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검역을 마친 소들이 우암포 뱃머리에 정박해 있는 범선에 실리고 있는 광경. 농림축산검역본부 제공
- 일제 가축전용 화물선 투입 - 1939년엔 5만여 마리 반출 - 매립사업으로 바위 사라져 - 해방 후 귀환동포 주거지로
부산항 바닷가에는 미국의 소설가 너대니얼 호손의 단편소설인 '큰 바위 얼굴'에 못지않은 하나의 바위 얼굴이 있었다. 비록 사람의 얼굴이 아닌 동물이었지만 지명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오래전부터 우리 농가에서 가족처럼 지내왔던 소의 얼굴이 그 주인공이다. 이러한 바위 형상을 두고 사람들은 우암(牛岩)이라고 불렀고, 우암이 자리했던 포구를 우암포라 했다. 소설 속 주인공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일생의 스승으로 삼아 가슴에 품고 동경해 왔듯이 '소 바위 얼굴'의 우암포는 소를 포구 속에 품고서 부산항 수출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일찍이 중국과 일본은 우리나라 소의 우수성을 알고 수입해 갔다. 중국과는 17세기 중반부터 소를 거래했는데, 그때는 농기구인 쟁기와 함께 수출했다. 1760년께에는 중국산 말과 맞바꾸기도 했는데 종마 1필에 소 3마리 비율로 수출했다.
일본에 수출한 것은 개항 직후인 1877년으로, 대마도 상인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수출은 청일전쟁 전후로, 일본군의 군수와 사역 목적으로 대량 수출이 이뤄져 폐단이 컸었다. 1890년 부산 주재 일본영사가 본국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농사에 지장이 생겨 농가가 어려워져 지방관리가 소 매매를 금지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 이후 점차 일본으로 소 수출이 늘어나자 일본은 통감부 주도로 자국 내 전염병 유입을 막으려 방역대책을 세웠다. 바로 그 결과물이 순종의 재가로 1909년에 발표된 '수출우검역법(輸出牛檢疫法)'이었다.
이에 따라 우암포에는 소 막사와 소 검역소가 들어서게 되고, 법정전염병인 우역(牛疫)을 방지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끌려온 소를 열흘 정도 이곳 막사에서 보호 관리하면서 이상이 없는 소에 한해서 반출하고, 병든 소는 검역소 화장터에서 사체를 소각하였다. 그리고 설립 초기 검역시설의 관리 주체는 부산세관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는 부산경찰서로 바뀌었다. 이렇게 부산항에서 검역을 마친 소는 배편으로 일본이나, 철도로 만주 등지로 반출되었다.
초기에 일본으로 가는 해상운송은 범선이나 기선을 이용했다. 1919년부터는 운송의 효율성을 높이려고 일본운수기선주식회사를 창립, 가축전용 화물선인 540t 닛조마루(日朝丸)를 건조하여 한 번에 400~500마리를 싣고 갔다. 1910년 당시 부산검역소를 통해 일본으로 보낸 한우는 1312마리였으나, 10년 후인 1920년에는 3만6208마리, 일제 말기인 1939년에는 5만2586마리로 폭증하였다. 전국 소의 70% 정도가 부산항을 통해 반출되다 보니 부산진 우시장을 비롯한 부산지역 우시장의 규모와 거래량은 전국 최고 수준에 달했다.
이렇게 소 수탈의 현장으로 명성을 크게 얻던 우암포는 1934년 구호사업의 하나로 적기만 매축사업이 시작되면서 소 바위와 함께 포구도 사라지고 우암이라는 이름마저도 뭍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대신에 포구 입구의 붉은 언덕배기인 적기(赤崎), 즉 아카사키라는 지명이 더 유명해졌다. 그리고 해방되면서 예전의 소 막사는 오갈 데 없는 귀환동포의 주거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2월, 소의 수급이 필요한 일본은 '한우 1만 마리를 수출하면 김 500만 속(束) 수입도 고려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해 왔다. 당시만 해도 김을 식용으로 하는 나라는 일본과 우리나라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은 우리의 최대 김 수출국이었으나 자국 김 생산 어민의 반대가 심해 마음대로 수입할 수 없었다. 우리 또한 소 수출에 대해서는 농민의 반대가 심했다. 그렇지만 두 나라는 절충을 벌여 한우 5000마리로 거의 합의를 보았다. 기대에 들뜬 정부는 모처럼 소 수출 재개를 위해 그동안 방치되었던 소 막사를 새롭게 단장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소 수출 소식이 우리 농민들의 귀에 전해지면서 전국적으로 강한 반발에 휩싸이게 되었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며 소 수출을 중지시키고 말았다. 그러다가 수개월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소 막사는 갑자기 밀어닥친 피란민을 수용하는 공간이 되었다. 대부분 이북 피란민이 수용된 이곳은 부산에서 가장 큰 구호시설로서 적기수용소라 불렸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이곳은 피란민의 애환이 스민 우암동 디아스포라(Diaspora) 마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