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무업숙진존자(无業宿盡尊者)
당대(唐代)의 저명하고 덕망 높은 선승이었으며 법호(法號)는 무업(无業)이라 하였다.
상락(上洛)인이며 속성은 두(杜)가이다. 어렸을 때 출가하여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났으며 아주 빨리 화엄, 법화 등 여러 경전을 읽었고 13세에는 중생들에게 경을 설법하여 세상에서 신동이라 불리었다.
무업은 성년이 된 후 ‘해내(海內)’라고 영예롭게 불리었는데 존자는 명예를 때 묻은 것으로 보았으며 먼 곳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만 불도를 추구하여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는 멀리 강을 건너 강남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명승 현소(玄素)를 찾아가 법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운 후에 장안(長安)을 방문하였다. 장안의 많은 스님들은 그 이름을 우러러 받들어서 그를 ‘양가대덕(兩街大德)’승관(僧官)으로 추천하려고 하였는데 무업은 이 일을 듣고 장안을 떠나 북으로 가서 상당(上党)에 이르렀다.
상당절도사 이포진(李抱眞)은 불교의 예의로 그를 대접하였으며 불법을 듣고 마음으로 존경하여 그에게 청하여 이곳의 교무(敎務)를 맡아 줄 것을 부탁할 생각이었으나, 무업은 다시 상당을 떠나 분주(汾洲) 개원사(開元寺)에 거처하였다. 당선종은 일찍이 그를 두 번이나 요청했는데 그는 모두 거절했다.
장경(長慶) 원년(821) 당선종이 예물을 준비하고 초빙하여 사자를 보내자 무업은 더 거절할 수 없음을 알고 세상을 떠날 결정을 한 후 정토(淨土)로 솟아오르며 사자에게 웃으며 이르기를 “됐다 됐어!”라고 하였다. 그날 밤 단정히 앉아서 돌아가셨다.
목종(穆宗)은 무업이 입적(入寂)한 것을 알고 애석함을 금치 못하여 시호를 ‘대달선사(大達禪師)’라고 하였다.
62. 마하찰리존자(摩河刹利尊者)
경찰리현자(經刹利賢者)라고 한다.
『불설무량청정평등각경(佛說无量淸淨平等覺經) 권1의 기록에 의하면 불타석가모니께서는 사위국 왕사성에서 설법을 하실 때 이 존자는 일찍이 참석하여 공손히 들었다. 마하찰리존자께서는 불법에 귀의하고 집에서 꾸준히 도를 닦아 후에 드디어 대아라한이 되었다.
63. 무량본행존자(无量本行尊者)
이 존자는 아미타불의 전세신(前世身)이며 아미타불은 또 무량수불(无量壽佛)이라고 하였다.
보살이 도를 닦아 스스로 부처님이 되는 방법을 본행(本行)이라고 하였다.
불경『무량수경』에 의하면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의 생시에 한 국왕이 불법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국왕의 자리에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는데 법호를 법장(法藏)이라 하였다. 세자재왕불에게 맹세하여 말하기를 “나는 세상에 불법을 널리 선전하고 성심으로 도를 닦아 무상정과(无上正果)를 얻으며 내가 부처가 된 후 고난에 처한 중생들을 구원해 주겠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세자재왕불은 깊은 불교의 교리를 널리 설법하였고, 법장은 듣고 크게 깨달아 부처님 앞에서 48가지 원을 세웠다. 실현된 후 즉시 부처님이 되었다.
소원 중에서 18번째는 만약 부처의 과위를 이루면 세계 시방중생들이 모두 진정한 즐거움을 얻게 하며 출생하여 나의 불국(佛國)에 오기가 쉬우니 다섯 가지 역죄(逆罪)를 범한 사람과 불법을 비방한 사람 외에는 모두 나의 불국에 와서 즐거움을 누리게 하였다.
법장의 서원은 천지를 감동시켰고 천공에서 그를 위하여 무수한 꽃송이가 떨어졌다,. 무수한 윤회를 거듭하였고 법장의 서원이 완성되어 멀리 서방에서 부처님이 되었으며 그 이름을 무량수불이라 하였다.
64. 일념해공존자(一念解空尊者)
송대 고승인 해공존자이다.
해공존자의 이름이 훌륭하여 출가후 차계택경선사(車溪擇卿禪師)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후에 호주(湖洲)에서 혜각법사를 만나 가난 속에서도 열심히 글을 읽어 ‘세상의 문자언어가 모두 껍데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송(宋)나라 고종 8년에 호덕장원(湖德藏院)을 지냈고 효종건도(孝宗乾道) 7년 가을에 요청에 응하여 선천태사(禪天台寺)로 옮겼는데 9월9일에 절로 들어가 법좌(法座)를 가리켜 이르기를 “가슴속의 한치의 재는 이미 차가워지고 머리 위의 천 가닥 눈은 아직 녹지 않았다. 노보(老步)로 평지를 가는 것이 적합하니 무슨 일인들 또 좋고 높이 올라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청중들은 누구나 기꺼이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89세에 연경조정(延慶祖庭)으로 이사를 갔으나 두해를 못 넘기고 호죽암(湖竹菴)으로 돌아와 입적하였는데 세수 91세였다.
스님이 된지는 78년이었다. 분화(焚化)하는 날 바람도 없고 비도 내리지 않았으며 연기가 나는 곳은 모두 사리(舍利)였으며 사람들은 덕장원(德藏院)에 탑을 세워 모셨다.
해공존자는 배우기를 즐기고 깊이 생각하였으며 저작으로는 『능엄보주』4권,『금강통론사원(金剛通論事苑)』』 2권, 『원각수감(圓覺手鑒)』 1권, 『란분보주(蘭盆褓注)』 1권, 『산가의원(山家意苑)』 2권 등이 있었다. 일생동안 선시(禪時)를 많이 지었으며 『중론(中論)』을 송영하기를 “『중론』인연이 법을 낳고 한 구절의 말이면 더할 말이 없다. 내가 이르노니 곧 공가중(空假中)이며 주렴(珠簾)은 서산의 비를 휩쓸어 모은다.”고 하였다.
65. 관신무상존자(觀身无常尊者)
존자는 관음보살의 변화신(變化身)이다.
관세음 대자비는 보현색신삼매(普賢色身三昧)에 들어가 33가지의 변화신으로 나타나며 중생들이 고난에 처하였을 때 그 이름을 외우면 즉시 그에 상응하는 화신이 나타나서 구해준다.
그 33가지의 몸은 불신, 벽지불신, 성문신, 범왕신, 제석신, 자재천신, 대자재천신, 천대장군신, 비사문신, 소왕신, 장자신, 거사신, 재관신, 파라문신, 비구신, 비구니신, 우파니신, 우파색신, 장자부녀신, 거사부녀신, 재관부녀신, 파라문부녀신, 동남신, 동녀신, 천신, 용신, 야차신, 건달파신, 아수라신, 가루라신, 긴나라신, 마후라가신, 집금강신신이다.
66. 천겁비원존자(千劫悲愿尊者)
덕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겁(劫)’은 아주 오랜 기간을 나타낸다.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권하에서 이르기를 “예를 들어 1리 2리에서 10리에 이르는 돌이 있는데 아주 가벼운 천의(天衣)로 삼년에 한번 씩 스쳐서 이 돌이 다 닳는 시간을 소겁(小劫)이라 하며, 또 80리의 돌을 범천의 가벼운 옷으로 삼년에 한번 씩 스쳐서 이 돌이 다 닳는 시간을 중겁(中劫)이라 하고, 800리 돌을 정거천의 가벼운 옷으로 삼년에 한번 씩 스쳐서 이 돌이 다 닳는 시간을 대아승지겁(大阿僧祗劫)이다.”라고 했다. 비원(悲愿)은 불보살이 대자비로 서원을 맹세한 것을 가리킨다.
『유식론(唯識論)』 4권에서 이르기를 “비원은 선심과 상응한다.”고 하였다. 불교에서 사람들이 생사의 바다에서 뗏목을 띄우는 것을 ‘비원선((悲愿船)이라고 불렀다.
천겁비원존자는 오래전부터 무상등정각으로 중생들을 동정하여 크게 맹세하기를 천겁지중에 세상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배로 중생들을 싣고 고난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게 하겠다고 했다.
67. 구라나함존자(瞿羅那含尊者)
존자의 이름은 구사라(瞿師羅), 구사라(瞿私羅),구사라(瞿史羅)이며 그 뜻은 아름다운 소리이다.
고인도의 교상미국인다. 존자는 과거에 일찍이 한번 태어나서 작은 개가 되었는데 개 짖는 소리에 주인이 비지불에게 음식을 내주었다. 이렇게 선한보답으로 다시 태어날 때마다 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
구사라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서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자기 집을 석가세존께 바치고 이 원림을 구사라장자원이라 불렀다.
이 원림 중에 정자를 지어 석가세존 및 그 제자들이 거주하게 함으로 삼보(三寶)로 하여금 안착하고 경동하지 않게 하였다.
고찰한 바에 의하면 이 원림 지역은 지금 인도의 주목나(朱木那 )강변의 가상촌이라 한다.
68. 해공정공존자(解空定空尊者)
길장(吉藏) 『백론소(百論疏)』에 구마라십어(鳩摩羅什語)로 기록하기를 “진인해공의 제일은 승조(僧肇)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승조의성은 장(張)가이고 경조(京兆:지금의 서안)인이며 구마라선문 중의 사철지인(四哲之人)이다. 원래 노장을 숭배하고 믿었는데 『노자』를 읽은 후 감탄하여 말하기를 “노자의 물맛은 은근하고 그 진리는 구수한 것이다.”라고 하고 후에 『유마힐경(維摩詰經)』을 읽고 깨달아 기뻐하면서 그로부터 출가하였다.
구마라선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고장(고장: 지금의 무위)에 도착하였다, 구마라선은 장안에 도착하였고 승조 역시 명을 받고 원림에서 번역에 참여하였으며 경론을 평정하였다.
저작으로는 『반야무지론(般若无知論)』,『불진공론(佛眞空論)』,『물부천론(物不遷論)』,『열반무명론(涅槃无名論)』 등이 있다.
후진홍시(后秦弘始) 16년(진안제의희 10년)에 입적하였는데 나이 31세였다.『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27의 기재에 의하면 승조가 후에 진나라 주요홍에게 살해되었는데 형벌을 받기 직전에 이르기에 “사대원(四大元)주인이 없으니 오음(五陰)이 본래 텅비었다. 머리에 칼날을 대었으나 마치 춘풍을 자르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69. 성취인연존자(成就因緣尊者)
불가에서는 착한 일을 한사람은 착한 보응을 받는다고 하여 성취인연이라고 하였다.
『정법화경(正法華經)』 권4에는 초도인연여래(超度因緣如來) 부처님이 전생에서는 원래 왕태자였다. 불전의 기록에 의하면 과거에 16개국의 왕태자가 모두 총명하고 지혜로왔는데 국왕이 모두 불교를 믿어 여러 태자들도 착한 일을 많이 하였으며 무수한 스님들을 부양하고 세속의 중생들에게 끝없는 착한 업을 쌓았다.
후에 그들은 함께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으며 무상정과(无上正果)를 추구하여 부처님을 만나 불교의 깊고 오묘한 도리를 해석하여 석존의 끝없는 지혜로 해탈의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을 희망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법안으로 그들의 성실함과 지혜로움을 보고 그들을 위하여 불법을 설법해 주었다. 여러 태자들은 설법을 다 들은 후 마음속으로부터 기뻐하면서 계속하여 조용한 곳에서 정사한정(精思閑定)하여 끝내 해탈을 얻어 보살의 과위를 이루었다.
후에 16태자는 모두 불위를 얻고 각각 세계 8방에 살았는데 그중 초도인연여래는 서방에 거주하면서 중생들에게 법을 전수하여 세상사람 들을 구하였으며 모두 착한 인연이 되었다. 초도인연여래는 성취인연존자가 되었다.
70. 견통정진존자 (堅通精進尊者)
덕행 하여 이름을 떨쳤다. 견고하다는 것은 나무뿌리도 뽑히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며 통(通)한다는 것은 방해함이 없이 자유자재하다는 것을 말한다. 정진(精進)은 근면하고 용맹하게 도를 닦아 악을 마음에서 끊어버리는 작용을 말한다.
『유식론(唯識論)』 권6에서 이르기를 “근면한 것을 정진이라 하며 선악에 대해 수양하여 용맹함을 성품으로 하고 태만함을 다스려 선한 일을 업으로 한다.“고 하였다.
『보행(輔行)』 권2에서 또한 이르기를 “법에 있어 정교하고 정갈함을 정이라하고 생각을 깊이 탐구하는 것을 진이라 한다.“고 하였다. 견통정진존자는 불법에 대해 견정불이한 신앙을 가지고 간고한 고행을 하면서 신행을 행하고 악한 것을 제거하여 끝내 정과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