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명청시대에도 관학은 여전히 성리학이었다. 다만 과거가 장기화되고 명청시대의 급격한 인구 증가로 경쟁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는 양식이 완전히 고정되었는데 이를 팔고문(八股文)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제국의 이념은 한층 통일되었고 신사 계층이 확고해졌으나, 과거의 형식화를 불러오는 폐해를 낳았다.
명 후기에는 사회 혼란이 심해지면서 각지에서 자체적인 개혁론이 일어나는데, 왕양명으로 알려진 왕수인이 특히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왕수인은 향약과 십가패법 보급을 통해 혼란스러워진 사회에 대한 통제와 질서의 회복을 꾀하였다. 그는 심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양명학으로도 통칭되는데, 이는 왕수인의 이름에서 따온 물건으로, 주자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은 주자학과 동일한 맥락하에 이름지어진 것이다.
양명학은 지행합일, 심즉리설 등을 주요 사상으로 삼았으며, 그에 따르면, 누구나 마음 안에 세상의 이치가 있음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려 노력하면 성인과 군자의 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기존의 성리학과 별 차이가 없다. 기존의 성리학 역시 사람 안에는 리, 즉 세상의 이치가 있음을 설파했기 때문이다. 양명학과 주자학의 차이라면 주자학은 리를 형이상으로 치고 기, 그러니까 대강 뭉뚱그려 말하면 사람의 기질이나 마음을 형이하로 간주했다. 이 형이상과 형이하의 사이에 선악의 가치 판단이 들어가는데, 형이상 쪽은 순전한 선이며, 형이하는 선일 수도 있고, 선이 아닐 수도 있다. 즉 재언하면, 리는 형이상학적인 이치로 절대선이며 개개인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다. 사람이 악하고 방종해지는 이유는 리라는 불변의 보석이 진흙 속에 묻힌 것처럼 형이하학적이고 동요되기 쉬운 기질이나 마음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선해지고 현명해지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내재된 리를 밝혀내야 한다.
주자는 이를 위한 수련방법으로 격물치지를 천명했다. 격물, 사물의 이치를 궁리해서, 치지, 깨달음에 다다른다는 얘기이다.
왜 이게 가능한가? 주자에게 있어 리라는 것은 절대선이자 불변의 형이상적 존재로, 사람뿐 아니라 온갖 사물에 다 깃들어 있는 일종의 절대이치이기 때문이다. 리가 나무에 깃들어 나무의 리가 발현되어 나무라는 실재 사물, 그러니까 기로 형성이 되고, 기왓장의 리는 기왓장에 깃들어 기왓장이라는 실재 사물이 나타나는 원리이며,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리가 깃들어 하나의 인간 개체가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 리라는 건 조약돌에 깃들어 있는 리도, 풀때기에 깃들어 있는 리도, 인간에게 깃들어 있는 리도 다 똑같은 리다. 모든 사물에 깃든 리가 똑같지만 사물이 제각기 다른 이유는 그 리가 형이하학의 기로. 구체적인 사물로 발현되는 방식 또한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즉 각각의 사물에 깃들어 있는 리는 모두 동일하다. 여러 사물들에 차이가 있는 건 리가 발현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종류라 할지라도 개체마다 성격에 차이가 있는 건 그 개체마다의 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리는 천지만물에 깃들어 있으므로 학문을 이루기 위해 하나의 사물을 깊이 살펴서, 그러니까 격물함으로, 그 사물에 깃들어 있는 리를 파악한다. 한 사물의 리를 파악함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앞마당의 대나무의 리를 파악하고, 하늘에 떠가는 구름의 리를 파악하고, 하여튼 이런저런 리를 다 파악하면 어느새 치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 때 결코 서두르면 될 것도 안 되고, 될 때까지 차근차근 모든 사물의 리를 하나하나 파악해야 된다!
왕양명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거 따라하다가 뒤지겠다. 내가 우리집 앞마당의 대나무를 몇 달 몇 년을 보고 있었는데 리가 파악되기는커녕 머리 아프고 우울증 와서 뒤질 뻔했거든?
주자의 성즉리를 왕양명의 심즉리와 대비시켜 볼 때 그 요지는, 리, 그러니까 하늘의 이치는 형이상학적인 성이며 형이하학적이고 갈대와 같은 우리의 마음과는 다른 물건이란 얘기다. 반면 왕양명은 그냥 우리 마음인 심이 즉 하늘의 이치인 리이니 양지(良知)하기만,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을 그것을 올바르게 알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치양지(致良知), 양지에 다다름이다.
그 수련법은 다르나, 똑같이 마음 속에 그 이치가 구비되어 있다는 점에 관해선 둘이 같아 보일지 모른다. 사실 크게 보면 별 차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세히 구별해 보면, 주자는 우리의 마음을 기로 여기고 절대선이자 이치라 할 수 있는 리와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 마음 속에 또 내재되어 있는 성을 리로 여기고 구체적 현상인 마음 자체에 대해선 경계했다. 왕양명은 구체적 사물인 기가 있다면 그 이치인 리가 없을 수는 없지만 구체적 사물인 기 없이는 이치인 리가 나타날 길이 없으니 리가 형이상의 세계에 고고하게 실존한다는 건 뜬구름 잡는 얘기이고 사실상 기와 리는 다를 바가 없으며 그러므로 기의 발현인 우리의 마음이 곧 리라 할 수 있다. 또한 리라 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을 제쳐놓고 외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해 봤자 우리의 마음과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의 외물이란 것도 뜬구름 잡는 얘기다.
왕양명은 제자들에게도 항상 외물을 살피는 것과 같은 개수작은 관두고 니 마음이 곧 리니까 그것을 잘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설파했다. 즉 치지, 먼저 깨닫고 나서 격물하라고 했는데 격물은 주자의 해석과 달리 했다. 주자는 격물을 사물을 바라보고 연구하라는 뜻으로 해석했으나 왕양명은 격물의 격자를 바르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물자를 사물이 아니라 활동, 사건 등으로 해석하였으니 간단히 말하면 일 잘하라는 뜻이다. 즉 왕양명이 논한 치지격물은 격물치지, 거경궁리나 독서 등을 중시하는 성리학과는 달리 수행자에게 그 행동을 촉구하는 바가 있다.
여기서 성리학과 양명학의 신분관이 차이가 생긴다. 성리학의 격물치지와 성즉리의 실행방법으로 선지후행(先知後行)을 내놓았다. 선지후행 자체는 도덕적으로 행동하기에 앞서 도덕상의 사리를 완전히 알아야만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결론은 도덕(≒정치)의 주체가 성리학을 배우는 귀족계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양명학은 심즉리와 치양지의 실행방법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들었다. 성리학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의 주신 본성(혹은 천명)이 리가 아니라, 마음이 곧 리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행동을 함에 앞서서 도덕을 배울 필요는 없고, 행위는 양지를 실현시키는 존재로만 보는 것이다. 결국엔 도덕의 주체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다는 것.
결국엔 양명학은 신분제의 붕괴에 기여했다는 의미를 가졌다. 그 후엔 급진 세력과 온건 세력으로 나누어져 사회상에 대한 담론을 논하고 서민 계층에게까지 스며드는 등 명 후기 번성하였으나 명의 멸망 이후에는 쇠퇴하였다.
명나라 멸망 이후 양명학이 쇠퇴한 것은 양명학이라는 이단 학문이 퍼진 것이 명나라의 약체화를 불러왔다는 해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양명학은 말하자면 어느정도 인기를 얻은 일종의 이단이었던 셈이었는데, 이는 심학이 흔히 양명학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이 깊다. 성리학에서는 정호, 정이 형제나 주돈이 등 주희 이전의 고명한 사상가들도 많았으며, 불교가 위태롭고 유교가 흥성하려는 시절에 나타난 성리학과 큰 상관이 없는 유학자들도 재빨리 성리학의 계보에 갖다 붙였다. 주자도 당대 자신과 대립하던 심학 계열의 거두 육상산이 죽자 그를 조문하고 나서 고자가 죽었다면서 강렬한 오럴 어택을 가했다. 더구나 왕양명의 후계자들 역시 사상적으로는 변변치가 못해 불교나 도교의 논설을 끌어다 쓰거나 유불도 일치점 따위의 학설을 논했으니 당시엔 핫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이단이란 공격을 받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왕양명의 학문적 업적 역시 주자에 비해 밀렸다. 주자는 당시까지의 유교사상을 거의 집대성해서 자신의 철학사상을 이루었으며 온갖 경전에 대한 주석을 다는 등 업적이 다대했으나 왕양명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청에서 양명학자가 어느정도 관리로 뽑혔지만 주로 성리학자가 뽑혔으며, 그 양명학도 고증학에 밀려 쇠퇴하였다.
청 대에는 정부에서 문자옥 등으로 유학자들을 탄압하고 정치에 대한 담론을 가로막으면서 자유로운 학설 연구가 위축되자 고대 경전을 다시 연구하여 고증하는 학문이 발달하게 된다. 극단적이 되면, 고대의 기록을 깡그리 부정해버리는 의고학파로 이어지게 된다. 양명학이 논리적인 측면에서 성리학을 공격했다면, 고증학은 더욱 근본적인 면에서 성리학의 각을 떳다. 간단히 말하면 "너네들이 공자의 말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데, 공자가 정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기나 할까?"
이기론의 성리학과 심즉리설의 양명학의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면에 집착한다는 점을 공격하며, 고전을 꼼꼼이 연구하여 실사구시와 경세치용를 구현하고자 한 학문이다. 실사구시, 경세치용이라는 측면은 조선 후기 실학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근기학파는 경세치용을 기치로 내세워 많은 현실 개혁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고전의 철저한 검증이라는 측면은 고전의 검증에만 매달릴 경우 현실과는 동떨어진다는 모순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청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문제점이 부각된다. 이것은 고증학이 실용성을 구현하려 했다는 데에 반해, 한편으론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지적이 공존하는 이유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국이 유학을 관학 삼은지 2000년이 넘었고 그 기간 동안 닦아진 유교의 헤게모니가 보통 공고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서 정책을 펴거나 사상을 주장하려면 옛 성인의 어록에서 그 근거를 채집할 수밖에 없었기에 실사구시나 경세치용을 주장하면서도 성리학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결국 주자보다 끗발 좋은 성현의 말씀을 찾아 옛 경전과 경전의 업데이트 기록을 뒤적거릴 수밖에 없고 그러자니 또 현실과는 자연히 멀어지는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청 후기에는 드디어 유학의 마지막 흐름이라 할 수 있는 공양학이 등장했다. 청 대의 고증학이 형식에 치우치며 고증에만 치빠져 현실과 동떨어지자 이를 비판하며 등장했으나, 공양학이 등장하게 된 가장 커다란 계기는 서양 오랑캐들의 침공일 것이다. 이제껏 중국이 수많은 오랑캐들의 침략을 받았고, 현재 청 왕조도 오랑캐 왕조고, 오랑캐가 힘이 강하다면 질 수도 있다. 이제까지와는 달랐던 게, 지금까지는 설사 창칼로는 지더라도 정신과 기술 문물로 미개한 오랑캐들을 압도한 이후 다시 새로운 정신 승리 체계를 짜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서양 오랑캐들은 기술문명, 기초과학, 사회문화, 정신사상, 군사력 등 모든 방면에서 중화의 그것을 압도, 되려 중국인들이 모든 방면에서 뒤떨어진 오랑캐취급을 받는 초유의 사태에 이르렀다.
세상 모든 것의 근본이 이와 기라는 성리학이 케케묵고 그릇되었단 건 이제 삼척동자도 알 지경에 다다랐다.이와 기는 양성자와 중성자, 하다못해 원자와 분자 정도는 되나요? 이에 공양학파는 성리학과 같은 기존 학설들을 과감하고도 당연하게 거부한 후, 유교의 뿌리인 공자의 흔적을 더듬어 '춘추공양전'을 더듬어냈다. 그들은 춘추공양전의 해석을 중심으로 학설을 수립, 발전 사관을 제시하여 변법자강 운동 당시 캉 유웨이와 량치차오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 같은 변혁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공양학파의 시절까지는 유교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햇던 것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유교는 그 이상의 사회변혁을 감당해낼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 공양학자들이 낡은 도구를 어떻게든 재활용해 보려고 이리저리 재 보고 있는 사이, 서양 오랑캐들은 공양학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더욱 격렬하고고, 더욱 빠르게 앞으로 앞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나갔다. 이는 과학기술뿐 아니라 정신문명에도 해당하는데, 공산혁명이 그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결국 젊은 시절 공양학파였던 캉유웨이나 량치차오 같은 거목들마저 유교의 그늘 밑을 벗어나게 되면서, 길고 길었던 유교의 역사가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공양학 일파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격변의 시대를 겪고 있던 조선에게도 지침이 되었다. 동도서기론이니 뭐니가 이 계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