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비>, 아직도 아물지 않은 분단의 상처와 반목의 역사
나는 백두산 천지, 금강산 그리고 개성공단을 모두 다녀왔다. 2004년 경북대 18명 학생들을 인솔하고 연변의 용정과 연길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왔다. 용정중학교와 연북소학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 태권도, 음악, 컴퓨터 같은 실용적인 지식을 전했다. 봉사활동 말미에 1박 2일 예정으로 백두산 천지를 보고, 조중 (朝中) 국경마을 숭선을 다녀오기로 했다.
연길에서 백두산 가는 길은 제법 멀었다. 미인송(美人松)이 가로수처럼 나있는 길을 따라 승합버스가 하염없이 달리고 또 달린다. 출발할 때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고 굵은 빗줄기가 차창을 때린다. 이윽고 ‘장백산’이란 현판이 걸린 곳에 도착한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른다. 우리를 안내한 이는 연변대학 교수로 충청도 사투리를 썼다. 연변대학 조선족 교수들은 중국어에 능통하며, 방언이 섞인 한국어나 북한어투의 말을 쓴다. 경상도에서 공부한 사람은 경산도 사투리를, 전라도에서 공부한 이는 전라도 방언을 쓴다.
그이에 따르면,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으려면 운이 아주 좋거나, 공덕을 많이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날에는 포기하는 편이 낫다고 한다. 지프차로 올라가는 비용도 만만찮기 때문에 학생들도 천지 올라가기를 하나같이 꺼려하는 분위기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에 여러분이 포기하면 백두산 다시 오는 일은 힘들 거다. 가보자!”
학생들이 내뿜는 불만과 불평을 모른척하며 비 뿌리는 운무(雲霧)의 백두산 등정에 오른다. 이리 구불 저리 구부정한 길을 돌고 돌아서 백두산 정상 부근까지 도달한다. 그때 연변대 교수가 소리친다. “교수님, 천지가 열립니다! 뜁시다!” 100미터 남짓 달려 올라가니 천지를 덮고 있던 운무가 좌우로 갈라지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0분! 그 안에 사진 찍고 이곳저곳을 돌아보아야 한다. 학생들도 들뜬 표정으로 사진 찍기에 분망하다. 등소평도 세 번인가 들렀다가 끝내 천지의 장엄한 풍광을 보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연변대 교수는 “인솔자가 유덕해야 천지를 볼 수 있다”는 말을 연신 되풀이한다. ‘이건 정말 천운(天運)이야!’ 하고 나는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숭선으로 가는 길에 나타난 멧돼지 가족에 환호하고, 김일성 주석이 송어를 낚았다는 낚시터에 들르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재촉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만강 상류가 갈라놓은 북조선과 중국의 국경마을 숭선에 도착한다. 50여 미터나 될까, 두만강의 폭은 많이 좁았다. 중국인 하나가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고, 강 건너편 길에는 달구지가 한가로이 길을 가고 있었다.
부부가 앞자리에 앉아서 달구지를 몰고,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보이는 아이가 달구지 뒤쪽에서 두 발을 까딱거리며 앉아 있다. 잠시 뒤 경적을 울리며 군용트럭이 질주해온다. 너무도 새까만 얼굴의 어린 병사들을 태운 트럭이 자욱하게 먼지를 날리고 사라져간다. 달구지 형체는 보이지 않으나 워낭소리는 들린다. 이윽고 시야에 들어온 달구지가 저만치 멀어져 있다.
분단은 그런 모습으로 처음 내게 다가왔다. <강철비>를 보기 한참 전에 기록영화 <워낭소리>를 보다가 나는 두만강에서 보고 들었던 달구지와 워낭소리를 시나브로 떠올렸다. 그 소년은 이제 스무 살도 넘은 청년이 돼있을 터. 어디서 뭘 하고 살고 있을까, 그런 궁금증이 지금도 스멀스멀 생겨나곤 한다. <강철비>에도 엄철우의 어린 딸이 등장한다. 세월이 흐르면 그 아이도 두만강 소년처럼 어엿한 숙녀로 자라날 것이다.
영화 첫머리에 외교안보수석 곽철우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반도 분단에 관해 강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의 문제제기는 간명(簡明)하다. “전쟁을 일으킨 도이칠란트가 동서로 분단된 것처럼 일본이 분단돼야 했는데, 왜 우리가 분단돼야 했던가?!” 사실 한반도 분단과 고착화에는 이런 문제제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해결책 역시 모호하기 때문이다.
<강철비>는 천만관객을 동원한 <변호인>의 양우석 감독이 연출한 두 번째 장편영화다. 2011년에 양우석은 포털사이트 ‘다음’에 <스틸 레인 Steel Rain>이라는 웹툰을 연재한다. 만화가 ‘제피가루’ 김태건이 그림을 그리고, 양우석이 글을 맡은 웹툰 <스틸 레인>은 조회기록 천만을 넘긴다. 2013년 말에 개봉되어 2014년 초까지 상영된 <변호인>이 1137만을 동원했기에 개봉일자는 <변호인>이 빠르지만, 영화기획은 <강철비>가 더 빨랐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변호인>은 열혈 변호사 노무현의 젊은 날을 돌이키면서 그가 어떤 인생행로를 살아왔는지 조명한다. 수구정권과 탐욕스러운 권력자와 수구집단의 집요한 공격과 모욕으로 인해 세상을 버려야했던 노무현의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영화 <변호인>. 그것이 천만관객을 불러왔다는 것은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점철된 수구권력과 정당 및 최고 권력자들의 부정과 불의, 오만과 독선, 야만과 탐욕을 반증하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양우석은 북한의 김정은과 미국의 트럼프가 주고받는 아슬아슬한 전쟁담화가 한창이던 시점에 <강철비>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강철비>라는 제목은 1991년 미국과 이라크가 맞붙은 걸프전에서 미국이 써먹은 다연장 로켓포에서 발사하는 로켓포탄에서 따왔다. 집속탄(集束彈)이 폭발하면서 수만 발의 강철탄환이 흩뿌려지는 까닭에 '강철비'라 불린다. ‘스틸 레인’은 살상반경이 너무 커서 세계 140개국 이상이 사용 금지협약을 맺은 야만적인 대량살상 무기다.
이런 점에서 양우석은 세계최강의 군사대국이자 제국주의 미국의 노골적인 야만성을 제목에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양우석의 말을 들어보자.
“남과 북의 현재적인 정황(情況)에 우리가 효율적으로 대비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무서운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중의적(中意的)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북한에 예기치 못한 정변(政變)이 발생하여 북한 1호가 중상을 입고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이송된다. 그를 둘러싼 남북한, 중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대응을 다각도로 접근한 영화가 <강철비>다.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지점을 들여다보자.
우선, <강철비>는 양우석의 극대화된, 하지만 현실감 있는 상상력의 소산(所産)이다. 영화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국가 북한의 권력체계가 언제나 견고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북한인민의 피땀으로 개발된 ‘핵무기’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북한군부 실력자의 문제제기가 여기 추가된다. 그 어려웠다던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강성대국과 핵개발의 최종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군부실세의 문제제기.
북한에 쿠데타가 발생하여 군부실세 리태한이 권력을 장악하고 남한에 정전협정폐기와 선전포고를 감행한다. 그로 인해 권력이양을 준비하던 현임 대통령과 후임 대통령의 분열과 대립이 발생한다. 임기만료를 목전에 둔 대통령은 일전불사(一戰不辭)를 외치고, 차기 대통령은 전쟁불가를 주장한다. 이참에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북한을 궤멸시킴으로써 민족사에 빛나는 이름을 새기려는 보수 대통령. 다수국민의 안위를 최우선적으로 걱정하면서 전쟁은 절대 없어야 한다는 역사의식으로 무장된 진보 당선자. 이런 갈등과 암투가 박진감 넘치게 진행된다.
두 번째, <강철비>는 한반도 남단(南端)에 살고 있는 우리는 반도가 아니라 섬에 살고 있음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분단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반도의 북쪽과 대륙에 대한 최소한도의 앎과 상상력을 상실한 채 절름발이로 살아왔다. 파주의 산부인과 의사 권숙정은 112에 신고하면서 북한 1호를 ‘북한 대통령’이라 부른다. 남한의 최고 지식인 계층에 속하는 인텔리가 가지고 있는 대북한 지식정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서울 왕십리에서 북한 개성공단 입구까지 대형버스로 50분 남짓 걸린다. 그렇다면 파주에서 그곳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대다수 한국인들은 그 정도 거리에 인구 2300만을 가진 또 다른 분단국가가 존재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장면에서 관객은 새삼 전율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북한이 있는 거야?!” 그렇다면 우리가 250킬로미터 길이의 철책으로 가로막힌 섬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세 번째, 예기치 못한 사태를 바라보는 미국과 중국의 관점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미국 국무부는 골칫거리이자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 온 북한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려는 한국의 보수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고무(鼓舞)한다. 미국은 핵무기로 북한을 선제 타격함으로써 초강대국의 위상을 더욱 높이고, 아시아 태평양의 맹주자리를 확고하게 다지고자 한다. 그 와중에도 미국은 자국민을 보호하고, 안전지대인 일본으로 이송하려는 계획을 실행한다.
영화에 나오는 ‘작계5027’이 새삼스럽다. ‘작계5027’은 한미연합군이 북한의 선제공격 같은 전시상황을 대비하여 만들었다 한다. 그러나 작전권은 미태평양사령부에게 귀속돼 있다. 한국 군통수권자의 의지와 권한 밖에 존재하는 것이 ‘작계5027’이다. 언젠가 전시작전통제권이 환수되고 한미연합사령부가 사라지면 ‘작전계획5027’ 역시 폐기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중국을 대표하는 고위인사 리선생은 조선족이다. 곽철우가 그 점을 지적하자 그는 정색(正色)하며 “나는 어디까지나 중국인이오!”라고 단언한다. 조선족 출신이기는 하지만, 자신은 오직 중국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거의 모든 조선족은 리선생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말을 쓰지만 언제나 중국인임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외교안보수석에게 스치듯 말한다. “막을 수만 있다면 이 전쟁, 막으시라요!”
중국의 1차적인 목표는 자국의 방위와 안전이다.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에 그들은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북한에 군사정변 같은 특수상황이 발생하여 김정은 권력이 붕괴되면 그들은 대동강과 원산만 이북지역의 통제권을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른바 ‘나당연합군’의 역할이 완전히 끝난 668년부터 676년까지 신라가 홀로 감내해야 했던 대당전쟁(對唐戰爭)의 결과로 획정(劃定)된 두 나라 국경선을 생각해보시라.
네 번째, 분단장사치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에서 제일 가슴 서늘한 대목을 꼽으라면 아마도 곽철우가 엄철우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장면일 것이다.
“분단국가 국민은 분단 자체보다 정치적 이득(利得)을 위해 분단을 이용하는 인간들 때문에 더 고통 받는 거야.”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북한의 남침위협과 간첩과 선전선동 책략과 핵위협과 전쟁 가능성을 들어왔다. 선거철이면 예외 없이 북한을 이용해 먹으려는 책동이 기승(氣勝)을 부렸다. 영화 <1987>의 박처원이나 장세동 같은 자들의 권모술수는 아주 오래된 기만술책이자 야권인사 박멸책이다. 툭하면 떠들어대는 ‘종북세력’ 내지 ‘빨갱이’라는 말이 얼마나 오랜 세월 이 나라의 건강한 진보인사들을 투옥과 고문과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 우리는 낱낱이 기억한다.
안보장사치들이 더 이상 이 평화의 나라 대한민국의 정치판에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도록 영구 추방해야 한다. 최소한도의 민족의식도 없는 파렴치(破廉恥)한 독선과 위선, 탐욕과 권력욕으로 무장한 자들을 영원히 민족사와 통일의 길에서 제명(除名)해야 한다. 툭하면 일전불사를 외치는 장사치들이야말로 우리의 안보와 평화를 좀먹는 독버섯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들을 역사에서 축출함으로써 우리 어린것들에게 전쟁의 참화(慘禍)라는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하는 일이 우리의 과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