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평범한 이발사이셨지만... 평범한 일만을 하셨던 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대통령이 사는 동네의 이발사이셨기 때문이죠.
"사사오입이면 헌법도 고치는데, 뱃속에서 다섯달 넘으면 애를 낳아야지!"
청와대가 "경무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 경무대가 위치한 동네에 효자이발관이 있었다. 효자이발관은 성한모, 혹은 두부한모라고 불리우는 소심하지만 순박한 이발사가 주인으로, 그는 면도사겸 보조로 일하던 처녀 김민자를 유혹(?)해 덜컥 임신을 시켜버리는 대책없는 이발사였다. 경무대 지역 주민다운 자긍심으로 그는 나라가 하는 일이라면 항상 옳다고 믿었고, 사람들이 3.15부정선거라 비판해 마지않는 1960년 3월 15일 선거날에도 나라를 위해 투표용지를 먹어버리거나, 야산에 투표함을 묻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임신은 했지만 결혼은 않겠다는 민자를 설득한 것도, 나라의 정책이었던 "사사오입"으로 임신 다섯달이면 사람 한 명으로 봐야 하니까 무조건 낳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얼라만 나오면 니는 죽었데이~~~ 부정선거주범 니는 죽었데이??" 그리고 약 5개월 뒤 1960년 4월 19일 그는 아들 낙안을 얻는다. 1960년 4월 19일, 한모의 아내 민자의 진통이 격해지고, 성한모는 리어카에 아내를 싣고 병원으로 출발하는데... 왠걸, 거리에는 3.15 부정선거를 철회하라는 대규모 집회가 한창이다. 군인의 발포에 상처를 입은 학생들은 이발사용 흰 가운을 입은 한모를 의사로 착각하고, 어쩌다 영웅이 된 한모는 진통중인 민자를 태운 리어카에 애국청년들을 마저 태우고 병원으로 향한다. 성한모의 아들 낙안이가 태어난 이 날은 훗날 "4.19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이발관 앞으로 탱크가 한차례 지나간 후로는 "중고생 삭발령"의 조치가 내려져 이발관은 나날이 번창했다.
"각하의 용안에 흠집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시간은 흘러 1970년대, "사사오입"으로 운명이 결정되고, "4.19 혁명"의 현장에서 태어나, "5.16 군사 쿠데타"에 의한 정권이 벌어준 돈으로 기른 아들 낙안이도 초등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16년을 지켜온 효자이발관의 이발사 성한모의 인생은 어느 날 찾아온 청와대 경호실장 장혁수에 의해 전환기를 맞는다. 간첩 나온다길래 신고했더니, 그 간첩이 중앙정보부 직원이었을 줄이야... 속사정을 모르는 대통령은 성한모의 감시정신을 높이 사 "모범시민 표창장"을 하사한다.
그러나 자랑스러워하던 마음도 잠시,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청와대에 불려가, 대통령 각하의 머리를 깎는 청와대 이발사가 된다. 속도 모르는 동네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하며 밤낮으로 아부하지만, 대통령 각하의 머리를 깎으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더욱 꼬이기 시작한다. 경호실장 장혁수가 두 눈 부릅뜨고 있는 가운데 대통령 각하의 용안에 가위와 면도날을 들이대야 하니 좌불안석, 혹여 상처라도 낼라 진땀만 뻘뻘 흘리며, 눈치보기 일쑤고, 게다가 청와대 내 권력의 2인자 자리를 두고 경호실장 장혁수와 중앙정보부장 박종만의 팽팽한 대립 속에 성한모의 하루하루는 위태롭기 짝이 없다.
"야! 니네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청와대 이발사다, 이 새끼들아! 이 나쁜 놈들아..."
어느 날 밤. 청와대 뒤 북악산에 간첩이 잠입한다. 제 아무리 무서운 간첩이라 해도 생리적 욕구는 어쩔 수 없는 법, 갑작스런 설사병에 쭈그리고 앉아 변을 보던 간첩들은 마침 순찰을 돌던 군인에게 들켜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진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설사병을 간첩에 의해 전염된 불순한 병으로 규정한다. 일명 "마루구스" 병! 이에 설사만 했다 하면 동네사람들끼리도 서로 의심하여 고발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지는데... 하필 이런 때 성한모의 아들, 낙안이마저 줄줄 물똥을 싼다. 불안해진 성한모, 우리 아들은 간첩이 아니라며 낙안이를 제 손으로 경찰서에 데려가고, 간첩엔 애어른도 없다고, 어린 나이에 간첩 용의자가 되어버린 낙안은 중앙정보부 고문실로 끌려간다. 설상가상으로 이 기회에 성한모를 이용해 장혁수를 제거하고 권력을 독차지하려는 음모를 품은 박종만은 어린 낙안마저 고문하여 성한모 부자를 "마루구스" 병으로 검거하려 하는데...
과연 이발사 성한모와 아들 낙안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국영화 최초로 다뤄지는 폭압의 시대
흔히들 1960~70년대를 "폭압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이승만 정권의 오랜 부패가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절정에 달하자 국민의 분노는 4.19혁명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지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군인들에 의한 군사 쿠데타로 4.19 혁명의 열기는 단숨에 식어버렸다. 그리고,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한국 현대사에서 "폭압의 시대"로 기억되는 제 3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이러한 군부통치와 유신체제로 이루어진 "폭압의 정치"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살해사건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약 20년간 지속되었다.
<효자동 이발사>는 부조리한 정치적 사건들로 가득했던 한국의 1960~70년대를 평범하고 소심한 소시민이었던 "대통령의 이발사"의 눈을 통해 그려낸다. 영화를 비롯하여 문학과 방송의 주요한 소재로 빈번하게 다뤄진 소위 386세대로 대변되는 80년대와 달리, 70년대의 정치적 상황을 진솔하게 다룬 매체는 거의 전무했다. 이제까지 60~70년대를 시대배경으로 한 영화의 대부분은 시대와 생활상의 형식만을 빌려 향수를 자극하는 복고풍의 영화였거나 멜로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효자동 이발사>는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이 비일비재했던 격동의 시대를 권력의 주변부에 있었던 평범한 서민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이는 한국영화 소재적 측면에서 확장을 일궈냈다는 점뿐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관객들로 하여금 30년 전 폭압의 시대를 견뎌낸 평범한 우리들의 자화상을 진솔하게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배우의 만남, 송강호와 문소리 페이소스 넘치는 코믹한 연기로 관객과 평단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송강호는 명실공히 흥행성과 연기력을 갖춘 한국 최고의 배우이다. <반칙왕> <쉬리> <공동경비구역JSA> <살인의 추억> 등 그의 필모그래피가 증명하듯, 송강호의 대표작은 한국영화의 흥행역사를 새로 쓴 작품들일 뿐만 아니라, 영화사적으로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들일 정도로 한국영화계에서 배우 송강호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반면에 연극무대나 영화 조단역의 경험 없이 단번에 <박하사탕>의 히로인 "순임"으로 데뷔한 문소리는 <오아시스> <바람난 가족> 단 세편의 영화로 관객의 뇌리를 사로잡은 배우이다. 2002년 <오아시스>로 베니스국제영화제 신인배우상을 수상하고, 2003년에는 <바람난 가족>으로 2년 연속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 놀라운 성과를 일궈낸 문소리는 혼을 실은 듯한 치열한 연기로 관객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이처럼 완성도 높은 작품 안에서 탄탄한 연기로 관객의 신뢰와 사랑을 아낌없이 받아온 두 배우, 송강호와 문소리의 결합은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 대한 더 없는 신뢰와 기대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시대를 담아낸 가슴 뻐근한 코미디 한국영화 시장에서 코미디 장르는 가장 강세를 보이는 장르 중 하나이다. 조폭 코미디, 로맨틱 코미디, 복고풍 코미디, 휴먼코미디,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코미디 등 한국 코미디 영화는 다양한 소재와 장르적 변주를 통해 관객들의 꾸준한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다. <효자동 이발사>는 독재정권 내부의 권력 암투와 쿠데타 등 만만치 않은 무게감을 지닌 이야기를 코미디로 풀어낸다. 권력의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인 대통령 이발사의 눈을 통해 격변의 시기를 웃음과 감동으로 녹여낸 <효자동 이발사>는 지금까지의 여타 코미디 영화와는 차별화 된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완성도 높은 코미디 영화이다. 또한 높은 질적 수준을 담보하기 위해 미술, 세트, 의상, 소품 등에만 11억 5천 만원을 투입하는 등 규모감 있는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코미디 장르의 홍수 속에서 상업적 경쟁력과 완성도를 갖춘 <효자동 이발사>는 한국 코미디 영화의 범주를 한층 넓힐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