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인천(仁川)은 경기도 중서부 지역인 경기만에 돌출한 반도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미추홀(彌鄒忽) 또는 매소홀(買召忽)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소성(邵城)으로 개칭하였고, 율진군(栗津郡: 始興)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수주(樹州)에 속하였으며, 숙종 때 경원군(慶源郡), 인종 때 인주(仁州), 1390년(공양왕 2)에 경원부(慶源府)로 계속 승격되었다. 1392년(태조 1) 인주로 환원하였고, 1413년(태종 13)에 인천군(仁川郡)이 되었으며 1460년(세조 6)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으나 숙종 때는 현으로 강등하였다가, 1698년(숙종 24) 다시 환원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인천부가 되어 인천군 등 12개군을 관할했으나, 1896년 도제 실시로 경기도 인천부가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인천의 관할구역이 구 제물포를 중심으로 한 인천항의 신시가지로 축소되었고 구(舊) 인천읍과 부평이 통합되어 부천군(富川郡)이 되었다. 1949년 인천시(仁川市)로 개칭되고 1963년 부천군(副川郡) 작약도를 편입하였으며 1968년부터 구제가 실시되었다. 1981년 7월 1일 직할시로 승격, 경기도에서 분리 독립하였고, 1995년 광역시로 개편되었다.
성씨의 역사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시조 이허겸(李許謙)은 고려 현종 조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주국(上柱國) 소성현개국후(邵城縣開國侯)에 올랐다. 또한 소성현에 식읍 1천 5백호를 하사받았는데, 그곳이 현재의 인천이며 이후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며 관향으로 삼았다.
인천이씨의 기원은 김해허씨(金海許氏)까지 연결된다.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아들로서 모후(母后)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가 된 인물의 그 후손인 아찬(阿湌) 허기(許奇)가 신라 경덕왕 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 안록산의 난 때 현종(玄宗)을 호위한 공으로 이씨(李氏) 성을 사성(賜性) 받았다. 시조 이허겸은 바로 허기의 10세손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천이씨와 김해허씨의 후손인 양천허씨 족보를 합해 생각하면 허기의 후손으로 허선문(許宣文: 양천허씨의 시조), 허사문(許士文: 태인허씨 시조로 허선문의 아우로 추측, 인천이씨의 족보에는 허준으로 나타남)이 있었는데, 허사문은 수로왕비 보주태후의 30세손으로 태조 왕건의 딸과 결혼하여 허즙(許楫: 집이라고도 읽음)과 허도(許棹: 李許謙)을 낳았다. 형인 허즙은 태인허씨를 잇고 동생인 허도는 인천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분적종 및 분파
양천허씨에서 태인허씨로 분리되었으며, 인천이씨는 태인허씨에서 분리된 것으로 나타난다.
주요 세거지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충청북도 보은군 삼승면 달산리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 형산리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벽교리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집정리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면 동두리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
대구광역시 동구 서변동
대구광역시 동구 연경동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
경상남도 함안군 군복면 명관동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하신리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운곡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인천이씨는 21,448가구 총 68,628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