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올립니다. 퇴고과정이 너무 짧은 초고 수준의 글입니다. 이후 수정하겠습니다 ㅠ)
얼마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근 가장 재밌게 본 작품 중 하나인 ‘빅히어로’가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하는 것을 보았다. 감독은 ‘어릴 적 디즈니에 들어가 만화를 만들고 싶었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꿈을 이뤘습니다.’라고 말했다. 어찌 보면 성공한 사람들의 흔한 소감이었지만 그 말은 이상하게 날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디즈니는 어디인가? 애니메이션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는 궁극의 도달점이자 꿈의 궁전 같은 곳이다. 이 곳에 입사하고 싶다는 것은 아직 자신의 능력과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어린아이들이 용감하게 외치는 ‘우주 비행사’, ‘과학자’, ‘국가대표 축구선수’ 따위와 거의 동급의 장래희망으로서, 이런 최상급 장래희망의 특징은 고등학교만 넘어도 대부분 머리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정도를 이루었을 때 흔히 말하는 ‘성공한 인생’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줄 수 있을 것이며 이 감독도 그 부류에 속한다. 더 나아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고 유명한 시상식이 그를 그 ‘꿈의 궁전’ 내에서도 꿈을 이룬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어릴 때부터 지켜온 장래 희망을 성취할 뿐 아니라 그 분야 최고의 공인 평가 기관으로부터 실력을 인증 받는 것. 이보다 더한 성공은 내 기준에선 없을 것 같다.
나의 장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것을 보면 어릴 때의 장래희망은 전혀 인생의 지표가 되지 못한 것 같다. 나로서는 방금 언급한 감독 같은 사람들은 참으로 별종이다. 미숙한 나이에 세웠던 계획이 어떻게 한 번의 변경이나 취소도 없이 성인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통 어릴 때 했던 생각들은 유치하고 허황되다며 몇 년 뒤 좀 더 성숙해진 머리로 수정되고, 그 수정은 그보다 더 성숙해진 머리로 수정되는 이런 과정의 끊임없는 반복이 바로 인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들은 어릴 때부터 유치한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한데다가 미래까지 내다보았나 보다. 괴물들이다. 여하튼 나의 첫 번째 장래희망은 간호사였다. 5살인가 6살 때 쯤 장래희망을 발표하는 시간에 그려 냈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서비스 직렬 중에서도 최상급의 봉사 정신을 요하는 그런 직업을 갖기를 원했었다니, 23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 동일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짐작하건대 간호사들의 고충에 대해서 알았을 리는 없고 그 나잇대 여아답게 간호라는 행위가 갖는 여성스러운 느낌을 동경했던 것 같다(성인이 되면서 웬만한 남자 환자들보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간호사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10살 무렵의 장래희망은 ‘시인’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러우나 어릴 때는 글을 잘 쓴다는 소리를 제법 들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쓴다기보다는 또래보다 다소 빨리 어른처럼 글 쓰는 법을 익혔던 듯하다. 어찌됐든 나는 언어 쪽에 소질이 있다고 여겨졌으며 그것은 귀 얇은 어린아이의 장래희망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초등학생 치고는 흔한 장래희망이 아닌지라 장래희망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부끄러웠다. 더구나 가장 난감한 순간은 장래희망을 그려내라고 하는 때였다. 의사에겐 청진기, 교사에겐 교편처럼 대표적인 도구 하나만 그리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다른 직업들과 달리 시인에게는 대중적으로 널리 인식된 뚜렷한 이미지가 없었다. 적어도 초등학생의 경험 수준 내에서는 그러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이 되면 언제나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펜과 종이를 들고 나무 둥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곤 했다. 어린 아이의 눈에 시인이란 존재는 나무 둥치 등의 자연 속에 앉아 몽상에 잠겨 있다가 이따금 끄적거리곤 하는 한량같은 것이었나 보다. 정확히는 지금의 시인보다 벼슬과 명예를 버리고 산 속에 파묻힌 과거 선비들의 모습과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장래희망은 중학교 시절 만난 선생님으로 인해 한동안 잠정 보류되고 말았다. 그 선생님은 나의 재능을 칭찬해 주었으며 반 친구들 앞에서 내 시를 읽어 주었다. 그것은 물론 기쁜 일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선생님의 기대는 점점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누군가의 기대의 무게를 느끼면서도 의연하게 나아갈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 선생님은 글짓기 시간이 될 때마다 나의 글을 최우선적으로 반 아이들 앞에서 읽었다. 잘 쓴 글이든 졸작이든 상관없이 읽었다. 졸작인 경우에는 반 애들 앞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점점 글쓰기가 자연스럽게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회가 되는 대신 청중들의 심판을 준비하는 고행의 시간으로 변해갔고, 난 국어 시간이 다가오면 걱정을 넘어서 강렬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1년여 정도 정신적 고통을 겪던 내가 택한 방법은 일부러 쓰레기 같은 글만 써서 그녀의 기대치를 한없이 떨어뜨리고 그녀의 관심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글쓰기 시간이 되면 의도적으로 한 줄만 써서 내거나 유행가 가사를 베껴내는 등 끊임없이 불량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방법은 반년 내에 효과를 보았으며 그녀의 관심은 사람들의 기대와 칭찬을 즐길 수 있는 자신만만하고 글을 잘 썼던 아이에게로 넘어갔다. 그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문제는 그런 행동을 반복하다 보니 정말 글쓰기 능력이 퇴보하고 만 것이었다. 잠시 내게 반짝이는 듯했던 재능 비스무리한 것은 오랜 공백기를 거치면서 빛을 잃고 말았다.
고등학교 때의 내 장래희망은 기자였다. 한 마디로 미스테릭한 장래희망이다. 유치원 때야 자아관이라는 것 자체가 없으니 그랬었다 쳐도, 성인기를 한 걸음 앞두고 있는 시기에도 여전히 나의 적성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장래희망을 꿈꾸었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매우 희한하다. 나는 어떤 집단에 속해있든지 소식을 가장 늦게 전달 받았으며 그마저도 나한테까지 오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누구와 누가 사귄다는 시시콜콜한 소식에서부터 선배들의 시험 족보까지 종류를 막론하고 정보에 뒤처졌었다. 나는 필요한 것은 염치불구하고 취하고야 마는 필사적인 태도가 매우 부족한 것도 모자라 그런 사람들을 은근히 혐오하는 이상한 자존심까지 갖추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선비 행세를 홀로 하다가 모든 걸 놓치고 손해만 보았다. 이런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잠시나마 기자를 꿈꿨던 건지 궁금하다. 지금 짐작해 보건대 예체능에도 소질 없고 장사도 육체노동도 할 수 없고 그나마 펜대를 굴리는 것이 가장 나에게 맞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했으나, 중학교 국어시간의 트라우마로 인해 문학 분야는 기피하면서도 글쓰는 것을 업으로 삼을 수 있는 직업을 찾던 중 그 모든 조건들에 부합했던 것이 기자가 아니었나 싶다. 즉 뚜렷한 목표나 사명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싫은 조건들을 제외하고 남은 것을 선택하려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에서 결정된 장래희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입시 준비만큼 인생에서 괴로운 것은 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그 시기엔 직업으로 겪는 어려움 따위는 매우 하찮은 것이었기에, 일단 진로를 설정하고 해당하는 학과에 충족하도록 점수를 올려 이 지옥을 빨리 탈출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래서 그 당시엔 ‘신문 방송학과’로 제법 구체적으로 과를 정하고 정말 진학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수, 등록금, 거주지 등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그 장래희망은 (매우 감사하게도)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나의 점수표에 가장 근접했던 사범대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과 공부는 나에게 매우 스트레스를 주었다. 교육론이라고까지 이름 붙이기는 거창하나, 수업 기술이나 자료들을 떠나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이 그대로 묻어나 듣는 이들을 감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훌륭한 수업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그러나 앞 5분간은 동기부여를 하고 10분 째는 목표를 읽고 15분에는 학습활동을 하여야 한다는 식으로 틀을 짜는 그 과정이 나에겐 서글플 정도로 재미가 없었으며 원피스를 입고 나가 싱글벙글 웃으며 구연동화를 하는듯한 목소리로 수업 시연을 하는 모습은 광대처럼 느껴졌다. 한 마디로 나의 전공에서 어떤 학문적인 매력이나 지적인 충족감을 느낀 적이 없었으며 잘하고 좋아한다고 느꼈던 국어라는 과목 자체에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찌하여 나는 적성은 지독히도 찾지 못하면서 적성에 맞지 않는 것만 귀신같이 알아내 불행을 자초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대학교 4년도 모자라 임용고시를 준비했던 3년까지 ‘내가 진정 교사가 되고 싶은걸까’하는, 청소년기에 진작 끝냈어야 할 기초적인 고민을 해결도 하지 못하면서 시원하게 떠나버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방황 상태를 지속하다가 어찌어찌 공무원으로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한테 맞는 점은 잘 모르겠으나 맞지 않는 점만 귀신같이 찾아내면서’ 불만 많은 삶을 지속하고 있다.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고 다른 대안을 찾지도 못했다. 만족한다면 만족하고 일찍 퇴근해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노라면 행복할 때도 있다. 그러나 가끔 나의 직업을 장래희망으로 말하는 어린 친구들은 거의 없으며, 만약 그런 친구들이 있다면 꿈을 잃어버린 청소년의 표상이자 심각한 사회 문제의 단면으로 거론될 것이라 생각하니 서글프다. 결국 디즈니의 그 감독처럼 초등학교 때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물론 초등시절의 장래희망이자 내 두 번째 장래희망이었던 ‘시인’은 심각한 고려 없는 미숙하고 유치한 꿈이었지만, 글을 써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의 씨앗 만큼은 계속 가슴에 간직하고 싶다.
첫댓글 재미있게 읽었다. 한편으론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일까를 함께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했던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생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릅게 꿈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너는 아직 젊고 앞으로도 긴 여정이 남아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꿈을 실현해 가렴. 시인이 가져다주는 명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인의 깨달음, 시인이 바라보는 경이로운 세계가 진정 가치있는 것이지. 모든 문학을 통섭하는 근본 정신은 시정신이지. 항상 시를 많이 읽고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꿈이 무엇인지 모르고 산다. 어찌보면 그 꿈이라는 건 하늘에서 계시처럼 내려주는 것도 아니고, 머리 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살아가면서 자기가 만들어내고 찾아낸 것이 바로 진정한 자기 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