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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 우수 고교에 가다 1_경기 안화고
‘학생 참여 수업은 고교에 비효율적’ 편견을 깨다
안화고의 수업은 떠들썩하다
경기도 화성 동탄에 위치한 안화고를 찾은 10일, 블록 수업으로 진행되는 기술·가정 목공 수업이 한창이다. 학생들은 저마다 소리의 반사를 통해 진동을 만드는 ‘무전력 보드 스피커’ 설계에 몰두해 있었다. 휴대폰 거치대 형태로 만들되, 소리가 나가는 길을 효율적으로 만들어야 하고 디자인도 신경 써야 하니 꽤 까다로운 작업. 이정은 교사는 “기술·가정에서 발명 단원과 제조 기술 단원을 융합한 수업으로, 이론 수업과 설계·제작까지 마무리하기 위해 블록 수업 형태로 진행하고 있다”며 “완성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의 데시벨을 측정해 소리 길이 제대로 디자인되었는지 평가하고, 디자인 부분은 동료 평가로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화학실에서는 백종진 교사가 전날 올려놓은 10분가량의 예습용 영상을 학생들이 잘 이해하고 왔는지 점검하는 ‘사전 영상 학습 확인’으로 수업을 막 시작했다. 플립러닝 혹은 거꾸로 수업으로 잘 알려진 방식이다. 백 교사는 “산화-환원 반응의 정의를 학생들이 얼마나 이해했는지 확인하는 단계다. 모둠에서 서로 채점을 해 상·중·하로 나눈 성취도까지 매기도록 했는데, 이때 학생들이 대체로 절반도 못 맞았다면 다소 어려워하는 편이어서 좀 더 개념 설명을 보완한다”고 전했다.
과목마다, 단원마다, 학년마다 최적의 수업 기법 적용
안화고에서는 이처럼 거의 모든 과목에서 각각의 특성에 맞는 학 참여형 수업을 적용하고 있다. 수 노하우가 쌓이다보니 학년마다 다른 방식을 적용하기도 한다. 지문이 워낙 길어 수업 시간 안에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운 문학은 거꾸로 수업을 적용하니 이제 교사와 학생들이 눈을 마주치며 작품 속 주인공의 의도가 무엇인지 토의와 발 수업이 가능해졌고, 배운 내용을 도식화하는 과정이 중요한 생명과학 수업에는 비주얼싱킹을 접목한다. 동일 과목 안에서도 단원마다 정해진 성취 기준에 맞게 수업과 평가 방식을 달리 적용하는 단계까지 왔다.
1학년 수업에서는 활동과 표현할 기회를 많이 주면서 학생들마다 결과물을 내볼 수 있게 하고, 입시를 앞둔 3학년들은 질문을 통해 배우는 하브루타 방식을 적용, 이론 수업을 마친 후 10~15분가량 ‘짝 질문 만들기’를 활용해 배운 내용을 이해하고 심화한다. 학생들도 강의식 수업이나 문제 풀이 수업보다 이런 방식이 더 효과가 좋다는 반응이라고. 수업 변화는 중학교보다 고교가 더 힘들고, 고3은 현실과 맞지 않다는 선입견을 깰 수 있었던 이유는 2014년부터 “불모지에서 시작했다”고 표현한 윤은희 수석교사의 설명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2014년 안화고에 처음 부임했는데, 당시 거꾸로 교실이 세간에서 화제가 됐어요. 교사들 사이에 종전의 강의식 수업을 바꾸고 싶다는 고민이 깊어가던 무렵, 물꼬를 터준 셈이죠. 일단 제가 맡은 과학 수업부터 시작해보기로 했어요. 수업 내용을 사전 영상으로 촬영해보려고 인터넷과 외국 사이트를 뒤진 끝에 ‘익스프레인 에브리씽’이라는 앱을 알게 됐어요. 한데 안드로이드용이 아니더라고요. 녹음하고 다시 인코딩 작업을 거치다 보니 어떨 땐 영상을 다 날리기도 하고, 목소리도 맑게 하려고 옆에 1리터짜리 물도 항상 챙겨놨어요. 정말 울면서 했죠.(웃음)”
학생들을 적응시키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학급 밴드에 올려 놓은 영상을 듣지 않고 오는 학생들이 부지기수. 처음엔 화가나서 야단을 치기도 했다고.
“처음엔 다들 귀찮아했죠. 수업 시간에 잠도 못 자니까요. 학생들이 되묻는 거예요. 영상은 수업이 아닌데, 왜 듣지 않고 왔다고 야단을 치느냐고요. 제 일상을 차분히 얘기해봤어요. 선생님은 사전 영상을 만들려고 토요일 오전 9시에 출근해세 시간 동안 교과서를 공부하고, 내용을 정리하고, PPT를 만들고, 녹음을 한다. 집에 가면 밤 9시 정도 되는데 이렇게해서 10분짜리 영상 하나를 올린다, 이런데도 수업이 아닌 걸까? 조금 감동을 받은 눈치였는데, 그래선지 다음부터는 듣고 오는 아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더군요.(웃음)”
선행 학습 일반화된 현실, 교실 속 배움을 다시 고민하다
이처럼 수업이 활성화되는 모습을 지켜보던 교사들이 하나 둘씩 동참하기 시작했다. 마침 경기도교육청에서도 권장하던 전문적 학습 공동체를 꾸렸고, 2015년에는 전 교사가 참여했다. 당시 교사들의 연구 결과를 모두 쏟아부은 수업 사례 책자도 완성됐다. 신규 교사에게 이 책자를 보여주면 자연스럽게 자극이 되더라고. 2016년에는 교사들끼리 수업 친구를 맺게 해 공동으로 수업 컨퍼런스를 여는 등 좀 더 체계화했다. 수업이 변화하니 교과 외 교육과정도 활발해졌다. 학생들이 주도하는 자율 동아리도 앞서 구축이 됐고, 이를 모두 모아 오현정 교사가 학교 전체 교육과정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거쳤다. 수업이 먼저 바뀌니 학생부 기록은 안화고 교사들에게 큰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교사 몇 명이 수업을 바꿔나가기도 하지만, 구성원 전체가 참여해 학교 문화로 자리 잡게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오 교사는 본질적으로는 강의식 수업에서 느낀 교사들의 자괴감이 변화를 모색한 출발이었다고 말한다.
“제가 맡은 영어 과목은 이미 사교육을 통해 선행 학습이 진행된 경우가 많아요. 똑같은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이 학생들에게는 지루할 수밖에 없죠. 15분 이상 한 명도 재우지 않고 수업을 해야지 굳게 마음먹어도 성공하기가 힘들더라고요. 교실 안에서 학생들에게 새로운 배움이 있어야 했어요. 모둠 수업을 하며 저희들끼리 얘기를 나눠야 하고, 수행평가 비중을 55%까지 높이니 이제 잠자는 학생이 없어졌어요.”
안화고의 변화를 주도해온 윤 수석교사의 고민도 다르지 않았다.
“이전 학교에서 강의식 수업을 할 때는 물리Ⅰ·Ⅱ에 심화물리까지 맡았어요. 학생들은 분명 수업 시간에는 알았다고 하는데, 시험을 보고 나면 성적이 안 나오는 거예요. 저는 목이 쉬어라 수업을 하지만, 정작 학생들 머릿속에 들어가는 건 하나도 없었던 거죠. 이 과정이 반복되니 어느 순간 학생들에게 화를 내면서 수업을 하고 있었어요.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좀 더 학생들 입장에서 접근해야겠다는 고민이 수업 변화의 출발이었어요.”
수업 개선은 절실함에서 출발한다
교단에 선 지 30년이 넘은 선배 교사는 처음 진도 나가기도 바쁜데 왜 자꾸 이런 운동을 벌이는지 불만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업 경력이 아무리 오래되어도, 학생들은 졸았다. 고민 끝에 수업을 조금만 바꿔 질문 만들기를 시작했다. 더 이상 학생들은 졸지 않았다. 어느 날 윤 수석교사에게 ‘고맙다’는 한마디를 넌지시 건네더라고. 강요가 아닌, 교사로서 느끼는 동질감이 곧 가장 큰 동력이었을 터다.
안화고의 지난 시간을 함께 들여다본 진 이사는 수업 개선은 무엇보다 절실함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많은 이들이 거꾸로 수업은 고등학교에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다. 안화고는 이런 생각을 바꾸고 있다. 10분 내외의 동영상을 교사가 직접 녹화해 SNS로 제공하면 실제 수업에서 학생이 탐구할 시간이 확보된다고 한다. 대부분 과목이 각 교과마다 맞는 학생 참여형 수업 방법을 써서 교실을 깨우고 있다는 점이 더 놀랍다. 수업 개선은 중견 교사로부터 시작됐지만, 이를 지켜본 젊은 교사들도 함께 했다. 이런 절실함이 수업 자료를 제작하고, 녹화 도구 사용법을 찾아 배우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수업을 실행하기 위해 여전히 부족한 것은 ‘도구’다. 교사가 수업 준비를 하고, 학생들이 결과물을 발표하는 도구들이 충분히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도 교내 와이파이 사용이 불가능하고, 학생들이 만든 결과물 공유가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 점은 국가 차원에서 개선되어야 할 숙제다.”
토론대회에 도전한 계기는?
이수빈 안화고는 특히 발표, 토론 수업이 많아요. 수업에 적극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사회 이슈에 스스로 관심을 갖게 되고, 문제 해결에 친구들과 함께 직접 참여하다 보니 의견을 말하는 데 자신감이 생겼어요.
대부분 과목의 수업을 그렇게 진행하다 보니 분야를 불문하고 전반적인 사회문제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마침 교내에서 진행한 토론대회에 친구들과 함께 참여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학교 대표로 선발돼 경기도 대회에 나가 입상하며 토론에 본격적으로 재미를 느끼게 됐죠. 전국학생토론대회 공지를 보고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친구들을 모아 참여했어요.
김상희 3학년 독서와 문법 시간에 시사 이슈 토론하기를 진행했어요. 여러 이슈를 접하고 토론하다 보니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 대회까지 이어졌네요.
김현지 1학년 때부터 한국사, 생활과 윤리 시간에 토론 수업을 해오면서 자연스럽게 토론에 흥미가 생겼어요. 처음에는 앞에서 발표하는 것도 정말 떨렸지만, 하나의 주제를 놓고 다른 친구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일들이 점점 즐거워졌죠. 준비 과정부터 대회 순간까지 쉽지만은 않았지만, 계속 도전의식이 생기더라고요.
평소 학교에서 경험한 발표와 토론이 실제 토론대회 준비에 어떤 도움이 됐는지?
이수빈 거의 모든 과목에서 하브루타 활동이나 모둠 토론, 스피치 활동을 했어요. 과학 이슈 토론이나 수학 스피치 같은 활동들은 자연 계열인 제가 관심 분야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능력을 기르게 해줘서 큰 도움이 됐어요. 이번 대회는 의회식 3:3 토론으로 진행됐는데, 저는 즉흥적으로 우리 팀의 의견을 어필하고 반문하며 종합 정리해 사람들을 설득하는 3연사 역할을 맡았답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갈고닦은 능력 덕분에 무사히 마칠 수 있었어요.
김상희 1학년 때부터 하브루타 수업이나 모둠 발표 수업을 통해 제 의견을 정리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느꼈어요. 특히 사회 시간에 했던 ‘사회문제 발표하기’와 문학 시간에 했던 ‘단편 읽고 비평하기’에서 친구들과 대화를 통해 여러 시각이 있다는 것을 느꼈죠. 이는 토론할 때 상대방의 말을 무조건 반박하는 것이 아닌, 비평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줬어요.
김현지 선생님들께서 수업 시간에 한 문제를 놓고 모둠별로 토의해 발표를 하거나, 수업 지문과 관련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기회를 많이 주셨어요. 간단히는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친구들에게 설명해주기도 하고, 영상을 직접 제작해 발표하거나 연극, 그림 등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죠. 이런 활동들을 꾸준히 하다 보니 발표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처음 입학했을 때보다 많이 없어졌어요. 친구들도 토론에 익숙해지니 미리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공부해 수준 높은 토론의 장이 열리기도 해요. 반발 질문과 답변이 끊이지 않아 결국 선생님이 나서서 정리해주신 경험도 있답니다. 하하.
올 수시에서 학생부 종합 전형으로 보건 계열, 정치외교학과, 화학공학과에 각각 지원했다. 3년 동안 겪은 안화고 수업이 대입 준비와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김상희 안화고 수업을 통해 단순히 정보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있었어요. 듣기 좋은 말의 빠르기나 비언어적 표현의 사용도 알게 되니 수시 면접에 큰 도움이 되었죠. 깊게 생각하는 수학적 능력도 기를 수 있었고요.
김현지 수업 시간에 다양한 활동들을 하다보니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수업 내용도 즐겁게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수업 시간뿐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나 갈등을 해결하는 데 제 의견을 말하는 게 자연스러워졌고요.
이수빈 안화고는 무엇보다 학생들이 참여 할 기회를 많이 열어줬어요. 전국 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토론 역량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평소 수업을 통해 말하는 태도와 토론에서 존중하는 자세가 습관화됐기 때문일 거예요. 입시를 몸소 겪어보니 제가 그동안 경험하고 도전한 것들이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줬더라고요. 청소년기의 끝에서 제 자신이 누군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게 해준 거죠.
미즈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