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민족형성사에 대한 역사해석상 고찰
― 히브리 역사가들의 역사이해를 중심으로 ―
김이곤
서 론
"역사(歷史)는 기독교신학을 조명해 주는 가장 포괄적인 지평이다. 모든 신학적 질문과 대답은 이른바 하나님이 인간과 공유하고 또 인간을 통하여 그의 전 창조물과 공유하고 있는 "역사"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그 의미를 가진다"라고 한 판넨버그(W. Pannenberg)의 말은 오늘날의 대부분의 해석학적 이론들이 대부분 역사 중심적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지적해 주고 있는 말이라 하겠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형성사에 대한 히브리사가들의 역사해석은, 그 집요한 역사적 자각과 반성이 보여주고 있듯이, 역사가 곧 "히브리" 신앙을 이해하는 주요한 통로임을 증언해 준다 하겠다. 로빈손(W. Robinson)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즉 "역사는 이스라엘 종교의 성만찬이라고 불리울 수 있다. 이스라엘은 그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고 보이지 않는 그를 보는 것처럼 경험했다. … 그 역사의 세부적 사실들은 … 하나님과 접촉되는 순간 언제나 그 분의 은혜와 상징의 도구로 변형되었던, 이른바,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들이었다"라고 한 그의 말은 "역사가 곧 야훼의 계시영역"이라는 것을 증언해 준다 하겠다. 비록 제임스·바(James Barr) 교수가 계시의 매개로서의 역사 관념에 저항하여, 아예 성서는 역사에 상응하는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고 볼 뿐만 아니라 성서의 "설화"들이란 이미 역사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확신까지 피력한 바 있지만 그의 견해는 라이트(G. E. Wright)가 비평한 바와 같이 구약설화들이 갖고 있는 그 규명키 힘든 긴 전승사를 이해해 보려고 하는 현대 성서학의 학문적 이유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하겠으며, 특히 문제된 자료들 자체에 대한 논구보다는 오히려 타인을 향한 항거와 도전에만 지나치게 관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비록 제임스·바가 Historie와 Geschichte의 구별을 지나친 인위적 구분이라고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역사개념이란 지나간 사건들을 확인하는 성격의 역사 개념은 이미 넘어간다 하겠다. 사실, 역사는 사건들만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서 새 의미를 발굴해 내는 해석이 동반될 때 비로소 참 역사가 된다. 그러므로 노르트(C. R. North)가, 순수하게 적나라한 사건은 하나의 추상이라는 전제 위에서 "역사는 단순히 물리적 사건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관념들과 결합된 사건들"에 의해서 형성된다. … 그 관념들이란 비록 발전과정을 거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그로 인하여 비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 시내산 사건에 대한 P의 기술은 거의 순수한 하나의 픽션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순수한 비진리라고는 쉽게 말할 수 없다"라고 했을 때 그의 논리는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진실로, 우리가 "역사"(Geschichte)라고 할 때는 그것은 이미 그 전후관계를 살핀 사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며, 그 해석이 곧 역사의 새로운 "사실"(fact)이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해석의 의의와 그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는 매우 중요한 한 예는 구약성서이다. 사실 구약성서는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정확한 객관적 보도보다는 그 사건의 의미를 논구하여 해석하는데 전적으로 관심하고 있었다. 분명히, 역사가는 ― 그가 성서역사가이건 세속 역사가이건 간에 ― 연대기 기록자이거나 고물 수집가 이상이며 그의 책임은 전혀 역사해석에 있다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히브리 사가들의 관점은 더욱 두드러지게 돋보인다. 예컨대 더 할 나위없는 문학적 종교적 천재인 야비스트(Yahwist)가 옛 전승들을 늘리고 확장시킴으로써 ― Von Rad에 의하면, 시내산 전승을 삽입하고 족장사를 발전시켜서 그리고 거기에 원역사를 전 이스라엘사 전면에 덧붙임으로써 ― 약속과 성취로 연결되는 야훼의 거대한 구원사상을 구축한 것이나 또는 사사기나 열왕기에서 특히 신명기적 역사가(dtr)가 그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결코 객관적으로 보도하려 하지 않고 전혀 그이 자신의 고유한 역사 신학적 사고에 의하여 그 전체를 도식화하였던 점, 즉 사사시대의 역사를 "배신-징계-회개-해방"이라는 틀(schematic pattern)안에서 기술함으로써 일종 "역사의 순환개념에 근거한"(Based on a cyclic conception of history) 도식주의를 제시하였다는 점이나, 또는 이스라엘 남북왕조사 전체를 결코 정치사적 측면에서나 객관적 역사보도에 관한 관심에서 기술하지 않고 전혀 "반복적 서두문과 결문으로 구성된 도식적 뼈대"속에 그 전역사를 조립해 넣음으로써 이스라엘 왕조사를 자신의 특수한 역사신학적 관점에 의하여 즉 이스라엘 왕조사는 전혀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간 범죄의 역사였다는 역사관점에 의하여 반성, 비판하려고 하였던 점, 그리고 이러한 신명기적 역사가의 사료를 기본 자료로 하되 그것을 삭제, 첨가, 편수, 변경함으로써 ― 비록,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기술은 그 작품의 내적 통일성에 도달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야훼의 개개 행적들을 다수로 분열시키는 위험을 초래케 하였다 하더라도 ― 다윗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포로기 말까지에 이르는 역사를 다시 서술하되 다윗 왕조에 대한 노스턀쟈적 희망을 갖고서 다윗이 창건한 사제전통(다윗이 그 기초를 마련했던 성전과 성전 제의, 그리고 레위인의 선택)을 합법화하려 했던 역대기 역사가의 역사변조 등은 히브리사가들에 의하여 진행된 역사해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이리하여 히브리 역사가들은 그들의 신학적 관심의 중심이 되어 있는 문제들이나 역사 해석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에만 전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현대 역사가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에만 전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현대 역사가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은 허둥지둥 간략히 끝내 버리거나 무시해 버리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예컨대, 왕상 16 : 15-28에 나타나고 있는 오므리(Omri) 왕에 대한 신명기 사가의 기술은 이 성구(왕상 16 : 15-28)와 그리고 Mesha의 비문이나 앗수르 왕의 연대기 등을 통하여 현대 사가들이 기대했던 바, 오므리의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업적에 관한 보도는 거의 도외시하고(!!) 단지 그도 역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I가 시작한, 이른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제의정책을 따라갔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중요시하였다는 점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사가들의 책임은 과거의 사건들을 순서에 따라 재건하는 것으로 끝나거나 역사의 인과관계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단순한 연대기 기자이거나 고대사료의 수집가이거나 과거의 사료들을 단순히 설명해 주는 자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수집한 역사설화들 및 사료들을 해석의 과정을 통하여 편집한 역사해석가들이었으며 그 해석의 원리는 어디까지나 "야훼 신앙"이었다. 즉, 이들 히브리 사가들은 역사를 편수함에 있어서 반드신 인간 역사에 대한 야훼의 간섭을 전제했고 인간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야훼의 행동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인식이란 "신앙의 눈"(Eyes of Faith)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고란 결코 이스라엘 특유의 것은 아니다. 즉 이러한 역사신학을 보여주는 고대 중동문학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메사(Mesha)의 비문도 또한 "이스라엘 왕 오므리가 수년간 모압의 오만을 꺾었다. 왜냐하면 그모스(Chemosh)가 그의 땅에 대하여 분노하였기 때문이다"라는 일종 모압왕의 역사신앙을 전해주고 있다. 니버(R. Niebuhr)도 "원시 토테미즘의 시대로부터 대제국의 종교시대에 이르는 역사속에는 족속, 국가, 또는 제국의 운명에 작용하고 있는, 이른바, 모든 인간 의지보다 우수한 한 세력이 있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신이 모든 사건들의 발기자(Initiator)이다는 관념은 특유한 성서 전유의 관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즉 역사를 통한 신계시 관념은 "지역적인 것이거나 또는 어떤 지역 또는 어떤 종족의 특유한 표현법(idiosyncracy)은 아니라" 하겠다. 그러나, 구약성서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야훼의 역사계시의 특성은 결코 평형과 안정을 보장해 주는 섭리의 방식(the way of the providence)을 취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나타내 보여 주는 계시의 수레로 삼으시기 위하여 그 "역사적 사건들에 야훼께서 친히 자기 자신을 결속시킨다"는 점에 있다. 말하자면 야훼 자신이 역사속에 들어오시는 것이며 그의 역사개입은 어디까지나 야훼 편의 행동이고 그리고 히브리 역사가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역사해석으로써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야훼의 역사행동에는 늘 야훼의 계시사건이 선행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교의 신들과는 달리 현상유지(status quo)를 유지해 주는 그런 신은 아니었다. 브라이트(J. Bright)가 지시해 주었듯이, "고대의 이교들은 '한 목표를 향한 신의 역사인도'라는 어떠한 의식도 결핍하고 있었다!" 반면에 야훼는 한 명백한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시간 속에 두신, 이른바 자연의 순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살아계시는 신, 즉 역사의 하나님이셨다. "실로, 야훼의 능력은 반복되는 자연의 사건과 결합되지 않고 반복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과 결합되었다." 이와 같이 야훼의 계시가 역사적 사건들 속에 현재하고 있다는 것을 "신앙의 눈"을 통하여 파악하고 그것을 신앙고백의 양식으로 해석했던 히브리인들은 이 역사를 쉽게 탕진해 버릴 수가 없었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제의속에 채용함으로써 야훼의 역사적 계시사건들을 모든 시대속에서 설화로써 재현하고 현재화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에 관한 서사시적 전승이란 어디까지나 제의적 신앙고백의 발전적 유형이라 하겠으며 이 사실을 본격적으로 규명해 간 폰·라트(Von Rad)의 역사해석 방법론은 이스라엘 역사신학 이해에 큰 공헌을 남겨 놓았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이와 같이, 역사의 객관적 서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의 역사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있으며 이러한 역사신학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형성의 추진력을 고찰하려는 데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에 나타난 히브리 사간들의 정경적 구원사상, 특히 이스라엘 형성사에 대한 역사해석상(歷史解釋像)도 이러한 각도에서 고찰되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 정경적 구원사상 1) 구원사적 역사상 이스라엘이 경험한 바, 역사적 경험들은 결코 객관적 역사보도로써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설화의 형식을 빌려서 전승되었다(!) 그리고 그 전수는 설화의 재현(Nacherz hlung)이라는 양식을 취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역사적 경험들은 어디까지나 신앙의 눈을 통하여 파악되고 신앙고백의 양식을 통하여 제의에서(cf. 신 26 : 1, 수 24 : 1) 낭송 재현되었다. 이러한 제의적 과정속에서, 이스라엘 민족형성사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주제들(출애굽, 땅 정착, 족장유랑이라는 주제들) 주위에 독립적으로 유포되어 있었던 여러 역사설화들은 또한 유기적으로 증대되고 확장되어 거대한 하나의 역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 구성성격은 예리한 분석적 관찰을 통하지 않더라도, 야훼 하나님을 그 모든 역사적 사건의 주격으로 서술하는 경전적 구원사상이라는 명백한 성격을 띠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신앙에 의하여 구상된 이러한 구원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역사서를 우리는 논의의 여지없이 육경과 신명기적 역사가의 역사서(특히 사사기와 열왕기)를 통하여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역사상의 발견이란, 비록 철저한 객관적 역사비평학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신앙의 역사적 반성이 만들어낸 신앙고백적 역사상에 관한 신학적 추구를 통하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적 성격을 간과한 19C 역사주의는 일종 "신학적 충동의 약화"(the theological impulse grows weaker and weaker)를 가져왔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꼭 전제해 두어야 할 점들은 첫째로는 비록 신앙고백적 역사상이라 할지라도 ― 역사비평적 연구가들이 제시한 상(像)과 어긋나는 곳이라 할지라도 ― 그것은 전혀 실제적인 역사에 근거를 둔 것이지 결코 날조된 것은 아니라는 것과 둘째로는 비록 이러한 역사상(歷史像)이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신앙이 곧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적 진술들의 대상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의 모체요, 그것의 입이라는 것, 그리고 세째로는 비록 이러한 신앙고백적 역사상이 도식적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야훼의 모든 역사계시를 규정하는 고정적 중심 개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역사전승들의 부단한 첨삭, 개작, 새로운 해석부여를 통하여 강한 내적 통일성을 추구해 간 그 오랜 전승과정의 결과라고 하는 점 등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우리가 이스라엘 민족형성사를 구성하고 있는 역사전승의 핵과 그 핵 속에 담겨 있는 역사신학의 특성 그리고 그 핵을 발전 확대시킨 편집자의 역사신학이 명료하게 전개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전승의 핵은 간략하게 요약된 신앙고백적 구원사 서술들 속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신명기 26 : 5-9 (6 : 20-24) (A)의 작은 역사신조(short historical creed)를 비롯하여 여호수아 24 : 2b-13(B), 신명기학파에게로 돌릴 수 있는 시편 78편(C), 포로기 이후로 돌릴 수 있는 시편 105편(D)과 136편(E), 그리고 느헤미야 9장 6절 이하(F) 등에서 서술되어 있다. 이들의 서술들이 담고 있는 민족형성사에 관한 역사전승의 신앙고백적 주제들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A : ----, (족장), 출애굽, ----, ----, 땅수여 B : ----, 족 장, 출애굽, ----, 광 야, 땅수여 C : ----, 족 장, 출애굽, ----, 광 야, 땅수여(王政史까지 계속) D : ----, 족 장, 출애굽, ----, 광 야, 땅수여 E : 창 조, ----, 출애굽, ----, 광 야, 땅수여 F : 창 조, 족 장, 출애굽, 시 내, 광 야, 땅수여(사사시대 … 포로기까지)
위의 도해와 그 해당 텍스트들이 말해 주는 바에 의하면 가장 고대의 형태로부터 가장 후대의 형태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 민족형성사에 관한 역사서술들이 포괄하고 있는 역사상은 "창조-족장에게 준 약속-출애굽 구원-시내산 계약-광야 인도-땅 수여"로 연결되는 도식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 역사 서술의 성격은 신앙고백적 개요(confessional summaries)이고 그리고 그 가장 핵심적 주제는 출애굽 전승과 땅 정착 전승이며 그 주제들의 연결은 약속과 성취로 이어지는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컨대 가장 고대의 형태(A)와 관련해서 볼 때 각 족장들의 소명기사 속에 나타나는 약속 주제(창 12 : 1-3, 26 : 1f, 28 : 13f), 출애굽 기사, 그리고 약속성취 선언(수 21 : 43, 45) 등으로 연결되는 육경은, 각 설화들의 엄청난 부조화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신 26 : 5-9(6 : 20-24)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매우 간략한 구원사적 역사상을 그 기저에 깔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이러한 역사서술들의 구조를 현재 형태의 육경 역사서 전체의 맥락에서 살펴보면 놀라웁게도 그것은 설화 전체의 골격을 갖추고 있는 소위 "육경의 축소판"(the hexateuch in miniature) 같이 보인다. 그러나, 육경의 중심 뼈대를 구성하고 있는 그 개요들(summaries)의 기본주제들이란 오히려 육경을 축소하여 구성한 것이라기보다는, 전승사적으로 볼 때, 비록 거기에 최종의 테두리와 해석을 붙인 때는 천여년이나 후대의 일이라 하더라도 그 기본주제들은 어디까지나 권위있는 고대전승을 기초하고서 점차적인 신학적 확대와 발전의 과정을 거쳤던 역사적 핵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위의 도해는 그것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미 폰·라트가 그의 육경연구에서 가정한 바와 같이 육경설화(이스라엘 민족형성사)를 구성하고 있는 중심주제들(창조-족장-출애굽-시내-광야-땅 수여) 중에서 "고대의 짧은 역사신조"에는 빠져 있는 시내산 전승은 초막절 축제 때 거행된 고대 야훼종교의 계약갱신의식에서 낭송된 제의전설로써 핵심전승인 고대 땅 정착전승과는 본래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고대" 전승이었던 것인데 비교적 후기에 야비스트를 통하여 ― 어디서 또는 어떤 형태로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 땅 정착전승에 포섭되어 경전적 구원사 속에 삽입되었고 그렇게 하므로 땅 정착 전승의 구원사적 성격에 새로운 지원을 주게 되었으며 족장 전승도 비록 그것이 고대신조의 필수적 구성요소였고 또 그 가지고 있는 "땅 약속 주제" 때문에 땅 정착전승이 가장 초기때부터 그 출발점으로 삼았던 전승이긴 했어도 야비스트를 통하여 발전적 개작(땅 정착전승의 서론으로 Re-orientation!)을 받았고 더욱이 원역사의 민담(The sagas of the primaeval history)들 ― 낙원설화, 가인설화, 가인족보, 셋족보, 하나님의 아들들의 결혼, 홍수설화, 노아와 가나안, 열국의 계보, 바벨탑 건축 등 ― 도 본래 아주 독립된 자료의 덩어리였던 것이지만 그것 역시 야비스트의 손에 의하여 구원사의 서장으로써 결합되었다 하겠다. 이러한 폰·라트의 주장은 다소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현금의 구약신학계에서 설득력 있는 이론으로 인정받아 왔다. 즉 육경의 기본주제들은 긴 전승사를 거쳐왔던 것임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세겜, 벧엘, 헤브론, 길갈, 실로 등 성소제의를 통한 신앙고백의 긴 전승사적 과정 속에서, "본래는 각각 독립적으로 존속했던" 족장들을 향한 땅 약속, 출애굽의 구원, 광야인도, 땅 약속의 성취로서의 가나안 수여 등의 야훼의 역사행동에 관한 전승들이 결합되어 경전적 구원사상을 형성하였고 이스라엘 민족형성사는 이러한 야훼의 행적에 관한 감사와 찬양 제의를 통하여 이룩된 경전적 구원사상 ― 육경의 뼈대 ― 위에 구축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 형성의 ― 지파결속의 ― 추진력이란 각각 독립된 역사적 경험들(독립된 역사전승들)을 야훼의 역사적 행동으로 통일되게 고백하는 공동의 신앙고백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형성사는 전적으로 그 연대기적인 순서에 따라서가 아니라 신앙고백적 구원사상 구상에 의해서 구성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즉 육경의 윤곽은 역사 비평적 논구에 의해서 언제나 파괴될 수 있다 하겠으며 단지 그것들을 결속하는 유일한 근거는 구원사적 크레도(Credo)뿐이라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히브리 역사가의 역사해석상이 갖고 있는 그 특유한 양식과 성격을 인식하게 된다. 이와는 그 양식이 전혀 다르지만 즉 육경과는 그 문학구조가 현저히 다른 신명기적 역사가의 역사구성에 있어서도 우리는 구원사적 역사상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 형성기인 사사시대에 관한 신명기적 역사가(dtr)의 역사초점 ― 배신, 징계, 회개, 구원이라는 도식적 틀 ― 도 역시 이스라엘 민족형성사에 대한 또 하나의 구원사적 역사상 구상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육경에서든 사사기에서든 우리는 히브리 사가들의 역사상이 뚜렷하고도 명백한 구원사적 역사상을 구성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이것이 또한 히브리사가들의 역사기술 및 역사해석의 특징임을 인식하게 된다. 2) 이스라엘 민족형성사의 역사적 배경 이미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형성사에 관한 히브리 사가들의 구원사적 역사상 도식과 구성 속에서 그 구상적 성격을 읽어왔다. 그리고 육경의 역사상이 가진 윤곽들은 객관적 역사서로서나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형성된 구조가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그 구상성이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fact)의 기반을 갖고 있는 것이지 결코 비역사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도 읽어 왔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구약의 역사설화들이 제공하는 자료들의 서열을 논증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러한 히브리 사가들의 역사상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 그 역사적 현실과 그 배경을 살펴보고 그 조명 아래서 이스라엘 민족형성에 끼친 역사신학의 의의를 찾으려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논구의 순서는, 그 역사적 재건이 어떤 형태로든 결코 가능하지 않는 이상, 즉 명민(明敏)한 팔레스틴 고고학의 결과로서도 구약 역사전승의 신빙성을 명료히 증거할 수 없는 이상 우리는 경전적 구원사상의 중심주제들이 연결된 그 대체적 서열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1) 족장전승 :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대표적 족장으로 하는 방대한 부피(창 12∼36장)의 족장설화는, 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인, 이른바, 지혜문학적 교화설화로써의 요셉설화(창 37∼50장)와 함께 가장 고대의 역사고백문인 신명기 26 : 5-9의 첫 절로부터 우리에게 전승된 아주 간결한 표현, 즉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신 26 : 5)라는 짧은 표현과 비교해 본다면, 그것은 여러 다양하고도 독립적인 개체 자료들이 매우 오랜 전승사적 단계를 거쳐서 풍부하게 증대된 설화의 덩어리라 하겠다. 즉 이 설화 덩어리는 전승사적 연구가 예리하게 분석해준 연구에 의하면, "하나의 생생한 민족적 상상"(a lively folk imagination)이 반영되어 있는 복합 자료집이며 "아브라함 → 이삭 → 야곱"이라는 족장들의 그 족보 구성이나 그들의 유랑에 관한 성서적 서열은 이미 후대의 손질에 의한 인위적 구상임을 보여 준다.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삭 전승으로 인하여 그 주제들이 풍부하고 다양하게 된 아브라함 전승, 아브라함 전승으로 인하여 대폭희생을 당한 "더 본래적인 이삭 전승", 그 기원이 서로 다른 두개의 야곱 전승(야곱-에서 전승과 야곱-라반 전승) 그리고 이들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요셉 설화들은 본래 족보적 관심같은 것은 전혀 없이 형성되었던 서로 독립된 전승들이었으나 그들 민족의 형성을 "한 조상"으로부터 직선적으로 유래된 것으로 나타내려고 한 후대의 관심에 의해서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이라는 인위적인 족보가 구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들도 민속적 원인론들로 꾸며져 있으며("이삭"은 "웃는다"는 말, "야곱"과 "이스라엘"은 "발꿈치"와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에서부터 원인론적으로 구상되었다) 반(半)유목민으로서의 족장들은 본래 그들의 신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후대의 손에 의해서 헤브론과 브엘세바(아브라함·이삭) 그리고 세겜, 벧엘, 마하나임(야곱) 등과 같은 가나안의 제의장소와 지역적 접착(Ortsgebundenheit)을 갖게 됨으로써 가나안 제의에서 드리는 이스라엘 예배를 원인론적 방법에 의하여 합법화하려 했다는 점 등도 또한 족장설화들에 대한 구약적 조형의 인위적 구상성을 증언해 준다. 특히 많은 고고학적 증거자료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족장설화들 속에서 족장들과 관련지어 나타나고 있는 인물들과 사건들의 역사성을 증명할 길이 없다는 점은 더욱 유의할 만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써 창세기 14장의 사건들이 가진 구상성에 관한 에머톤(J. A. Emerton)의 연구는 거기에 나오는 왕들의 역사적 일치를 결코 얻을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과 동시에 아브라함의 팔레스틴 출전에 관한 설화는 전혀 공상적(fanciful)이라는 것을 지적해 주었다. 대체로 족장사에 나타난 구상적 특징들로 인하여 벨하우젠(J. Wellhausen) 같은 이는 아예 족장시대를 "고색창연한 고대물 속에 투사된 이른 바 환상의 신기루"로 보았고 노트(M. Noth)는 족장전승을 아예 "이스라엘 12지파연맹 중에 남아 있는 전승들 중의 하나"로 취급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아예 사사시대에 관한 논의에서부터 시작해 버린다. 그에게 있어서 "전체 족장전승은 출애굽전승과 같이 이스라엘 전승들의 원 줄기에 부여한 하나의 후대의 공헌"에 불과했다. 물론, 앵글로 아메리칸의 보수적 입장, 예컨대 올브라이트(W. F. Albright)가 말한 바, "창세기의 전체 묘사가 역사적인 것처럼, 자세한 전기적 자료와 족장들의 인격에 관한 묘사들의 …… 역사성은 의심할 만한 이유가 없다"라고 한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족장설화들의 기본적 역사성은 그 구상성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족장 설화의 그 기본적 역사성을, 그것이 전체 이스라엘 전승의 강력한 한 요소였다는 점과 그 족장전승의 뿌리를 고대 중동지역에서 일어난 길고도 폭넓은 셈종족의 이동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인식한다. 즉 B.C. 24C경 메소포타미아 동부로 이동하여 거대한 수멜-아카드 문화를 형성했던 아카드인(셈족)의 이동이나 B.C. 20C로부터 이동을 시작하여 B.C. 1700년대까지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앗수르 왕족, 마리 왕국, 바벨론 왕국을 세웠던 아모리인의 이동, 그리고 기원전 1700년대의 힉소스(Hyksos)의 애굽 이주라는 중동의 배경들 아래서 헤브론 주위로 정착한 아모리인의 가나안 이동(아브라함 족), 세겜과 벧엘에 정착한 아람인의 가나안 이동(야곱족), 네겝으로 옮아 온 미디안족과의 합세, 확산된 하비루 족의 여러가지 이동 등에서 이스라엘 족장들의 삶의 배경을 찾을 수 있고 그 전승의 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B.C. 18C 경의 Mari 텍스트에 나타나는 족장들과 동일한 이름들 B.C 15C 경의 Nuzi 텍스트에 나타나는 족장들의 관습과 동일한 관습들 B.C. 14C 경의 Tell-el-Amarna 텍스트에 나타나는 하비루족의 공격적인 이동상황 등이 그것을 말해 준다. 어쨌든 이들 족장들은 이주의 전승들을 갖고 있으며 그들이 메소포타미아적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반박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족장시대를 마리 문서(Mari text)나 누지 문서(Nuzi text)의 시대(B.C. 2000년대)와 관련시킬 수 있다는 주장, 또는 청동기 시대와 관련시켜야 한다는 주장, 심지어는 철기시대와 관련시켜야 한다는 주장 등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어느 한 주장에 편승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애굽으로 뻗은 반월형 지대를 유랑하는 고대의 셈족의 이동무리에서 족장전승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고 그 족장시대는 그러한 전승적 배경을 갖고 사사시대와 그 다음 대를 가리키는 철기시대까지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시할 따름이다. 이러한 유랑민들에 관한 폭넓은 전승위에 수립된 이스라엘적 신학은, 족장설화가 줄기차게 증언하고 있듯이, 그들은 그들의 신으로부터 약속(후손 약속과 땅 약속)을 받은 자들이라는 통일된 주장에 그 공통의 근거를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그들이 가나안 제의들의 창설자라는 족장설화의 주장도 이러한 땅 약속 주제와 관련시켜야 할 것이다!). 족장전승의 역사성은 이러한 폭넓은 이주전승과 관련해서 읽어야 할 것이고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 형성사에 관한 중심적 역사전승인 출애굽 전승과 땅 점유전승과 전승사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아야 할 것이다. (2) 출애굽, 시내, 광야유랑전승 : 이 세개의 전승은 비록 본래는 피차 독립된 주제로써 떨어져 있었고 또 경전적 구원사의 틀 속에 들어온 그 순서가 다르다 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고대의 역사 전승들이고 하나의 표상을 전제하고 있다 하겠다. 그 점에 있어서라면, 족장전승이나 땅 전승도 동일한 하나의 표상을 지향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전승들이 이스라엘 역사고백들에서 나타나는 그 현상을 살펴보면 출애굽구원에 관한 표현이 논의의 여지없이, "원신앙고백"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원신앙고백을 형성한 출애굽 전승도 구약성서 밖에서는 그 직접적인 역사적 증거를 확증할 길이 없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더욱이 성서전통이 테두리를 그어준 것은 거의 의도적 구상이라 할 만하다. 이미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전체 이스라엘"(k l-, 'israel)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함께 출애굽을 경험했다는 주장이나 그들이 육지처럼 건넜다는 홍해(원명은 갈대바다)가 나일강 삼각주 동편이나 불레셋 땅의 지중해 해안지역과 관련된 것이라는 보도(갈대바다는 오히려 아카바만을 의미한다. cf. 왕상 9 : 26)나 야훼와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고 율법을 수여받은 곳이 시내산이었다는 주장(시내산에서 반포된 율법은 거의 전부가 농경지에서 유래된 것이다)이나 애굽에서 나온 전체 이스라엘이 시내산으로 유랑하여 그곳에서 얼마간 체류한 다음 요단강 동편지역으로 광야유랑을 계속했다는 주장 등은 전승비평적 관찰에 의하면 인위적인 틀 속에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들은 비록 짧은 고대의 역사신조(신 26 : 5-9) ― 그들의 조상은 유랑하는 자들이었고 그들은 특수한 출애굽 경험을 했으며 야훼 하나님의 기적적 도움을 입어 가나안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짧은 신앙고백 ― 주위에 모여서 그 핵에 맞추어 연속성 있는 구원사적 역사상을 구성하고 거기에 많은 독립된 단편설화들을 삽입 첨가함으로써 거대한 육경설화를 구상해 냈다 하더라도 그 모두는 역사적 사실 위에 서 있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창작된 것은 아니다. 즉 그것들을 독립된 주제들로 독립시켜 볼 때 그 각 주제들이 각각 역사적 핵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길이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전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 형성 이전의 어떤 유랑민들이(그들이 후일 이스라엘 형성의 구성원이 되었다) 애굽으로 내려가 체재한 경험, 탈출경험, 가데스나 시내에서 야훼종교를 체득한 경험, 오랜 유랑생활의 경험, 가나안 침투경험 등을 했을 것이라는 여러가지 성서 이외의 증거 자료들을 갖고 있으며 여러 유랑민들이 갖고 들어온, 이른바, 본래는 서로 연속성이 없었던 각각의 역사적 경험들이 모여져서 하나의 통일성 있는 구원사적 역사상을 형성했을 그 전승사적 현실을 긍정한다. 예컨대, 애굽 Seti(Sethos) II 시대로부터 온(B.C. 1200년대) 파피루스 문서인 제4아나스타시(Papyrus Anastasi IV)에 의하면 애굽 국경에 있는 한 관리가 에돔에서 온 사막 유랑민(Beduine) 들에게 나일강 동부 Delta 지역(Teku의 Pithom : 성경의 고센)으로 들어가 목축을 하는 것을 허락했다는 것이며 이러한 유목민의 이주가 여름 건조기에는 흔히 있는 일임을 지시하고 있다. 비록 이것은 간접적인 증언이긴 하지만 이스라엘 조상들의 애굽 이주에 관한 성서적 증언의 역사적 배경을 말해 준다 하겠으며, Amarna 문서, Nuzi 문서, Mari 문서, 우가릿 문서, 헷 문서 등에 널리 언급되어 있는 "하비루"의 여러 움직임(부역이나 용병에 끌려가기도 하고, 때로는 무법의 약탈자 또는 강도떼가 되기도 하고 추방을 당하거나 스스로 탈출을 감행하거나 했던 여러가지 양상의 움직임)은 성서의 "히브리인들"의 움직임과 상응성을 갖고 있는데 특히 이 "히브리인들"이 출애굽과 관련해서 자주 나타난다는 점 등은 출애굽 사건의 역사성을 뒷받침해 준다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유랑민들의 움직임은 족장들의 유랑과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유전승과 관련해서 생각할 문제이고 결코 이스라엘의 애굽 이주와 탈출이라는 측면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광야의 유랑(가데스 체류나 시내산 경험)도 모두 조상들의 유랑생활의 경험의 반영으로 볼 수 있으며 전승사적으로 볼 때 그 각 경험들은 현재의 윤곽에서처럼 전체 이스라엘의 연속성 있는 경험이 아니라 독립된 전승들의 의도적 결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출애굽과 시내산(또는 가데스) 경험을 이스라엘적 경험의 중심부로 끌고 온 전승자들이 누구냐 하는 데 있다. 아마도 가장 가능성 있는 추측은 그들을 요셉지파, 에브라임지파로 보는 견해일 것이다. 이들 지파들은, 출애굽 경험과 가데스나 시내에서 겐족과 미디안 족으로부터 야훼사상을 받아 남부의 이스라엘 집단이나 세겜 중심의 이스라엘 집단에게 전달했으며 그것이 전체 이스라엘의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지파들의 이동에 관한 지식은 출애굽의 의의를 경전 전통에 고정시키지 못하게 한다. 이미 언급한 하비루 천민들의 다양한 움직임 전체를 출애굽 운동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올브라이트가 아피루-아비루('Apriru-'Abiru) 그리고 이브리('ibri)라는 말의 의미를 당나귀들이 일으킨 여행 행로의 먼지에서 찾았듯이 그들은 지역토착민들보다 더 낮은 계층에 속한 자들로써 고정된 질서에 소속된 무리들이 아니라 시민생활 밖에서 살면서 땅도 없고 그러므로 권리가 없어 용병이나 부역에 채용되거나 강제노동에 징용되며 때로는 약탈의 무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시민생활 양식으로 빨리 교체하기도 한 떠돌이들이었다. ― 그러므로 애굽의 노역을 겪었던 히브리인들만이 이러한 고역을 겪었다고 단정키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창 49 : 14f의 잇사갈은 부역에 종사한 품꾼으로 추측되며 창 49 : 13의 스불론도 항구의 강제노역에 종사한 자들로서 추측되고 사사기 5 : 17의 길르앗, 아셀, 단도 그러한 각도에서 추측할 수 있다는 점은 그 좋은 예라 할 것이다. ― 실로 이러한 움직임은 떠돌이들이 정착할 땅을 찾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의 땅 정착의 상황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3) 땅 정착전승과 암픽티오니 가설 : 약속의 땅 정착에 관한 이스라엘의 역사전승은 구약 안에서 크게 두 가지 주장 사이의 긴장 관계를 갖고 있다. 여호수아 1∼11장에 나오는 땅 정복설화들의 정통적 논리는 ― 주로 J와 dtr에 의하여 ― 요단 서편 땅 점령이 여호수아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전격적인 군사정복을 통하여 "완결하게"(수 21 : 43-44)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마치 그것은 모세 지휘하에 출애굽과 광야유랑이 획일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출애굽기로부터 민수기까지의 정통적 논지와 비슷하다). 그러나 여호수아 1∼11장의 어느 부분들은 사사기 1장의 보도와 동일하게 정복의 실패에 관해서 보도해 주는가 하면(그것은 마치 민 32 : 39-42가 모세 영도하의 요단 동편 점령에 관한 오경의 상황과 상반되는 것과 같다) 또는 그 정복전이 지파별로 이루어진 것을 지시하기도 한다. 라이트는 이러한 모순을 조화시키기 위하여 땅 정복전을 이와같이 설명한다. 즉 "우리가 재구성하는 정복에 관한 그 어떠한 견해에 있어서도 두 그룹의 서로 다른 고고학적 자료를 고려에 넣는 것이 필요하다. 그 한 그룹은, 가나안 여러 주요 도시들을 멸망시켰던 13C경 팔레스틴에 있었던 크고도 난폭스런 혼란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그 다른 한 그룹은 12-11C에 있었던 일을 말해 준다. 즉 이 시대는 그 땅의 역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혼돈의 상태에 있었던 시기중의 하나였음을 지시해 준다 …… 우리가 역사적 그리고 고고학적 자료를 함께 놓고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견해에 도달한다. 즉 거기에는 13C 동안에 이스라엘이 행했던 큰 침공과 성공적 출정이 있었다. 그 목적은 현존하는 가나안의 도시국가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수세기 동안 거기에는 미(未)정복 도시국가들을 줄일 필요성이 있었고 그곳을 침식해 오는 많은 주민들과 계속적인 투쟁을 할 필요가 있었다"라고 했다. 말하자면 여호수아 정복은 가나안의 주요 도시 국가들을 파괴하는 것이었고 이 정복전은 그 다음에 오는 개개의 지파들에 의한 점차적 정복 즉 그 땅을 완전히 소유했던 제2의 정복기에의 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러한 주장은 팔레스틴의 많은 도시들이 파괴된 고고학적 유적들을 후기 청동기 시대와 결부시키고 그 파괴를 여호수아의 정복전에 돌리는 보수적 경향을 대변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유적에 대한 판단이 가진 "한계"를 조심스럽게 의식하고 있는 Alt와 Noth의 전승비평적 연구에 의한 견해에 의하면 가나안 점유는 전체 이스라엘 연합군에 의한 군사정복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여름 목축지를 찾아 매해 인구가 적은 팔레스틴 고원지대로 이동해 가는 소수의 유목민 또는 반유목민들에 의한 평화적 침투로써 시작되었고 그 후 정착된 농경민이 되고 자신들의 힘을 결합시키기 시작했을 때 이스라엘인들은 영토확장이라는 제2의 정착기에 들어갔으며 군사정복을 포함한 제2의 정착기는 사사시대 말에 시작되었고 다윗과 솔로몬 통치 때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여호수아 1∼11장의 정복설화들을 신명기 사가의 비합리적인 정복관념이 반영된 것이라고 하여 완전히 허구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멘덴홀(G. E. Mendenhall)은 이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그에 의하면, 외부에서부터 가나안으로 밀고 들어간 정복전이란 전혀 없었고, 단지 안에서부터 일어난 기존의 사회체제에 대적하는 천민들의 혁명들이 있었을 뿐인데 이 혁명의 시작은 애굽 탈출의 무리들에게서 시작되었고 이들이 곧 아마르나(Amarna) 문서의 하비루와 일치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천민들의 혁명은 주로 압력계층인 도시국가들의 왕들과 귀족들에게 도전하는 성격의 것인데 요단 동편에서 시작된 헤스본의 시혼왕국과 바산의 옥의 왕국에 대한 반역은 주로 압력계층인 왕들과 귀족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이러한 "히브리족"이 이스라엘의 기원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멘덴홀의 견해를 수정하고 나온 군네벡(A. H. J. Gunneweg)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보이는 하비루의 토지점령 운동이란 전적으로 가나안의 내부적 현상만이라고는 볼 수 없고 오히려 사막으로부터 농경지로 들어오는(외부에서 내부를 향한) 운동과 그리고 가나안 도성들과 도시국가의 사회구조로부터 산지를 향해 탈출해 나가는(내부에서 외부를 향한) 운동 즉 가나안 봉건체제로부터 "유랑하는 하비루의 생활"로 돌입해 들어가는 운동, 둘 다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사실, 만일 우리가 야비스트나 신명기적 역사가의 의도적인 역사조형의 배후를 살펴 보면 히브리인들의 팔레스틴 입주사란 야비스트나 신명기적 사가의 단순화한 역사도식에 비하면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고고학적 역사해석의 전문가인 밀러(J. M. Miller)가 여리고와 아이 지역의 파괴를 전혀 후기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돌릴 수 없다고 볼 뿐만 아니라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후기 청동기 시대에 파괴된 것으로 알려진 가나안도시란 단지 하솔인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유의할 만하다. 따라서, 우리는 가나안 정복에 관한 성서의 보도들(여호수아서)의 대부분이 원인론적 설화일 가능성을 보는 반면 그 땅 정착보도의 역사성은 오히려 당시 팔레스틴의 사회적 현상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아울러, 이스라엘 민족형성은 이들 무리들의 "연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민족형성이란 매우 복잡한 과정을 통하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구약성서의 가장 빈번한 언급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12지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민족이다. 이러한 민족형성에 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암픽티오니 가설을 통해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12지파 연맹체인 암픽티오니의 형태로 그 역사적 실재를 형성"(M. Noth)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파연맹가설은 올린스키(Orlinsky), 밀러, 포러(Foher) 등등 여러 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우 권위있는 학설로 인정받아 왔다. 이 이론을 암시한 첫 사람은 에발트(Heinrich Ewald) 인데 이 이론을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제시한 자는 노트이다. 노트에 의하면 유럽 특히 희랍과 이태리의 암픽티오니들(cf. Delphic 연맹, 또는 Etruscan 연맹)과 그 구조가 비슷한 이스라엘 지파 연맹(암픽티오니)이 왕조기 이전에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전에 부족연맹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즉 대동강 유역일대에 산재하던 여러 부족들이 모여서 형성한 고조선부족연맹과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의 오족(五族)을 중심하여 형성된 고구려부족연맹이 그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국가형성 이전의 과도기를 대행한 것이었는데 노트에 의하면, 중앙성소가 그 연맹의 센타였고 가맹(加盟)지파의 수는 6또는 12라는 수에 고착되어 있었다(물론 우리나라의 그것은 12 또는 6이라는 수에 얽매여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스라엘 지파연맹의 초기 결성은 레아지파(여섯지파 : 르우벤, 시몬,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에 의하여 독립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후에 첩(妾)의 지파(빌하, 실바)와 그리고 요셉과 베냐민 지파가 결합하므로 비로소 12지파 연맹체가 형성된 이른바 발전적 단계를 거쳤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서 이 연맹체를 결속시키는 힘인 야훼 종교와 법궤를 이곳으로 소개한 지파는 요셉지파였다는 것이며, 암픽티오니의 법규 ― 이 법은 계약의 책(출 21∼23장) 여러 부분 가운데 보존되어 있는데 ― 가 선포, 관리되고(제후 또는 지도자를 의미하는 네시임[nesi'im]이 그리고 삿 10 : 1-5 ; 12 : 7-15에 나열된 소사사(小士師)들이 이 직임을 맡은 것으로 봄) 그리고 정기적인 제의축제가 지켜졌던 중앙성소는, (그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세겜 → 벧엘 → 길갈 → 실로로 옮겨져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암픽티오니의 회의에서는 네시임[nesi'im]의 주제 아래 여러가지 현안문제들이 토의되었고 때때로 그 연맹체는 공동으로 전쟁에 참여했는데 그 전쟁은 주로 방어전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파연맹의 결성에 관한 설명은, 다소 미세한 차이점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갓월드(N. K. Gottwald)와 구드리(H. H. Guthrie)의 주장을 소개함으로써 좀 더 보충될 수 있을 것이다. 노트와 갓월드의 견해를 배경으로 한 구드리의 주장에 의하면, 팔레스틴 북부와 극남부에 지파연맹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는 것이다. 북부의 것은 세겜과 실로를 중심으로 하고 라헬과 그의 몸종을 조상으로 하는 지파들이 연맹체를 구성한 것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라엘의 아들들" 또는 단순히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웠으며 그 연맹체의 성격은 강력하고 거세며 독립적인 그리고 호전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부의 것은 헤브론을 중심으로 하고 레아와 그의 몸종을 조상으로 하는 지파들의 연맹인데 이들은 "유다의 집"(겐족, 미디안족의 요소들이 포함)이라고 불리우며, B.C. 19-18C에 있은 아브라함 유랑민을 대표한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 이스라엘의 민족형성은 야훼종교의 원고향인 가데스로부터 온 무리들의 헤브론 도착과 애굽 탈출의 무리들이 가데스를 경유하여(야훼종교를 갖고)와서 팔레스틴 중부 세겜 또는 실로 연맹과 결합한 후, B.C. 1000년경, 세겜이나 실로의 연맹과 헤브론 연맹이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갓월드의 주장은 이보다 좀더 체계를 갖추어 제시되었는데 그에 의하면, B.C. 1750- 1650년경에 북으로부터 이동해 온 아브라함 족(아모리인)이 남방 헤브론에 정착하였고(창 13 : 18, 14 : 13, 18 : 1) 그들은 그곳 원주민들과는 평화적 공존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미디안인들의 종교센타인 가데스로부터 온 미디안인 야비스트들이 네겝으로 와서 이 아브라함족과 계약을 맺고 "헤브론 지파연맹"을 조직하였으며, 다른 한편, 야곱이 이끄는 아람계 히브리인들이, B.C. 1500-1350년경, 북방의 벧엘과 세겜 주변에 정착(창 25: 18-19 ; 33 : 18-20 ; 35 : 1-20)하였는데 그들은(특히 시몬과 레위) 매우 호전적이어서 원주민들과는 적의(敵意)관계 속에 있었으며 이들이 라헬 지파를 중심한 "세겜 암픽티오니"를 형성하였다는 것이다(여기에는 유다와 르우벤을 제외하고는 창 29 : 31; 30 : 24 ; 35 : 16-21의 12지파가 모두 포함되었다). 그런데 이 세겜 암픽티오니의 지파 중 어느 일부(레위와 에브라임지파)가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강제노동에 징용되었고(창 47 : 4; 출 1: 8-14) 그것을 견디지 못한 그들은 마침내 가데스 지역으로 탈출하였으며 거기서 오래 머문 후(가데스체제에 관한 구약의 보도 : 민 13 : 26 ; 신 1 : 19 ; 46장; 수 14 : 65) 가나안으로 가서 야곱지파와 재결합(출애굽 히브리인+야곱 히브리인의 결합)하였고 여호수아 지도 아래 계약에 의하여 결속된 세겜 암픽티오니로 묶여졌으며(수 24장 : B.C. 1230년대) 이러한 "세겜 암픽티오니"와 "헤브론 암픽티오니"의 결합을 통하여 이스라엘 공동체가 탄생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가지의 설득력 있는 암픽티오니 가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공통된 결론은 이스라엘이란 근본적으로 12지파의 연맹체이다는 주장에로 귀결된다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복잡한 팔레스틴의 종족적, 사회적 현상의 난삽한 얽힘을 통일된 지파연맹으로 결속시키고 심지어는 창조하기까지 했던 중심적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물음을 푸는 주요한 열쇠는 아마도 중앙성소의 기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중앙성소는 ― 세겜(수 8 : 30-35 ; 24 : 1-28), 벧엘(삿 20 : 18), 길갈(수 4 : 19f ; 삼상 10 : 8 ; 13 : 8-15 ; 15 : 12-21), 실로(삼상 1ff)(아마 헤브론 역시!) 등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분명히 지파연맹의 공식적 성소였고 공동생활의 심장이었다. 물론 이 시대에 있어서는 지방성소가 배척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이 중앙성소는 불가시의 야훼의 보좌인 법궤를 모시고 있는 핵심적 성소였고 "사막신앙의 유산인 법궤"를 통하여 야훼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였으며 신성한 제의적 사건들이 일어나는 제의장소였다(초기 이스라엘의 제의는 희생제도에 관심을 모은 것이 아니라 유월절, 77절, 수장절, 계약갱신제 등에 관심을 모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여기서 야훼의 현존 앞에 섰고 그와의 계약을 체결(반복적 갱신)하며 계약율법의 선포를 들었다. 실로 이 연맹체는 "이스라엘 계약신앙의 한 외적 표현(an external expression)"이었다. 이러한 계약신앙은 출애굽의 경험을 중심적인 역사신앙으로 하는 무리들에 의하여 역사화 되었고 이 출애굽의 경험 주위에 모인 많은 역사적 경험들은 또한 가데스로부터 가져 온 야훼신앙에 의하여 야훼 종교화되었다. 이러한 신앙은 "역사신조"라는 형태로 중앙성소의 제의적 낭송의식 속에 들어왔고 그것의 계속적인 현재화는 곧 각 지파를 하나로 묶는 바로 그 "힘"이었다 하겠다(cf. 신 26 : 5-9 ; 수 24 : 2b-13, 여기서 수 24 : 2b-13은 세겜 암픽티오니의 낭송문으로서 널리 인식되어 왔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역사신앙 속에 담긴 히브리 사가들의 역사해석상이 가지는 그 민족사적 의의를 살펴 볼 단계에 와 있다.
2. 이스라엘 민족형성사에 대한 역사해석 이미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형성사에 대한 히브리사가들의 역사기술이란 "육경의 요약"이라는 형태로 나타나 있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신조(신 26 : 5-9, cf. 수 24 : 2b-13)와 그것의 확대와 증보로서 나타나 있는 육경(또한 이와는 독립된 dtr의 역사작품인 사사기도)의 역사상이 말해주고 있듯이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신앙으로 해석된 역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볼프(Wolff)가 말해주고 있듯이, "오경(또는 육경)의 문서들은 신조(credo)의 주제들에 따라 구성된 것이지 역사적 관심 때문에 구성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실증은 성서 역사문학의 자료들 그 자체가 이미 명료하게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여호수아서에 나타나고 있는 가나안 정복과 정착에 관한 보도는 그 역사적 실황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이 포로기 동안에 가지고 있었던 관심의 반영이라는 점은 그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나안 전토(全土)가 여호수아 영도하에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정복되고(수 1∼12장) 그 전토가 12지파에게 분배되어(수 13∼21장) 비로소 각 지파의 기업이 되었다(수 22∼24장)라고 하는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유가 주요한 신학적 관심이 된 시대로부터 유래한 신명기적 역사서이기 때문에 그 보도는 더 이상 객관적인 역사적 실재는 아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족장유랑 주제, 출애굽 주제, 광야유랑 주제, 가나안 땅 수여 주제 등 고대 역사신조를 구성하고 있는 주제들 전반에 적용된다 하겠으며 육경속에 보완된 시내산 계시 주제나 원역사의 주제에도 역시 적용되어야 한다. 즉 가나안을 "젓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서 묘사하고 있는 "과장된 서술"이나 가나안 점유를 전혀 야훼의 인도에 의한 것으로서 말하는 신앙고백양식이나 그리고 출애굽과 광야 인도를 전혀 야훼의 "이적과 기사"에 의한 것으로 보는 역사가의 관점 등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하겠다. 실로 성서에 나타난 히브리사가들의 역사적 관점과 과제는 ― 현대 역사가의 과제도 역시 ― 전적으로 역사에 대한 해석에 초점이 모여지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그 역사해석의 양식이 문제이다. 그런데, 구약에는 역사를 해석하고 서술하는 통일된 표현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성서의 다양한 역사적 서술의 핵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이른바 모든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묘사는 한 동사(動詞)를 활용하는 한 주어(主語)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모든 역사적 사건은 ― 전혀 배타적으로!! ― 야훼 하나님의 주체적 행동으로써 묘사되고 있는데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과 같은 역사적 사건은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나타내는 하나의 "독소로기(doxologie)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체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신의 사건은 매우 의인법적으로 기술되고 있으며, 그 역사설화는 눈에 띌 정도로 신중심적(theocentric)이다. 따라서 역사보도는 하나의 종교적 경험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맥머리(John Macmurray)의 말에 대한 노르트(C. R. North)의 다음과 같은 인용문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유대인의 사상은 역사를 하나님의 행동으로 본다. 우리의 역사가들은 '시이저가 Rubicon을 건넜다' 또는 'Nelson이 Trafalgar 전투에서 승리했다'라고 말하는 대신, 유대인 역사가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종교적 편견을 단순하게 받아들인 말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히브리적 반성이 연속적으로 취하는 형식이다. 동시에 히브리 사상은 종교적이고 경험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역사를 하나님의 행동으로써 생각한다는 점에서 종교적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운동법칙을 발견하기 위하여 역사를 회상한다는 점에서 경험적이다." 이러한 히브리사가들의 역사경험에 대한 신앙고백이란 제의를 통한 부단한 찬양(감사)에 의하여 아주 먼 후대에까지 보존되었다는 것은 구약학계의 권위있는 지론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의전승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수된 히브리사가들의 역사설화들 속에는 그것이 아무리 다양한 민담자료의 편집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역사신앙의 핵이 들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역사신앙의 핵이야말로 이스라엘 민족형성의 주체세력이라 하겠다. 1) 이스라엘은 야훼의 약속성취의 결정 구약 역사전승에 있어서 특히 특징적인 것은 그들이 본래는 자기 땅에 살지 않았고 "후에" ― 야훼께서 그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신(성취하신) 후에 ― 비로소 그 땅을 자기의 땅으로 하고 살게 되었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각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구약에 나타나고 있는 야훼의 역사적 행동들은 "약속"에 의하여 미리 선포되었고 그 행동들이 사건으로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은 거기서 야훼의 약속성취를 경험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그의 역사를 약속으로부터 성취에로 이르는 한 운동으로 보았다 하겠다. 침멀리(W. Zimmerli)와 말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의 전역사는, 여러 독립된 사건들에 있어서까지도, 약속에서 성취에로 이르는 그 긴장의 호(弧) 속에 뻗혀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이 약속성취의 주제가 이스라엘 전역사는 물론 특히 민족형성사를 구축하고 있는 중심주제라는 점에 있다. 즉 족장유랑(창 12 : 11ff ; 26 : 1ff ; 28 : 13ff), 출애굽(출 2 : 24 ; 3 : 10), 시내산 계약(출 19 : 5-6)은 모두 신의 약속선포로써 시작되었고 약속성취의 한 구체적 예로서의 가나안 땅 수여도 역시(출 2 : 24 ; 3 : 10) 족장설화에 나타난 보다 더 큰 성취에의 기대와 긴장관계를 갖고 보다 더 큰 신의 약속을 향해 개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고대역사신조(신 26 : 5-9)의 첫 절 전반에 아주 간결하게만 언급된 족장설화는 육경 속에서 아브라함 소명으로부터 요셉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거대한 복합설화체(창 12 : 50)로써 등장하고 있는데 "이 다양한 설화 덩어리"에서 우리는 이 설화집에 하나의 주제적 연결을 제공하고 있는 매우 고대적인 뿌리를 가진 하나의 주제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른바, 족장들에게 주신 "신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이 신의 약속은 이 족장 설화 속에서도 이미 약속주제의 두 기둥인 땅 약속과 후손약속은 물론이고, 시내산 계약의 어투와 상응하는 특별한 신 관계에 관한 약속(창 17 : 4-8)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약속성취의 주제란 결코 약속과 성취라는 어떤 필연론적 원리나 또는 어떤 기존 사상의 응용으로서 나타나지 아니하고 고대전승에 그 뿌리를 갖고 있는 야훼의 주체적 역사섭리에 대한 역사신조로서 나타난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서 소위 "약속의 지연"이라는 주제(시련 주제?)가 나타난다. 말하자면 후손 약속(민족형성 약속)은 출산능력이 없는 족장의 아내들(사라 : 창 16 : 1, 리브가 : 25 : 21, 라헬 : 29 : 31)을 통하여 그리고 애굽의 히브리인 영아살해 칙령(출 1 : 16, 복음서에 나타나는 헤롯의 명령과 비교해 보라!) 아래에서뿐만 아니라 약속받은 자의 불신(신앙적 실패)(창 18 : 12)에도 불구하고 성취를 향해 가고 있다. 이 약속은 애굽에서 이루어진다(출 1 :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며,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즉 이 출 1 : 7은 "아브라함(창 12 : 2 → J, 17 : 6 → P)과 야곱에게 주신 신의 약속이 이스라엘의 중다한 번식 속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형성은 전적으로 신의 약속성취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더 중요한" 땅 약속과 함께 족장전승을 버티는 두 기둥이 되었으며 이 두 약속 주제는 육경의 구원사와 연결된다. 땅 약속의 주제는 물론 그것이 육경의 구원사를 결론짓는 땅 정착에 의한 완전성취에로 연결되기 전에 이미 모세 이전의 족장유랑 설화 속에서 성취된 주제였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헤브론의 막벨라 묘지를 헷족과 교계(交計)하여 법적으로 사들였다는 창세기 23장의 보도는 그것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그들 족장들은 그들이 죽을 땐 이미 "나그네의 땅"인 가나안에서 결코 나그네로서 묻히지를 않고 자신들의 법적 소유지에 묻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이전에 이미 세겜, 벧엘, 브엘세바, 브니엘, 헤브론 등의 가나안 성소 제의의 창시자 또는 예배자로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은 그 제의지역(가나안의 영역)의 이스라엘의 소유권을 합법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약속의 땅과 조상들과의 관계가 이중적임을 지시하고 있다 하겠다. 즉 "본래의 족장전승에서는 그 약속의 성취가 가까운 미래에 성취될 것으로 말해졌으나" J와 E의 노력에 의하여 구원사적 개요 속에 삽입될 때 여호수아 지휘 아래의 마지막 성취에로 확대되었다 하겠다. 약속과 성취의 주제는 이제 민족형성사에 대한 대(大)구원사적 고백의 중심주제 및 구원사적 대단원의 결론이 된 것이다. 즉 야훼의 모든 약속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이루어졌다고 고백되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 열조들에게 맹세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야훼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할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야훼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 야훼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수 21 : 43-45) 이스라엘 형성사에 관한 신명기 사가의 이러한 결론은, 이스라엘 형성의 중심적 요인이란 어디까지나 가나안 점유를 신의 약속의 성취행위로써 고백하는 그들의 역사신앙이었음을 지시하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표현의 극치는 땅 약속의 성취를 전혀 신의 전쟁을 통한 성취로서 묘사하는 신명기적 묘사(수 21 : 44b)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거룩한 정복전, 땅분배, 그리고 온 이스라엘의 통일 등으로 표현되는 여호수아서의 신명기적 역사가가 땅점유에 관하여 묘사한 것들은 전혀 "기적"에 의한 신의 도움을 통해서 땅 약속이 성취된 것임을 지시해 준다(특히 E). 특히 여리고와 아이성 함락에 관한 표현들이나 "일당 천"(수 23 : 10)이라는 과장된 표현 등등이 모두 땅 정복이란 어디까지나 야훼의 행동에 의한 것임을 말해 준다. 즉 땅 점유는 어디까지나 신의 약속이 성취된 사건이다. 그러므로 야훼의 계명을 위반할 때는 "모든 불길한 일도" 이스라엘에게 임하실 수 있다는 경고(cf. 수 23장)가 동반되는 것도 신명기적 사가의 신학적 기조에서 볼 때 자연스럽다 하겠다. 이는 곧 신앙에 의한 역사해석 양식이며 이스라엘사를 구원사로 해석하는 한 양식이라 하겠다. 이러한 역사해석양식은 구원사적 역사상을 붙들어 주는 힘이요 이스라엘 형성의 중추적 구성요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이스라엘은 야훼의 구원사의 결실 약속과 성취에로 연결되는 일련의 야훼의 행위들은 이스라엘 역사신앙의 원신앙고백(Israel's original confession)이라고 할 수 있는 출애굽 사건을 야훼의 구원사건으로 고백하는 역사신앙고백 주위에 모여서 신의 약속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연속성 있는 야훼의 구원사상을 형성했고 또한 역사적 규정을 받았다. 즉 이 구원사의 핵은 어디까지나 "가장 초기의 그리고 동시에 가장 널리 유포되었던 고백문"에 나타나고 있는, 이른바, 출애굽 사건을 주도한 야훼의 구원행위에 관한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출애굽의 역사적 사건이 ― 그것을 B.C. 13C를 전후하여 팔레스틴을 풍미했던 사회학적 현상(cf. 하비루)으로 보든, 모세와 여호수아에 의한 일회적 제의사건으로 보든간에 ― 전혀 배타적인 야훼의 사건, 즉 신의 구원사건으로 고백되고 수세기의 전승과정 동안 이스라엘 역사신앙의 핵심이 되었다는 점이다. 출 14 : 13은, 이 출애굽 사건이란 어디까지나 "야훼의 구원"(yesh 'ath YHWH) 사건이라는 것을 성서 특유의 극적 묘사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라고 했다." 즉 출애굽 사건이 전혀 배타적으로 야훼의 행위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두려워 말라"(' l-tira' ) "가만히 서라"(h thy tsv ) "보라"(re' )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YHWH ii m l kh m) "가만히 있으라"(t .har sh n)라는 표현을 동원한다. 이스라엘은 이 출애굽 사건을 무기력하게 관망만 하고 있을 뿐이고 이 사건의 주역은 전적으로 "야훼"로써 나타난다. 이 사실은 아래 17절에서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라"라는 묘사를 통하여 신학적 해석의 보충을 받고 있다. 즉 이 사건을 통해서 영광받을 자는 오직 야훼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역사신앙이지 결코 객관적인 보도는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사건의 정확성이란 문제도 되지 않는다. 여기서의 중심문제는 제의를 통한 야훼의 구원행위와 그의 권능을 증언하는 일이다. 출애굽기 15장 마지막 절, "…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야훼를 경외하며 야훼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가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고백양식은 출 15장의 독소로기(doxologie)(註 114 참조)가 또한 그 뒷받침을 해준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바로 이스라엘 형성의 중심적 추진력이었다 하겠다. 이러한 사실은 곧 "갈대바다의 구원"을 그 핵으로 하는 출애굽 설화가 야훼 이름의 계시, 시내산 계시, 광야유랑의 주제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구원사적 역사상의 현실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된다. 그러므로 야훼의 증언이 그 중심적 과제라고 할 때, 야훼의 이름의 계시가 출애굽설화의 전면에 나온다는 것은 당연한 편집결과라 할 수 있겠는데, 그의 이름, "야훼"란 구약에서는 전혀 구원계시의 총체적 개념으로 나타날 뿐 철학적 존재론의 개념으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즉 출애굽기 3 : 14(' hy h ' sh r ' hy h)는 "나는 (너희를 위하여) 여기 있다"라는 상대적 개념(절대 자존자라는 절대적 개념으로가 아니라!)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야훼"라는 이름 그 자체는 이미 "구원의 상징"이었으며(시 54 : 3) 자신의 뜻을 계시하는 계시의 특수형태였다. 그러므로 시내산 계시(출 19장∼민 10장)가 출애굽 설화와 더불어 가지는 신학적 의의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시내산 설화의 본래적 중심주제인 신현현 주제와의 율법계시의 연결도 그의 이름의 계시에 관한 보도와 연결된 제 율법(열마디로 된 계명군, 계약, 율법, 제2의 율법) 등은 인간(생명)을 버리지 않고 그를 늘 새롭게 하시려는 야훼의 구원사적 의지를 계시하고 야훼가 역사의 유일한 주권자 되심을 선포(제 1계)하는 의의를 가진다 하겠다. 이러한 섭리는 매우 긴 전승사적 성장과정을 갖고 있는 광야유랑에 대한 역사해석에서도 잘 나타난다. 즉 광야유랑은 이스라엘의 구원사적 역사해석에 있어서 확고한 자리를 갖고 있다 하겠는데 ― 이 주제는 역사찬양시나 예언자적 역사해석의 독자적 구성요소가 되기도 했는데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장애로 나타나는 불모의 광야를 이스라엘이 통과한 것은 전적으로 동반(에스코트)과 보호, 그리고 인도(引導)를 통한 야훼의 구원사적 행위 때문이었다는 것이 히브리사가의 한 역사해석이었다. 특히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의한 인도, 만나와 메추라기에 의한 보존, 등의 주제는 광야통과를 야훼의 구원사적 행동으로 보는 신학적 착색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제와 예레미야 2 : 1-3의 광야주제는 서로 잘 상응하는 예라 하겠다. 그러나, 광야시대를 심판의 전형으로 보는 에스겔 20장의 가혹한 묘사를 연상케 하는 출 32장과 33장의 광야주제는 오히려 광야유랑이 이스라엘의 야훼 거부에 대한 야훼의 진노로써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육경 속의 J와 E의 광야유랑 해석은 오히려 이 둘 사이의 중용을 취하고 있는데 출애굽기 32 : 30-34와 33장은 "중재자", "희망", "야훼의 얼굴의 동행" 등을 삽입함으로써 심판을 구원으로 바꾸어 간다. 그러나 이러한 J, E보다 D는 한걸음 발전한 신학화를 보여준다. 즉 신 8장(cf. 29장)은 광야유랑과 인도란 이스라엘로 하여금 야훼의 뜻을 바르게 인식하여 그의 도를 지키게 하려는 교훈적 의도로써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들의 통일된 기조도 역시 약속의 땅 수여와 이스라엘 형성은 전혀 야훼의 인도로 표현되는 구원사적 행동에 의해서 이룩된 것이라고 증언하는 일이다. 이스라엘 형성은 전적으로 야훼의 구원사적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즉 "야훼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오히려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작으니라>!"(신 7 : 7) 이러한 신앙고백이 곧 12지파를 하나로 ― 야위즘의 공동체로 ― 묶는 동력이었다. 이와 같은 야훼의 주격 강조는 암픽티오니의 시대의 사사(士師)들의 가나안 정착운동에 대한 도식적 묘사 속에서도 명백하게 들어난다. 즉 "이스라엘의 범죄 → 야훼의 징계 → 이스라엘의 참회 → 야훼의 구원"이라는 도식적 구조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형성은 전혀 "야훼" 자신의 구원사적 행동의 결과였을 뿐이다. 3) 이스라엘의 기초 이미 우리는 이스라엘 형성의 중심적 요소를 야훼신앙에 의한 결속에서 찾아보았다. 즉 야훼의 구원사적 행적에 관한 신앙고백의 부단한 전승이 이스라엘 결속의 모체였다 하겠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러한 신앙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서 직면하게 된 새로운 상황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계약공동체를 통치하는 야훼의 통치가 이 상황속에서 이스라엘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대답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적 요청과 함께 이스라엘에서는 율법 전승과 율법양식을 "빌려오는" 작업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차용작업(借用作業)의 특징은 야훼종교의 정신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들 만을 도입하되 개작과 보충을 통하였다는 데 있다. 가령 이스라엘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다른 법들 가운데 나타나는 수족 절단의 형벌법이 배후로 숨어버리고 있는 계약의 책(출 21∼23장, cf. 출 24장)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식의 차용에 있어서도 이러한 경향과 특질은 나타나고 있는데 예컨대 인신희생제나 감관적(感官的) 풍요제, 신의 음식으로서의 희생제 등의 관념이 배후로 숨는 경향이나 더욱이 가나안 농경적 기원을 갖고 있는 고대의 여러 농경축제들에게 역사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연축제를 야훼의 전능한 행동을 축하하는 의식으로 바꾼 것 등이 그것을 말해 준다. 이스라엘의 제의는 결코 희생의식에 주요한 자리를 부여하지 아니했다. 거기에는 여러 종류의 종교축제가 베풀어졌으며 공적 예배의식이 행해졌다. 그리고 그 제의에서는 야훼의 역사적 행동이 반복적으로 현재화(설화의 낭송으로든 제의극으로든) 되었는데 그 중앙성소에는 법궤가 있었고 ― 이 법궤가 있는 성소가 이스라엘 계약공동체(암픽티오니)의 심장이었다 ― 거기서 계약법이 선포되고 계약을 갱신하는 의식(계약갱신제)이 지켜졌다(삿 21 : 19 ; 삼상 1 : 3, 21). 이스라엘의 결속은 이러한 암픽티오니의 중앙성소에서 전체부족이 공동의 역사신앙을 고백하고 그리고 계약법을 근거로 한 계약적 유대를 가짐으로써 이루어졌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여호수아 24장의 세겜 총회의식은 요셉의 집(베냐민과 라헬지파)과 다른 지파그룹(아마도 레아지파)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체결을 반영한다는 노트의 주장은 이를 지지한다 하겠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최근 멘덴홀과 베이엘린(W. Beyerlin) 등으로부터 제기된 바 헷 제국의 종주조약문(宗主條約文)과 비슷한 양식을 갖고 있는 구약의 십계명, 시내산 설화 이외의 것으로서의 여호수아 24장, 신명기 등등의 계약법이 갖고 있는 역사신학적 의의이다. 말하자면, "전문(preamble)-역사서문(historical prologue)-기본조약(basic stipulation)-세부규정(particular provision)-증인호출(invocation of the gods as witness)-축복과 저주 양식으로 된 재가(裁可)(sanctions as the curses and blessings formula)"로써 양식 분류될 수 있는 그 유형상의 유사성보다는 이스라엘이 차용한 그 계약법 속에 나타나는 그 신학적 의의에 이 논문에 관심이 있다. 그 신학적 의의는, 여호수아 24장의 구조형태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전문과 역사서문에 나타난 야훼의 역사의 주권에 대한 신앙고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여호수아 24장에 나타나는 계약의 주는, 계약을 맺기 전에, 여호수아 24 : 2d-13절의 "역사신앙고백"에서 먼저 그 역사적 주권을 확증받고 있으며 십계명에서도 계약의 기본요구를 말하기 전에 먼저 그 전문과 역사서문(출 20 : 2)에서 그 역사의 주권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종주조약의 모형을 빌려오되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신앙을 역사화했고 또한 역으로 세속역사를 신앙화하였다 하겠다. 여기서는 더 이상 종주가 종주국의 왕이 아니고 "야훼"이며(!!) 증인으로서의 타신 초청도 철저히 배격받고 있다. 말하자면 일반 세속양식이 신앙적 개조를 받았다 하겠다. 즉 종주의 절대 주권과 봉신(封臣)의 절대 복종은 야훼의 절대주권에 대한 이스라엘적 신앙에 잘 부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동등하지 않는 두 상대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계약, 즉 강자가 그 하속자에게 강요하는 형식의 계약양식은 이스라엘 계약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구약을 꿰뚫고 있는 중심사상인, 이른바,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왕국) 관념이 그 기선(機先)을 잡은 곳이 바로 여기다. 이스라엘 지파연맹의 조직은 그 자체가 야훼의 주권 아래 이루어진 신정체제 자체이다"라고 한 브라이트의 주장은 옳다. 바로 이러한 역사신앙, 그리고 야훼가 역사의 유일한 주라는 신앙고백(야훼의 역사화, 역사의 야훼신앙화)이 이스라엘 지파연맹의 구성요소였다(즉 그것은 결코 암픽티오니에서 발생진화한 신앙으로 볼 수는 없고, 오히려 그것을 유지하고 결속하게 하는 중심세력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계약의 구원사적 연결은 이스라엘 신학에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계약신앙과 계약법이 암픽티오니에 들어오므로(가데스-시내전승 참조) 곧 그것은 이스라엘 형성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이다. 결 론 육경의 정경적 구원사상에 그려진 이스라엘의 역사신앙은 역사의 주, 야훼에 대한 신앙고백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고 이 역사신앙이 곧 이스라엘 암픽티오니를 결속시키는 유일한 힘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다. 비록 육경 속에 그려진 구원사상이 비교적 후대의 문학적 소산이라고 하더라도 전승사적 배경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볼 때 우리의 판단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사적 신앙이 우리에게는 매우 배타적 민족주의의 색깔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야비스트의 신학적 예지는 이미 문학예언자들(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이사야 등등)의 세계주의적 역사의식을 능가하는 범우주적 역사의식을 고취시켜 주고 있는데 이른바 원역사의 첨가, 우주적 축복의 근원으로서 부름받는 아브라함의 소명, 발람의 예언 등등을 통한 이스라엘 존재의 세계사적 의의를 밝혀 주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이스라엘의 구원사가 세계사의 중심으로 들어와 있음과 인류사 전반을 구원사로 이해할 그 바탕을 제시해 주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실로, 이스라엘의 역사란 어디까지나 그들의 역사신앙이 창조해 간 역사였다. 역사해석이 없는 단순한 사건순환이라는 개념의 역사란 진정한 의미의 허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그의 역사를 창조하는 핵이란 전적으로 야훼를 역사의 주로 신앙고백하는 야위즘이었다. 그러므로 세속역사가는 "이스라엘이[主語] 애굽으로부터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갔다"라고 보도할 수밖에 없는 그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히브리 역사가는 전혀 "'야훼가'(主語)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내시고' 광야를 '통과케 하시고' 가나안을 '주셨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제(諸) 역사적 사건 행위들의 "주체"(동사의 주어)를 야훼에게로 돌리는 이른바 모든 세속 역사를 야훼 중심적 역사이념에 묶어서 민족전통을 구축하고 민족사를 확립시켜 세계사 속에 심으려는 역사해석적 노력이 우리에게는 별로 없었다. 이스라엘을 형성한 신비한 힘, 즉 야훼신앙을 역사화하고 역사를 야훼신앙화 하는 이른바, 신앙에 의한(J. dtr 등등의) 역사해석, 그것은 민족의식의 개발(開發)을 기대하는 모든 민족의 역사가에게 있어서 높은 귀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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