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高木乗 (다카기 쇼)
사주추명학 명리학회 회장, 신문기자, 도검 감정가, 시인
출생일자: 1879년(명치 12년) 양력 4월 20일 22시(해시) 출생
시 일 월 년 85 75 65 55 45 35 25 15 5
癸 癸 戊 己 己 庚 辛 壬 癸 甲 乙 丙 丁
亥 酉 辰 卯 未 申 酉 戌 亥 子 丑 寅 卯
1895년(17세) 부친 사망,
1919년(41세, 갑자대운 기미년) 장남이 사망함. 이후 차남도 사망.
1960년(82세) 아내 시즈 사망,
1965년(87세) 3월 16일 본인 사망.
高木乗 (다카기 쇼 - 약력)
미토시 내쯔미죠 가이시죠메에서 출생
시미즈 다가노리 또는 시인으로서 시미즈 깃손 이라는 펜네임을 갖고 있다.
가계)
시미즈고우기마쯔의 장남으로 출생
아버지 시미즈 고우기 1846년 9월 23일 출생 미토시 내쯔미쬬 가이시죠매의 시장. 후에 개척자가 되어 이바라기갱 오오아라이다치바나무라로 이사함.
어머니 시미즈마쯔 1847년 6월 19일 출생
다카기 쇼의 집안은 히타치 오타구의 출신으로 다이라가문의 일족이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경력)
1888년 11살에 橘村與澤(다치바나무라 요자와) 초등학교에 입학, 고등학교에 편입되었지만 가난하여 초등학교 2학년에 중퇴, 유년시절에 고생하였고, 그사이에 독학하여 중학교 중퇴한 그에게 학교는 도서관이었다.
1895년 개간지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만17세에 집은 누이에게(배다른 형제)주고 백부에게 이끌려 仙台、福島(센다이 후쿠시마)로 옮겼음.
1898년 상경하여 그때부터 일본화가 望月金鳳에게 四條流(사조류)를 배우고 동시에 俳句(하이구; 어떤 말짓기 같은 것이라 생각됨) 岩谷小波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899년 4월 高瀬真卿가 창설한 감화원(아동 의탁시설)에서 교부가 되어 감화원교사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감화원은 渋谷羽沢에 있다.
1901년 23세 시집(야인)을 仙台有千閣에서 출판, 이때부터 쓰기 시작한「橘村」(다치바나무라)의 호는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村(무라)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1903년 25세 國益新聞(岩谷松平社主)에 들어가 기자기 됨.
1908년 구「東京日々新聞. 기자가됨
1909년 시집『筑波紫』을 출판, 이외에 1,2의 소설집이 있다.
같은 해 10월 30일 삼남인 清水康教(시미즈야스노리)가 토쿄 시부야구에서 태어남.
1910년 東京 朝日新聞에「家庭訓話今日の歴史」을 연재, 후에 雪月花의 세번째 책으로 弘道館에서 발간 메이지 천황, 황태자전하에게 헌상한다.
1911년 史伝『兵部卿護良親王』을 쓰고 木村鷹太郎와 共著(공저)의 명을 빌리다.
1915년『刀剣辞典』을 편저, 도검가木阿弥光遜와 공저의 명을 빌리다.
1916년 「時事新報」의 기자가 됨
다카기 쇼가 점술에 빠지게 된 것은 관상의 대가 櫻井大路와의 만남이 원인이 되었다
신문기사로 무언가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도쿄 매일 신문에 올릴 수 없는지 편집부에 안을 내놓게 되고 그때 당시에 점술가의 특집을 기획하게 되어 점에는 手相・人相・家相・易・墨占い・算命術・水晶占い・九星気学・占星術( 수상. 가상. 역. 묵점. 산명술. 수정점. 구성기학. 점성술)등이 있고 각 점술들의 득의한 점술가의 기사를 매주 연재하게 되었다 .
그 기획기사를 다카기쇼가 맡게 되었다.
그 특집의 마지막은 인상의 대가 櫻井大路의 원고를 받으러 가는 길에 다카기 쇼가 櫻井大路에게 아무 생각 없이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앞으로 저는 의 인생은 어찌되는지요?>
마침 저녁 무렵 현관 앞에서 거울너머로 다카기쇼를 보며
<어두워 잘 보이진 않지만 당신은 1.2년 안에 자식이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신문기자도 그만둘 것이다> 라고 말했다
다카기쇼는 그 말을 듣고
<맞는 것도 팔괘, 안 맞는 것도 팔괘라고 잘도 말하네, 장난도 쉬어가며 해, 자식은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병 한번 안 걸렸다, 나의 일 또한 지금 모든 것이 너무 잘 되고 있고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엉뚱한 말도 적당히 하라> 고 화를 내고 나왔다.
그리고 1년 후 장남, 뒤이어 차남을 잃고, 신문사도 나왔다
그후 그는 인상을 연구하여, 『人相の秘鍵.(인상의 비건)이라는 책을 집필하고 있다.
다카기쇼는 인상학에도 대단한 실력이 쌓이게 되었지만 櫻井大路에게 예의에 어긋난다하여 手相은 밖으로 내보이지 않고 사주 추명을 간판으로 내걸게 되었다.
1919년 장남을 잃고, 그 일이 시발점이 되어 사주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태어난 신비 사주추명학)이란 책을 내놓게 되었다.
17세의 장남을 잃은 것 때문에 고민을 하고 다카기쇼는 정신적 편력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리스도교 여러 가지 종교서적 아동교육 철학 천리학 성명학 인상학 구성학 정신적, 종교적세계에 여러 가지 점술에 해결점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그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것은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21년에 잡지 (운의 세계)을 발행하고 그때까지 근무한 時事新報社을 퇴사하고 점술의 길로 전념하게 된다.
그는 사주 추명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전에 오행역, 매화심역, 가상, 五行易、梅花心易、家相등을 연구하여 昭和10年 이전에 몇 권의 책을 출판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関東大震災予言は「梅花心易」(간토 대지진 예언은 매화심역)에 의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