을 적엔 다정했던 부부도 남편이 늙어가면서 쪼잔 해지니 미워진다고 하는데, 으르렁대는 남편과 살던 여자들은 오죽하랴. 어느 때는 밥 먹는 것도 눈에 거슬려 식사도 따로 하고, 아예 각방을 사용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남편들은 본인들이 행한 일은 생각지 못하고 외롭고 서글프다고 아우성이란다.’ <「서글픈 덩어리」중에서>

특히 중년 부부 중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지내는 경우가 많단다. 젊어서 고생시킨 남편에 대한 저주심이 보복이란 극단적 행동을 유발시킨 듯하다. ‘늙어선 등 긁어 줄 아내가 필요하다.’ 는 말이 있다. 이젠 옛 말이 된 듯 무색하게만 들린다. 황혼이혼 이란 말이 낯설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바다로 갈 땐 한 번 기도 하고, 결혼식장에 갈 땐 세 번 기도하라.’ 는 말이 있다. 망망대해에서 고기 잡는 이상으로 결혼 생활이 어렵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에게 내린 조물주의 숙제이다. 부부라는 공동체는 이를 보충하고 발전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고위 장교로 서울 근교부대의 책임자로 근무하실 때 나는 고모님 댁에서 생활하며 잠깐이지만 직장을 다닌 적이 있었는데 내외분이 친자식처럼 돌봐주셨다. 결혼하게 되자 고모부께서 내 남편에게 처음으로 한 부탁이 마음 여린 나에게 마음의 상처는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그리 쉽던가.’- <「무인도」중에서>

불같은 사랑이라 할지라도 세상사에 부대끼며 사노라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고 만다. 결혼은 꿈이 아니기에 차가운 마음으로 현실과 접목 시켜야 한다. 동전이 하나의 몸체이나 앞과 뒤가 서로 다르듯 부부의 관계는 그렇게 한 몸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몸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부부의 관계란 무한대의 수치로 미덕을 요구할 때가 허다하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그리 쉽던가.’ 서릿발처럼 차가운 작가의 이 한마디의 독백을 곰씹어보자.

-‘묘지 앞에서 가을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한그루 과목처럼 서서 익지 못한 내 영혼을 생각한다. 나는 오늘 고모부와 이별하면서 참으로 서럽게 울었다. 나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셨어도 깊은 상처로 인해 길 잃은 철새처럼 오소소 날개를 접고 떨어야 했던 막막한 시간들. 부서진 낙엽처럼 헤매며 절망을 서러운 기다림과 인내로 버티어 내던 많은 날이 있었다. 그러나 인생의 힘든 고비를 넘길 때마다 내게 일어설 수 있게 용기를 주셨던 그분의 인생 사계 중, 늦가을과 겨울은 아무런 꿈도 없이 의지가 꺾인 채 고뇌와 끝없는 방황뿐이었던 것을 안다.’ <「무인도」중에서>

고모부의 죽음을 맞으며 생전에 그분의 삶의 모습을 짙게 반추해 보는 대목이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슬픔이 밀려왔다. 창작 소설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다. 그러나 왠지 그 슬픔 속에 향내가 물씬 묻어났다. 작가의 감성이 한껏 배어 있기 때문이다.

-‘첫아이가 돌이나 지났을까. 겨울이었다. 아이가 몹시 아팠다. 아픈 아이를 등에 업고 아버님의 심부름으로 동서 집엘 갔었다. 셋째 동서는 수곡동 도로가에서 철물가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서는 나에게 동서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손에 쥐여 준다.

“형님, 병원부터 들렀다 가세요. 아기가 열이 많이 나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손아랫동서가 주는 돈을 받기가 부끄러웠다. 주저하는 내게 아무 생각하지 마시고 얼른 병원부터 가라며 재촉한다. 왜 그렇게 서러웠을까. 눈물이 쏟아졌다. 그즈음 남편은 몸이 아파 직업이 없었다. 시댁에 얹혀살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 처지가 그러하니 아이가 아파도 병원조차 제대로 가지 못할 것이라 짐작했으리라.’- <「조박사」중에서>

셋째 동서가 지난날 베푼 사소한 정에도 이토록 감명 깊었다. 셋째 동서가 조 박사란다. 요즘은 시댁에서 시부모 모시는 어려움보다 동서끼리의 갈등이 더 문제가 된단다. 그래서 작가의 동서에 대한 사랑이 더욱 빛이 난다.

감동에는 예민하나 감성에는 둔한 것이 현대인 인지 모른다. 감동은 감수성의 지배를 받는다. 감동은 수동적이고, 감성은 능동적이다. 감성이 둔하니 선과 악의 판별력이 약해진다고나 할까. 세상이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하여 독자에게 감성을 자극한다. 풍부한 감성을 길러 경거망동의 행동을 자제케 한다.

정명숙의 수필집『무인도』엔 이 역할을 말없이 하고 있는 작가의 탁월한 필력이 충분히 내포돼 있다.

약력: 한국문인협회, 청주문인협회 회원 하정문학회 회장

아시아 작가상 수필부문대상 수상, 제11회 청주문학상 수상, 청주예총 예술 공로상 수상

현 독서신문, 충청타임즈 고정필진, 청주 시 1인1책 강사 엮임

저서: 수필집 『내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