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상이해-21. 라마끄리슈나와 비베카난다
스리 라마끄리슈나는 박띠 마르거 안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는 후에 니르군 브라흐만 속으로 완전히 흡수되는 아드바이타의 방법을 통달했다.
힌두교의 종교적 경험에 전반적으로 참여한 그는 이슬람교로 눈을 돌렸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을 보고 그분과의 연합을 경험했을 때 기독교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리스도는 의식을 잃고 사뷔깔쁘 사마디 안으로 완전히 흡수한 라마끄리슈나와 결합했다.
사뷔깔쁘 사마디 안에서 그는 브라흐만과의 연합을 그 속성들과 함께 깨닫게 되었다.
이 경험 후에 라아끄리슈나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었다는
확고한 확신 가운데 남아있었다.
이 경험의 결과로서 라마끄리슈나는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그의 제자 비베카난다는 이에 열정적으로 빠져들었으며 인도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그는 케샵 쩐드라 센과 같은 모더니스트들과 수천 명의 정통 힌두교도들의 헌신을 얻었다.
그는 1886년 50세로 죽기까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자신의 깨달음을 입증하는 일에 헌신했다.
라마끄리슈나의 계승자인 스와미 비베카난다는 여러 면에서 자신의 스승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는 1884년에 캘커타대학교를 졸업했고, 당시 물질주의의 많은 부분을 흡수했다.
비베카난다는 라마끄리슈나 제자들 무리의 리더로서 그를 계승할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그는 라마끄리슈나를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간주하고 기독교의 방법들과 용어를 차용했다.
그는 라마끄리슈나를 신성한 화신 중의 으뜸이라고 지칭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베드로나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했던 일을 라마끄리슈나에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훌륭한 연설가이자 빼어난 매력을 가진 비베카난다는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회의(World Parliament of Religions)에 나타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의 연설의 주제는 인도가 전 세계에 대해 무한한 가치를 지닌 원칙 즉 모든 종교를 화합시키는 복음을 발견했으며
자신은 서구에서 그 복음을 받을 준비된 청중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인도로 돌아온 그는 1897년에 라마끄리슈나 선교회(Ramakrishna Mission)를 설립했다.
그 선교회는 라마끄리슈나의 삶과 가르침을 중심에 두고 모든 종교와 친밀한 교제를 원했다.
그 구성원들은 자신의 신앙이 하나의 영원한 종교로부터 다양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인식했다.
비베카난다와 그의 계승자들은 기독교를 베단타적인 틀과 용어로 밀어 넣으려고 시도했다.
그 결과 센의 저작물들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탐구하고 이용할 있는 다양한 사고의 길을 열어준 반면,
비베카난다의 글은 점점 더 힌두교로 깊이 빠져들도록 이끌 뿐이었다.
비베카난다는 기독교가 아드바이타의 고귀한 탁월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지속해서 기독교를 자신의 사고 패턴에 일치시키고자 노력을 했다.
그를 따른 자들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마하트마 간디, 스리 오로빈도, 라다크리슈난 이었다.
실제로 비베카난다는 자신을 라마끄리슈나와 브라흐마 사마즈의 후계자로 여겼지만,
센의 진정한 정신적 계승자는 그의 전기 작가 모줌다르나 비베카난다가 아닌 브라흐마 반답이었다.
비베카난다는 어떤 창조도 있을 수 없고, 무로부터 존재를 가져온 인격적 하나님을 부정한다.
세상은 신으로부터 진화된 것이며 창조의 교리는 신의 불변성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트만과 영혼이 창조된 것이라면 이는 반드시 소멸해야 하며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아트만과 지고의 아트만이 하나라는 아드바이타의 관념은 창조교리와 화해할 수 없었다.
그는 죄에 대한 기독교의 개념에 대해서는 거의 공감을 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동포들에게 완전한 도덕적 지위로 올라갈 것을 권고했다.
이런 낙관론은 죄의 실상을 부정하게 했고 죄는 마야의 환각을 일으키는 무지와 약함이었다.
<인도기독교사상>에서 (로빈 보이드 저, 임한중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