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피라미드의 수수께끼
지난해 이집트 여행을 다녀왔다. 가기 전에 피라미드에 관한 책을 들쳐보았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읽은지 한참 되는 셈이다. 지금은 그때 찍은 사진들을 들추어보며 새로운 여행 계획을 구상 중이다. 또 어떤 신비로운 세상을 보게 될지 설레는 마음으로 말이다.
피라미드는 예나 지금이나 불가사의 그 자체다. 피라미드가 세워진 시기는 대략 기원전 2500여 년 전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최소 4500년 전이라는 말이다. 그런 시대에 저렇게 엄청난 건축물의 축조가 가능했는지 예나 지금이나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억측만이 난무한다. 어떤 이들은 피라미드의 외형에 감탄했고, 또 어떤 이들은 피라미드를 쌓아올린 기술에 감탄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피라미드가 무엇을 위해 축조된 것인지 궁금해 하기도 했다.
이 책은 과거에서부터 피라미드에 관심을 가지고 쓴 여행기 등을 바탕으로 이러한 궁금증에 도전하는 발굴 이야기를 담았다. 이미 장식은 사라지고 원형만 남은 상태라 피라미드에 대해서는 온갖 주장이 난무한다. 다음은 이슬람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이븐 바투타가 한 말이다.
“이집트의 왕들은 대홍수가 일어나기 전, 끔찍한 꿈을 꾼 후 나일강 서쪽 기슭에 피라미드를 세웠다. 이들 건축물은 왕의 묘지와 학문의 저장고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12쪽)
피라미드는 오래 된 만큼이나 말도 많다. 어떤 자료에는 피라미드의 외장재를 허물어 인근 도시의 성을 쌓았다고도 한다. 주변의 돌이란 돌은 모두 피라미드에 몰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피라미드의 정상에는 수백 개의 낙서가 있다고 한다. 13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날짜도 보인다고 한다.
이로써 이 건축물의 외장재가 떨어져 나갔고 14세기 중반부터 서양의 방문객들이 그 위로 기어 올라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피라미드 정상 부근에 있는 사방 10m크기의 평평한 부분은 사라지고 없다고 한다.
대피라미드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말한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 서쪽 13킬로미터 지점의 광활한 기자의 모래 언덕에 피라미드 세 기가 서 있는데, 쿠푸 왕, 카프라 왕, 메카우레 왕의 피라미드가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이집트 최초의 융성기로 꼽히는 고왕국 시대에 건축된 것이다.
현재까지도 수 세기 동안 피라미드를 여행하고 쓴 기행문들이 상당한 정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제각각이고 과학적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중요한 메시지로 여기지는 않는다고 한다.
나. 피라미드 구조 해체, 발굴
1800년대 이후로는 피라미드의 구조를 파헤치는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 모두 피라미드 안에서 어떤 특정한 것들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신비한 것들을 찬양하거나 내부에서 제사나 예배 등 종교 의식을 거행했다고 할 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실제로 이집트 여행을 하면서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좁은 동굴을 엉성한 계단을 따라 땀을 흘리며 올라갔더니 그야말로 서너평 크기의 텅빈 방 뿐, 아무 것도 없었다. 한쪽으로 빛 바랜 장식의 석관만이 덩그렇게 놓여있다. 그 빈 방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그 좁은 통로를 기어오른다. 사실 조금은 허탈했다.
현재는 외장재로 사용되었던 고급 석회암은 사라지고 거대한 돌계단처럼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언뜻 보면 그저 거대한 돌무더기일텐데 그 위요만큼은 우리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도굴 탓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부에는 어떠한 상형문자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피라미드가 얼마나 오래 된 것인지를 말한다.
문자 기록이 없다는 것은 이 고대 유물에 관한 어떠한 증거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무런 정보가 없는 피라미드는 가치를 부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라미드의 돌들은 한때 성을 쌓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그 때문에 피라미드의 정상 부근의 돌이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피라미드를 파괴하고 운하를 따라 그 돌들을 운반했으머, 그 흔적으로 완벽하게 보존된 배 한 척 발굴하기도 했다. 이 배는 길이가 무려 43.4m, 폭 5.9m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이로 보아 피라미드 주변까지 물이 흘러들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고, 그 배로 거대한 돌을 운반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다. 쿠푸 피라미드의 내부 구조
“피라미드가 들어서 있는 곳이 옛 이집트인의 묘지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피라미드가 파라오나 왕족, 혹은 이를 세우도록 명했던 사람을 매장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묘나 능이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3개의 피라미드 외에도, 아주 정확한 규격에 매끈한 돌로 지어진 직사각형의 긴 무덤들,... 그리고 수많은 작은 피라미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앙투안 모리송, <이집트 여행>, 1697.(96쪽)
피라미드는 규모가 제 각각이지만, 지하 묘소를 보호하기 위한 상부구조물일 뿐이다. 그곳의 통로가 지면에서 여기저기로 길을 인도한다. 수직갱도를 통해 아래층으로 접근해 들어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러한 대피라미드의 내부 구조는 이 건축물을 신화적인 것으로 만든다.
현재의 피라미드는 거대한 돌계단 형태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곳에 석회암으로 외장재 마감이 되어 있었다. 피라미드에는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는데 입구를 들어서면 통로는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가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관광객을 위해 개방된 곳은 과거 도굴꾼이 뚫었다고 하는 통로로 상부로 이어져 있었다.
그곳이 지금 추측으로 '여왕의 방'인 듯하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 지금 그곳에서 여왕인지 왕인지를 알려줄 만한 어떤 것도 없었다. 책속의 통로와 내가 직접 가본 곳을 비교해 보면 우리가 올라간 비스듬한 통로가 ‘통풍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피라미드 안은 처음 축조할 때는 상당히 거칠었을 것이다. 그곳 거친 바위를 성공들이 다시 파서 장례실을 만들고 여기에 왕궁의 파사드가 장식되어 있는 대기실을 갖추었던 것이다. 당시 석공들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발굴 결과 밝혀졌지만 그 구조가 가진 역할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리고 있거나 궁금해 하고 있는 형편이다. 여왕의 방, 왕의 방과 이어진 통풍로의 진짜 역할, 대회랑의 기능 등에 대한 궁금증도 그 중 하나다.
그러나 나의 궁금증은 조금 원론적이다. 즉 거대한 돌을 아귀를 정확히 맞추어가면서 쌓아올리는 것도 대단한 축조술인데 이와 더불어 내부의 통로나 각종 방, 통풍로 등은 건축 당시에 정밀하게 계산되어 축조된 것이라는 점에서 궁금증을 억제할 길이 없다.
적어도 4500여 년 전에 이러한 엄청난 건축물을 완성했다는 사실에 이르면 입을 다물 수 없다. 거기에 지면에서 최상층까지 높이가 146.6미터에 달하니 오늘날 아파트 45층 정도에 해당하는 높이일 것이다. 당연히 그 시기에 과학이라는 것도 보잘 것이 없었을 텐데, 그 엄청난 규모의 돌을 쌓아올렸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불가사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피라미드 앞에는 피라미드를 지키는 거대한 스핑크스가 있다. 미술 책이나 이집트 여행 가이드에서만 보던 스핑크스를 눈앞에서 실물로 보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겉면이 조금씩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 모습은 늠름했고 모두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스핑크스와 함께 그 뒤로 멀리 보이는 피라미드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지만 기막힌 한폭의 그림이었다.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과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는 반인반수의 이 형체는 무엇보다 왕의 권력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스핑크스에 대해 구체적으로 뭐 하나 시원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라. 피라미드에 대한 주장과 진실
이집트인들은 그들이 어떻게 피라미드를 만들었는지에 관해 어떠한 정보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피라미드가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방법을 통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피라미드에 관한 모든 오늘날의 이야기들은 역사가나 호사가들의 입방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먼저 피라미드는 오랫동안 천문대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주장이다. 즉 쿠푸는 자신의 묘소로 완공하기 이전까지 일단 50층으로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런가 하면 성경적인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최근에는 1971년에 <대피라미드의 수수께끼>라는 책에서 앙드레 포샹은 ‘만일 쿠푸의 피라미드가 정말로 무덤이라면, 그것은 이시스 교의 교리를 전수하는 곳으로도 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그 높은 곳까지 60톤이라 되는 거대한 돌을 어떻게 쌓아올렸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있다. 여기에 대해 기중기 같은 기계를 사용했을 것이라 가정하기도 했고, 또 다른 주장은 경사면을 이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 역시 아직도 속 시원한 연구는 없다.
실제로 기자나 혹은 메이둠, 아부구랍 등지에서 경사로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경사로의 형태가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축조하기 위해 아스완의 화강암이나 투라의 석회암처럼 돌은 먼 곳에서 배로 실어오기도 하고 가까운 채석장에서 구해오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경사로는 피라미드의 층을 쌓는데 사용되었다는 주장은 가능하고, 항구나 채석장에서부터 돌을 끌어오는데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게 된다. 그 동안 경사로에 대해 수직 형태, 휘감는 형태 혹은 이 둘의 혼합 형태 등 다양한 형태가 제시되기도 했다.
피라미드 축조뿐만 아니라 내부구조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는 마이크로 중력 측정기, 광섬유, 무선 탐지기, 카메라를 장착한 로봇 등 다양한 현대적 장비의 등장으로 보다 수월하게 피라미드의 구조와 그 역할을 찾고 있다.
이러한 장비를 통해 피라미드의 빈 공간을 찾아내고 있지만, 앞으로도 피라미드는 밝혀낼 것이 많다. 피라미드에 관한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현재는 피라미드 건설이 나일 강의 범람 기간 동안 실업자가 된 농민 부양 수단인 이집트의 뉴딜정책이라는 견해가 통용된다.
실제로 당시 피라미드의 노역자들이 임금을 받고 일했다는 것이 여러 발굴 결과 정설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도 아직도 피라미드가 명료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이것이 전자책이 갖는 한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아쉽다.
분명한 것은 황량한 벌판에 덩그마니 서 있는 세 개의 거대한 돌무더기 피라미드는 그 자체로 엄청나게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그 앞에 선 인간은 초라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다 문득 오늘날 피라미드를 축조한다면 그 거대한 돌을 어떻게 들어올릴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60톤을 들어올릴 수 있는 크레인이라면 선박 건조용 뿐일 텐데 그것을 피라미드 축조에 사용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실제로 보고도 생각나는 것은 그저 현기증과 더 헝크러진 머릿속뿐이다.