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ster's second objection to social evolutionary explanation is that
the only successful example of functional explanation of this sort is market
selection of firms for profit-maximization (beneficial effect Y); those firms survive whose decision
making (practice X) is profit-maximizing
(1984, 28-33). (「Functional Explanation and
Metaphysical Individualism」, Justin Schwartz, 291쪽, http://www.jstor.org/pss/188355,
http://theacro.com/zbxe/413065)
사회 과학자들이 기능 개념을 별 생각 없이 애매하게 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반면 「Functional Explanation and Metaphysical
Individualism」에서는 기능 개념에 대해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논문은, 특히 위에 인용한 구절은,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나는 기능 개념을 효과 개념과 완전히 동일하게 쓰는 학자를 본 적이 없다. 만약
두 개념이 똑 같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논란이 되어 왔던 기능 개념을 쓰지 않고 그냥 효과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능 개념을 “이로운 효과”라는 의미로 쓰기도 하는 것 같다. 물론 개념은 정의하기 나름이니까 그렇게 쓴다고 해서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기능 개념을 쓰고 싶지는 않다. 어떤 사람이
강도와 싸우다가 TV를 던져서 강도를 때려잡았다고 하자. 그렇다고
“강도 때려잡기”가 TV의 기능이라고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웃기는 표현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진화 생물학과 공학에서 쓰는 기능 개념은 어떤 구조의 기원과 연결되어 있다. 눈의
기능은 시각이다. 즉 눈은 보기 위해 “설계”되었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더 잘 보았던 조상들이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자연 선택에 의해 눈이 진화했다. TV의 기능은 방송국에서 보내는 신호를 영상과 소리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런
목적을 위해 TV 전문가들이 TV를 설계했다.
나는 사회 과학에서도 기능 개념을 진화 생물학이나 공학에서와 비슷하게 정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업의 기능은 무엇인가? 우파 또는 기능론적 사회학에서는 소비자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노동자에게 취업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를 유지시키는 것이 기업의 기능이라고 이야기할 것 같다.
좌파 또는 갈등론적 사회학 또는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기업의 기능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은 기업의 기능은 없으며 위에서 제시한 것은 단순한 효과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입장은 무엇인가?
나는 이윤 추구가 기업의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즉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윤 추구라는 목적이 기업의 구조를 설명해 준다.
한편으로 자본가는 목적의식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며 그런 목적에 부합하게 기업을 운영한다. 예컨대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항상 원가 이하로 물건을 팔려고 하는 자본가는 사실상 없다. 자본가는 그런 식으로 기업을 운영했다가는 이윤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상품이 워낙 팔리지 않거나 자기 기업보다 작은 경쟁사를 망하게 하기 위해 때에 따라서는 원가 이하로 팔기도
한다. 하지만 원가 이하로 팔 때에도 “더 많은 이윤”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다. 상품이 워낙 팔리지 않을 때에는 원가 이하로 파는 것이 아예 못 파는 것보다 이윤 추구에 도움이 된다. 만약 원가 이하로 상품을 팔아서 경쟁사를 망하게 할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이윤 추구에 도움이 된다. 요컨대 자본가라는 지적인 존재가 이윤 추구라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기업의 구조를 설계한다. 이것은 공학적 의미의 기능과 관련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일종의 자연 선택이 기업들 사이의 경쟁에 작동한다. 이윤을
더 잘 얻는 기업은 흥하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망한다. 이것은 더 잘 보는 동물이 흥하고 잘 못 보는
동물이 망하는 것과 비슷하다. 기업이 동물과 비슷하게 몇 번 번식한 후에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이윤이라는 기준에 따라 흥하고 망한다는 측면에서는 자연 선택과 적어도 비슷하다. 결국 이윤을 더 잘
벌어들일 수 있는 구조인 기업이 살아남는다. 이것은 진화 생물학적 의미의 기능과 관련되어 있다.
자연 선택의 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에 이윤에 도움이 되는 기업의 구조적 특성 중에는 자본가가 의식적으로 설계하지
않았던 우연적 특성들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어쩌다 보니 생긴 어떤 특성이 이윤 획득에 도움이 되어서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 기업들이 더 잘 생존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이것은 눈먼 시계공의 자연 선택과
비슷하다. 하지만 자본가는 학습을 할 줄 안다. 따라서 설사
우발적으로 생긴 특성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윤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 다른 자본가들이 의식적으로 모방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자연 선택과 지적 설계는 뒤엉킬 수 있다.
나는 소비자의 욕망 만족 역시 기업의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즉 기업은
소비자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소비자의 욕망 만족이라는 목적이 기업의 구조를 설명해 준다.
한편으로 자본가는 목적의식적으로 소비자 만족을 추구하며 그런 목적에 부합하게 기업을 운영한다. 예컨대 TV를 생산하는 기업에서 일부러 음량 조절이 안되도록 TV를 만들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TV는 소비자가 덜 만족스러워하기 때문에 잘 팔리지 않을 것이며, 결국 이윤에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이윤을 위해서는 소비자를 어느
정도 만족시켜야 한다. 이것은 공학적 의미의 기능과 관련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일종의 자연 선택이 작동한다. 소비자를 더 잘 만족시키는
기업이 더 잘 생존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화 생물학적 의미의 기능과 관련되어 있다.
소비자 만족도 기업의 기능이고 이윤 추구도 기업의 기능이다. 소비자
만족은 이윤 추구에 도움이 된다.
“눈의 기능은 시각이다”라는 말도 맞지만 “눈의 기능은 잘
생존하도록 하는 것이다”라는 말도 맞고 “눈의 기능은 잘 번식하도록 하는 것이다”라는 말도 맞다. 잘 보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된다. 또한 생존은 번식에 도움이 된다. 죽은 동물은 성교를 할 수 없다.
나는 사회 유지가 기업의 기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종 보존이
성 충동의 기능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동물은 성 충동 때문에 자식을 낳는다. 그러면 종 보존이라는 효과가 생긴다. 하지만 성 충동이 자연 선택되는
과정에서 종 보존이라는 요인은 작동하지 않았다. 성 충동이 있어서 남들보다 자식을 더 잘 낳은 조상들이
성 충동이 없거나 부실해서 그렇지 못한 조상들에 비해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성 충동이 자연 선택된 것이다.
자본가들이 기업을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해 생각할 때 “어떻게 하면 소비자를
만족시켜서 이윤을 더 많이 벌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어떻게 하면 사회 유지에 도움이 될까?”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설사 자본가들이 후자에 대해 생각하더라도 전자의 고려가 훨씬 더 망각한 영향력을 끼친다. 또한 기업들의 경쟁에서 자연 선택이 작동할 때에 “소비자 만족”이라는
요인은 강력하게 작동하지만 “사회 유지”라는 요인 자체는 작동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